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64화 (65/388)

< 64. 막간극 : 함정 >

*

왕들의 회랑. 어전으로 향하는 그 긴 복도를 천천히 거닐며, 헬르가는 과거의 흔적을 읽고 있었다.

저 낙서는 그가 일곱 살 때 남겼던 것이다. 저 그림은 그가 열두 살 때 보고 감탄했던 벽화이며, 저 흔적은 그가 열다섯 살 때 실수로 그었던 칼자국이다.

왕의 회랑에 그려진, 색 바랜 영웅 서사시들이 그의 곁을 지나 뒤로 멀어졌다. 점점 더 앞으로.

어전에 다가갈수록 더 오랜 왕들의 그림이 나타났다. 석주에 매달려 일렁이는 횃불들 탓일까. 그림 속 선왕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언젠가,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저 서사시들의 마지막에 자신의 일대기 또한 그려지면 좋겠다고.

아버지의 인생을 그린 회랑의 벽화 바로 뒤에. 자신의 손자가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이 위대한 왕조가 천년을 더 이어지기를.

이 긴 회랑이 마침내 풍화된 벽화로 가득 차, 새로운 회랑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전하.”

어느새, 그의 발이 멈춰 있었다. 그의 기사들은 그의 뒤에 도열한 채, 묵묵히 그의 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헬르가 왕자는 울부짖는 용이 새겨진 어전의 문고리를 노려본 채로, 멈춰 서 있었다.

“···호위가 없다.”

“예?”

“어전에 어찌 호위가 없단 말이냐? 폐하께서 어전에 계신 것이 확실하더냐?”

“오늘 그 누구도 폐하께서 어전을 떠나는 것을 보지 못했나이다.”

“원탁 의회는?”

“원탁 기사들은 지금 이 시간에 모두 자택에 있지 않겠습니까?”

“무기를 들라.”

왕자는 문고리를 쥐었다. 용의 입에 물린 황동 고리가 작은 마찰음을 냈다. 어전 회랑은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왕자는 조용히 속삭였다.

“함정이다.”

-스르릉.

왕자의 가신들은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자의 판단을 믿었다. 왕자는 등 뒤로 들리는, 칼집에서 칼날이 뽑혀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동시에 문고리를 거칠게 밀었다.

-끼이이익···.

어전의 대문이 열렸다. 신경을 자극하는 마찰음과 함께, 천천히. 음울한 달빛이 비치는 어전이 드러났다.

석주의 사이로, 건국왕의 일대기가 펼쳐진 이 거대한 어전 한 가운데에. 저 멀리, 시야의 끝에.

“···쿨럭.”

노왕이 홀로 옥좌에 앉은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용을 조각한 화려한 옥좌에 반쯤 기대어 누워서, 턱을 고인 채 오만하게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

왕자는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전은 고요했다. 시비 한 사람도 노왕을 보위하지 않고 있었다.

왕자는 천천히, 어전의 알현지로 향했다. 금지(禁地). 왕혈을 잇지 못한 자는 들어설 수 없고, 설령 왕혈을 이었다 하더라도 무장한 채 넘을 수 없는 선을 밟아.

더 앞으로.

-절그럭.

왕자는 칼자루에 손을 얹고, 단상 위 옥좌에 앉아 있는 노왕을 올려보았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이 사납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폐하, 제가 왔습니다.”

“···쿨럭. 그래. 네가 드디어 내게 칼을 들었구나.”

노왕은 비죽, 웃었다.

“네 누이가 죽었다.”

“···!”

왕자의 눈이 충격에 흔들렸다. 모리아, 시장의 화재 현장으로 출타했다는 것은 들었지만, 죽었다니?

게다가 모리아가 왕성 밖으로 향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찾아온 자신보다 정보를 먼저 입수했단 말인가?

주위에 누가 있다. 왕자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노왕이 옥좌를 톡, 톡. 두드렸다.

“네 누이가 죽고, 이제 남은 왕혈이 너 하나 뿐이구나.”

“···폐하.”

“그럼 네가 죽고 난 뒤엔, 그리고 내가 죽고 난 뒤엔. 누가 남겠느냐?”

노왕은 거칠게 기침하고는, 천천히 주위를 살펴 보았다. 왕자의 뒤에, 감히 금지를 밟지 못한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열 명이라. 노왕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이 왕조의 마지막을 보러 왔느냐?”

“데인 왕의 후예는 이 시간에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헬르가.”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왕자는 이를 드러내며 거칠게 외쳤다.

“나를 비센테라 부르십시오. 폐하. 아버지. 당신께서 내게 지어준 이름으로!”

“이제 나의 이름을, 그리고 네 선왕들의 이름을 잇지 않겠단 말이구나.”

“헬르가의 시간은 이제 끝났습니다. 왕국의 기사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원탁 의회의 기사들은? 위대한 기사왕의 기수들, 영웅들의 후예들, 명예로운 가신들은! 당신의 치세에 이 모든 이들이 왕도를 등졌어!!”

“큭. 큭큭···.”

노왕은 날카롭게 웃었다.

“모리아가 죽고, 이제 더 이상 날 막을 자가 없지. 모리아···. 그 계집은 너무 영악했어. 나와 그 계집은 서로 등 뒤에 칼날을 숨기고···. 쿨럭. 동시에 협력했지. 이 왕실을 서로의 손에 넣으려고···.”

“···당신?”

“큭. 큭큭. 쿨럭. 왕의 몸은 날 받아들이기엔 너무 나약했다. 젊을 시절엔 참 좋았는데. 큭큭. 쿨럭.”

노왕은 가래 끓는 웃음을 지으며 거칠게 기침했다. 왕자는 왕의 갑작스러운 말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말을···. 대체 지금 무슨···?

“그 계집은 제 꾀에 넘어가, 제 야망에 삼켜져 죽었구나. 큭큭. 사제의 정이라. 가엾도다. 쿨럭. 그 계집은 자기 역할을 다 했고, 이제 이 판도는 내가 온전히 삼키게 되었다.”

“넌 누구냐.”

“이제 누가 날 막을 테냐? 쿨럭. 큭큭. 모리아가 네 삶을 이어줄 동앗줄이었음을 너는 몰랐구나. 큭. 쿨럭. 쿨럭! 이제 이 빌어먹을 몸뚱이도, 작별이다.”

예상보단 빨랐지만 말야. 노왕은 키득거렸다. 노왕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달빛이 그의 몸 위로 내려앉고, 그의 뒤에 기이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왕자는 노왕의 뒤에서 이글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암녹색 그림자가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기이하게, 비틀린 몸부림을 치며, 놈은 웃고 있었다.

[네 가문은 여기서 끝난다. 비센테.]

“샤일드여 가호하소서.”

-스르릉.

왕자는 천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노왕이 킥, 하고 웃었다.

“당신의 가호 아래, 왕가의 영원한 영광을.”

[네가 빌어야 할 신은 놈이 아니다.]

달이 그림자 뒤로 숨고, 어전에 잠시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노왕의 얼굴 위로 해골 형상의 영체가 떠올랐다.

[나에게 기도해라. 어린 필멸자야.]

*

바레인은 깜빡거리는 등유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가 가진 마지막 기름을 한 시간 전에 부은 차였고, 이제 돌아갈 때 최소한의 기름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 좋은 밤이 없었다. 왕가의 비밀 묘지를 탐색하기엔.

시장의 화재와 폭발. 그리고 근위병들의 경로. 모든 상황이 그를 위해 안배된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 형제는 디모니카처럼 이단이 보이는 곳을 모조리 깨부수고 있는 것 같았다. 본래라면 마뜩치 않은 행동이겠지만, 지금만큼은 아주 적절한 지원사격이었다.

그동안 계획만 짜고 있었던, 왕가의 비밀 묘지에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바레인은 수월하게 잠입할 수 있었다.

‘건국 시조의 무덤이라···.’

건국 시조, 기사왕 데인을 위해 마련된 이 거대한 묘소는, 데인 왕이 죽은 용을 위해 만들었다는 전설 속의 묘소와 짝을 이루는 형태로 건설되었다고 했다. 용의 무덤은 지금 어떤 문헌도 남아있지 않지만. 아마도 더럽게 깊었을 것이다.

왕의 무덤이 이렇게 깊게 파고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바레인은 등유의 불빛에 일렁거리는 벽화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내려갔다.

“흠. 세 번째로군.”

당연한 일이지만 왕의 무덤엔 함정이 매설되어 있지 않았다. 이 묘지에 입장할 수 있는 이들이라 해봐야 왕족들 뿐인데, 자신의 후손들을 죽이기 위해 함정을 파는 조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물리적인 함정이 아닌. 마법적 결계들이 이 전설적인 무덤 안에 이따금씩 설치되어 있었다. 바레인은 조심스럽게 함정의 경계를 밟아 넘으며 생각했다.

‘진짜 뭐가 있긴 있겠군.’

어쨌건, 이 복도의 곡률과 마력의 밀도를 계산해본다면 이제 무덤의 중심부가 멀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덤은 도시 동문 외곽에 입구를 두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 이어진 이 길은 도시의 정중앙을 향해 있었다.

즉, 바레인의 머리 위, 저 먼 대지 위로 올라간다면 왕성의 입구가 있을 것이다. 놀랍도록 정교한 설계였다. 지도상, 왕성의 입구와 묘비의 중심부는 수직으로 이어져 있었다.

매 순간 시조의 가호를 받으려는 고대인의 건축 사상이 느껴졌다. 바레인은 복도의 끝에 비쳐 보이는 문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수천 번의 겨울이 지나도.

-계절 아래 너희가 떨고 있더라도.

-아들아. 담대하라. 너희는 길을 잃지 않으리라.

깜빡거리는 등유 아래로, 고대 대륙 방언으로 적힌 문장이 일렁거렸다. 데인 왕의 시절에 새겼을 이 문장은, 천 년의 시간을 감내했음에도 여전히 그 힘있는 필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자식들을 향한 데인 왕의 마음일까. 바레인은 왕의 문장이 찍힌 문을 천천히 밀어 열였다.

-쿠르르릉···.

석문이 밀리며 먼지가 떨어졌다. 곧, 묘소의 정경이 보였다.

“허···.”

그의 한숨이 메아리쳤다. 바레인의 눈 앞에, 거대한 공동이 펼쳐져 있었다. 용의 무덤이 이랬을까? 죽은 용을 위한 거대한 공동을 파두었을까? 그와 같은 구조로 이곳을 축조했을까?

여기엔, 용 대신. 거인이 잠들어있었다.

“언덕 거인···!”

말 그대로 거대한 인간의 형상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유골만 남은 채로, 천장을 향해 손을 뻗는 모양으로.

집? 탑? 아니, 성이다. 거인의 크기는 거의 성채에 육박했다. 바레인은 그제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언덕 거인이 이 왕국 영토 전역의 가장 볕 바른 평야를 홀로 점유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리고 그를 홀로 무찌른 데인 왕이, 그의 모든 업적을 통틀어 그 일을 가장 뛰어난 위업으로 인정받았는지.

오히려 전설과 동화에 묘사된 거인은 이 유해의 저열한 왜곡에 불과했다. 바레인은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지만, 이 유골의 이끼 낀 어금니 하나가 그의 상체보다 컸다.

“제기랄.”

바레인은 거인의 두개골에 박혀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크기나 비율, 형상으로 보았을 때 저것은 양손대검이겠으나, 거인의 두개골에 박혀 있는 모습이 작은 못이나 이쑤시개 같았다. 저런 작은 칼로 이 거대한 존재를 무찔렀단 말인가?

“기사왕 데인···.”

그리고 저 멀리, 공동의 벽을 가득 채운 엄숙한 묘사화들의 중심부엔 데인 왕들의 유해가 있었다. 용의 형상이 그려진 금속 왕좌에 앉아 거인의 유해를 내려보는 자세로. 그리고, 바레인의 위치를 마주보는 자세로.

수십 구의 유해들이 옥좌에 앉아 바레인을, 아마도 자신이 다스렸던 왕성의 입구를 향해 있었다. 가장 가운데에, 기골이 장대한 유골은 데인의 것일 것이다. 그 옆으로 그의 후손들이 도열하듯 늘어서 앉아 있었다.

바레인은 홀린 듯 거인의 유해로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그의 등유가 일렁거리는 방향에 따라, 거인의 두개골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살아있는 듯이 너울졌다.

-타다닥.

어디선가, 들쥐가 내달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바레인은 유해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듯 했다.

그는 잠시 자신의 본분을, 왕도에 숨어든 이단을 추적하는 헤레티카로서의 본분을 잊은 채 이 역사적인 유해에 접근했다.

-타닥.

다시, 들쥐가 내달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치이이익···.

사위가 어둠에 잠겼다. 등유가 마침내 기름을 다해 꺼졌다.

“제기랄.”

바레인은 급히 남은 기름을 찾아 품을 뒤적였다. 무덤은 어떤 광원도 없어 숨막히는 어둠 속에서 고요했다. 짙은 먼지 냄새만 가득했다. 기름을 찾던 그의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성냥을 꺼내어 팔목 보호대에 긁었다.

-치이익!

성냥이 자그마한 불빛을 내며 간신히 손바닥 근처만 밝히는 순간—

-치익.

비쩍 마른 손가락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성냥 끝을 잡고, 불꽃을 꺼버렸다.

“하, 베이타서스—“

-푸욱!

바레인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목젖에 칼날이 파고들었다.

*

노왕은 칼을 뽑아든 왕자를 내려보며 잠시 멈칫하더니, 곧 피식 웃었다.

“마침 사제의 피가 조금 모자라긴 했건만.”

-쿠르르릉···.

그리고 지진이 왕성을 덮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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