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65화 (66/388)

< 65. 종막 : 죽은 왕을 위한 애가(哀歌) >

*

키르하스는 건물과 건물, 그 지붕 위를 빠르게 타넘으며 시장 거리로 향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그녀에게 내린 임무는 바이에미어에게 위협을 전달하라는 것뿐이었다. 설마 페르난데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겠지만···.

‘불안해.’

이걸 뭐라 부를까, 키르하스는 지붕의 모서리를 밟고 몸을 튕겨 다음 건물 창틀로 뛰어 오르며 생각에 잠겼다. 의존증?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의존적인 존재였던가?

황무지에서, 그녀의 부족이 멸망하고 그녀 홀로 노예 시장에 팔려갈 때에도, 그리고 무희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하고 자존심 강하다는 이유로 이단 종파의 제물로 팔려갈 때에도. 그녀는 결코 누군가에게 자신의 운명을 위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붕 난간의 배수로를 밟고 몸을 틀어 공중으로 뛰어 오르며 떠올렸다. 시장 골목에서 풍겨오는 짙은 재와 화염의 냄새를 맡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기억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너나 나와 같은 사람들은 목적이 더 중요하지. ‘세상을 구하라.’, ‘악마를 불태워라.’, ‘이단을 섬멸하라.’ 모두 좋은 목적이지만, 그게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지.

피 냄새 자욱한 지하수로 안에서,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며.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기억한다.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와 함께, 그 짙푸른 하늘을 등지고 그녀를 내려보던 페르난데스의 눈동자를.

불씨의 냄새였다. 지독하고 뜨거운 냄새. 그의 말, 어조, 말투와 작은 제스처까지. 그 무엇 하나 그녀에게 유혹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새벽 빛을 머금고 있던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음울한 눈동자를 기억한다.

‘은공.’

의존증이라 불러도 좋다. 그녀의 선조들이 그녀를 매도한다 하더라도. 칼라니 씨족의 위대한 혈통을 잊고, 애완동물처럼, 노예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꾸짖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이미 페르난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타닷.

키르하스는 시장 골목의 지붕 어귀에 무릎을 꿇고 거리를 내려보며 페르난데스의 흔적을 쫓았다. 마법과 격투의 흔적이 골목 여기저기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재의 냄새에 가려져, 페르난데스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해···.’

-투둑. 투두둑.

그녀의 콧등에 빗방울이 톡,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 보았다. 방금까지 달빛이 고고하던 하늘이 어느새 짙은 먹구름에 휩싸여 있었다.

-콰르르릉!!

암녹색 번갯불이 구름 사이를 타고 흘러다녔다. 구름이, 왕성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마력을 느끼는 재주는 없었지만, 그녀의 본능이 위협을 감지하고 경종을 울려댔다.

“크윽···!”

곧, 엄청난 존재감이 하늘 위에 드리워졌다. 호흡을 앗아가는 압박감에 키르하스는 순간 균형을 잃고 주저 앉았다. 저 하늘 위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검은 구름 위에, 어떤 존재가. 고대의 존재가.

신과 같은 존재가!

‘은공···!!’

그녀의 뇌리에 폐광촌의 전투가 떠올랐다. 페르난데스는 압박감과 긴장감에 다리가 풀린 그녀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거의 죽음에 달하는 중상을 입었었다.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더 이상은. 그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

-쿵, 쿵, 쿵.

키르하스의 매끄러운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의지를 연료 삼아 심장이 맥박쳤다. 혈류가 빠르게 돌며, 몸에 체온이 돌아왔다. 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비틀거리고는, 그녀는 다시 왕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오감을 뛰어 넘은 감각, 직감과 육감이 페르난데스의 자취를 본능적으로 잡아, 그녀에게 길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육체 상태를 완벽히 고려한 최적화된 동선이, 그녀의 눈 앞에 펼쳐졌다.

검은 빗물이 시야를 온통 가리고, 바닥이 젖어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보는 길은 그 날 새벽 밤하늘의 짙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그녀의 주군에게 향하는 길을.

*

아벨은 교회 첨탑 위에 서서, 왕도 아래로 보이는 드넓은 보리밭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보리 수확철이 끝나면 또 다른 작물을 기르겠지. 아벨은 한때 이 언덕 전체가 피로 물들었던 시절이 있음을 기억했다.

언덕 거인, 신의 사생아. 혹은 추락한 반신. 그 정체는 신화 시대의 비밀에 휩싸여 있었지만, 놈은 천상 전쟁 이래로 살아남은 신혈족 중 하나였다. 그저 앉아있는 것 만으로도 요새와 같던 놈을, 기사왕 다인이 홀로 무찔렀던 때를 기억했다.

내 아이다.

아벨은 보리밭이 초원이던 무렵, 이 거대한 도시 대신 목책과 움집이 늘어서던 시절을 떠올렸다. 빛나는 왕. 기사들의 군주. 언덕 거인을 무찌른 위대한 영웅. 다인.

그를 추종하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지키겠다 맹세한 수많은 기사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녀의 심상 세계, 겨울의 묘비들.

나 또한 그 영웅들과 함께 쓰러졌지.

매장 교단의 마지막 군세는 죽은 기사들의 유해를 일으킨 대군이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생전의 무예를 여실히 뽐내던 강력한 기사들이 다인의 나라를 공격했다. 아벨은 이 초원 위를 날아, 그들의 한 가운데에 떨어졌다.

그들의 군세를 박살내고, 이 어린 인간들을 지켜내는 데에 필요한 자원이 그녀의 목숨 뿐이라면, 고작 그것 뿐이라면.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내는 대가가 고작 그것 뿐이라면. 아벨은 그것으로 좋았다.

생과 사의, 저승과 물질 세계의 경계선으로. 아벨의 영혼에 흐르는 신성은 그녀를 영원히 못박아 두었다. 죽음은 그녀에게 안식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죽여야 했던 그녀의 기사들에 대한 영원한 애가(哀歌)였다.

‘이것이 나에게 돌아온 대가라면, 나는 기꺼이 영원토록 이들의 위업을 기리겠다.’

그러던 그녀의 세계에, 한 사내가 들어왔다. 페르난데스. 아벨은 그의 이름을 입 안에서 잠시 굴리고,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깨우고, 자신에게 무례한 마법을 걸고, 뻔뻔하게도 도와달라 손을 뻗은 이단심문관의 모습을. 그녀는 그의 피로에 찌든 눈, 그 깊은 곳에서 애착을 볼 수 있었다. 삶에 대한,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의협심. 무엇이라 표현해도 좋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물질 세계로 나서기로 했다. 자신의 몸이 한나절 이상 유지될 수 없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그대가 그 풍경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소.

그녀의 오랜 희생에, 더 나은 대가가 있을 수 있다고. 페르난데스는 그리 말했다. 누군가에게 희생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못된 녀석. 정작 너는 그러지 않잖느냐.’

정작 페르난데스, 그 자신은 자신의 육신, 생명, 그리고 영혼을 모두 내던지며. 마치 들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세계의 구원’을 위해서. 또는 ‘아들의 구원’을 위해서.

-쿠르르르릉!!

“이런!”

지진이 그녀가 서 있는 종탑을 덮쳤다. 아벨은 생각에서 깨어나, 거칠게 흔들리는 종탑의 벽을 짚었다. 엄청난 힘이, 하늘 위에서, 그리고 땅 아래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기묘하게 이어진 마력이 이 도시 전체를 덮어 가고 있었다.

익숙한 존재감이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녀의 최후를 비웃던 마법사들과 똑 같은, 지독하고 더러운 네크로맨시의 마력이. 아벨은 새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콰르르릉!!

-쏴아아아아!!!

먹구름이 왕성을 휘감고, 검은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벨은 그 사이를 타고 흐르는 암녹색 번개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서 명백히 빛나는 음산한 시선과, 절규하는 영혼의 파편들까지.

-콰르르르릉!!

번개가 한 순간 어둠에 휩싸인 도시 한 가운데로 떨어지며, 도시의 광원이 되었다. 도시는 색채를 빼앗긴 채 희고, 검게 명멸했다. 아벨은 그 광경을 알고 있었다.

“매장 교단···!”

아벨의 눈이 분노에 이글거렸다. 그녀는 곧 흔들리는 종탑의 난간을 붙잡고, 지면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

모리아의 마지막 호흡을 듣고, 잠시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그의 주위를 감싸고, 시장의 골목을 불태우고 있는 화재를 바라보았다. 그가 특별히 조치하지 않아도, 이 거대한 화재는 그가 있는 자리까지 살라먹을 터였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지.’

공식적으로 모리아는 마녀로 낙인 찍혔겠지만, 그녀의 시신을 장대에 걸고 만신전의 본보기로 삼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이 변덕에 불과하더라도.

-과도하게 감성적이구나.

페이자쉬는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도 고통이 섞여 있었다. 학대와 차별, 멸시와 조롱 속에서 지옥 마력에 손을 대는 재능 있는 마법사의 삶이란, 그에겐 익숙한 것이었을 테니까.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모리아의 시신을 안아 올렸다. 그는 치솟는 불길 안으로 그녀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타다다닥.

그의 팔에 불이 옮겨 붙으며, 그의 양팔을 거칠게 태웠다. 살이 익는 고통 속에서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고 잠이 든 듯 평온해진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 들리나?

‘그래. 이제 더 이상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구나.’

-쿠르르릉···.

페르난데스의 비전 시야가 지하 저 먼 곳에서 끓어오르는 마력을 감지했다. 생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균열이, 지하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이제 이 도시 전역을 향해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청동 왕좌의 기능이 정상이었다면 지하에서 벌어진 대주문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왕성이군.’

-정답이다.

이 거대한 마법의 중심은 지하의 제단이었지만, 그 촉매는 왕성에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거미줄 치듯 하늘 위를 덮어가는 암녹색 마력의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바스라진 영혼의 편린을 이어 붙인 마력의 흔적.

‘뭄토가 돌아왔군.’

-악에 받쳤군. 약이 오를 만도 하지.

‘봉인된 주제에 힘을 과하게 쓰는데?’

-다 제 살 깎아먹는 짓이지. 여기서 놈을 저지하면, 놈의 세력에 타격이 있을 거야.

그렇다면 도박수를 던질 만 하지. 페르난데스는 왕성을 향해 모여드는 먹구름들을 바라보았다. 소용돌이치는 구름의 한 가운데에, 음산한 시선이 보였다. 악몽의 뭄토가 이 지역을 가호하고 있었다.

-콰지지직.

삶과 죽음의 경계가 다시 한 번 허물어졌다. 이 도시의 누구도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 지역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말 그대로,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뭄토의 권역에 속한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청동 왕좌는 만 하루는 사용하지 못할 것이고, 첼리니의 마력에 불탄 오른팔은 기능을 상실했다. 그의 무장은 단검 한 자루 뿐. 솔직히 만전이라 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타다닥.

잠시 몸을 풀고, 페르난데스는 왕성을 향해 뛰었다. 디모니카의 혈액이 그의 몸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당장 지쳐 쓰러질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고, 그 정도의 체력만 보장된다면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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