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전설에 이르길, 늪에서 괴물을 무찌르고. >
*
페르난데스는 왕성을 향해 달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뭄토의 시선을 느꼈다. 모든 대악마들이 그렇지만, 뭄토는 개중 독보적인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한때 필멸자였던 탓일까, 놈은 더 탐욕스럽게 자신의 명성을 높히고,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길 원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뭄토는 자신의 하수인이 이 세계에 활개칠 때, 그 모든 순간들을 그 자신의 눈으로 보고자 했다.
‘그게 놈의 패착이지.’
악몽의 뭄토는 고대 만신전의 봉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놈이 직접 봉인의 틈 사이로 자신의 가호를 투사하고 있다면, 그건 곧 거시적인 관점에서 놈에게 다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검은 빗물 사이를 뚫고 날아다니는 암녹색 영체들을 곁눈질했다. 놈들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산 자를 찾아 떠다니고 있었다. 이 도시는 천천히 죽음에 삼켜지고 있었다.
-마법도 없고, 무기도 없지. 자, 페르난데스. 혼령을 어찌 상대할테냐?
‘피로.’
왕성을 향해 길게 뻗어 있는 성하대로에서, 페르난데스는 단검을 꽉 틀어쥐고 속삭였다.
‘테트라갈란을 봉인하던 때를 기억하나?’
-신성 주문의 삼 요소?
‘그래. 기원, 기도, 기적.’
바라건데, 나의 영과 육을 충만케 하시고, 나의 반석이 되어주소서. 페르난데스는 역겨움 속에서 조용히, 기도문을 읊었다. 따지고 보자면 마법 주문을 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제물을 대신할 성자의 피 한 방울.
-촤아악.
페르난데스는 왼손에 쥔 단검으로 오른팔을 그었다. 첼리니의 마력에 의해 아작이 난 오른팔은, 그 덕이 오히려 다행히도 아무런 통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핏물이 단검의 혈조를 따라 흐르며, 검은 빗물과 섞였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거칠게 맥박치며 디모니카의 혈액을 전신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기도에 대한 반응이다. 페르난데스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머리를 애써 털어내며 냉정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종교적 고양감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너의 개가 아니다. 베이타서스.’
-치이이익···!
검은 빗물이 성자의 피와 섞이며 매섭게 증발했다. 뭄토의 마력에 영향을 받은 모든 것들이 그의 혈액과, 그의 영성을 중심으로 천천히 깨어져 나갔다.
-끼이이익!!!
-그래, 그래! 저 자야.
-주인님께서, 너를 기억한다. 기사.
-주인님께선 네게 관심이 아주, 아주 많으시지···.
-네가 저지른 무례를!
페르난데스는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망령들의 신음과 비명, 저주와 한탄을 무시하며 질주했다. 어차피, 격이 충분하지 않은 망령은 그에게 접근할 수 없다. 성하대로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죽음의 대지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 부서지고 있었다.
“···살려 주십시오···.”
“구원을···. 구원을···.”
“너무 추워···. 신이시여. 샤일드시여. 빛을 주소서···.”
도시 전역에서 숨막힌 신음이 들렸다. 뭄토의 시선 아래에서, 필멸자들은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치며 허물어져 있었다. 희망이 빗물에 녹아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페르난데스는 당장 그의 시야 안에서 그런 자들을 수십 명씩 쉽사리 발견할 수 있었다.
-저들을 모두 구할 수는 없다. 페르난데스. 그리고, 지금 멈추면 오히려 구할 수 있는 이들도 모두 포기하는 격이야.
‘그래.’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구원자가 아니다. 우린 우리 자신도 구하지 못했어.
‘맞아.’
페르난데스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바다가 갈라지듯, 비단이 찢어지듯. 그가 흘리는 피를 따라, 그의 뜀박질을 따라. 죽음의 땅이 반으로 나뉘고 있었다. 성하대로에서 왕성의 입구로 향하는 기나긴 길을 중심으로.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내려앉는 달빛을 따라 뛰었다. 현대 마학에 따르면, 달은 태양의 거울이며—
태양은, 만신전의 광명신. 샤일드의 상징이다.
‘샤일드가 가호하는군.’
정수리까지 차오르던 열정이 식어가며 출혈과 부상으로 누적된 피로가 그의 발을 얽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매번 새로운 힘이 그를 이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도 그는 멈춘 적이 없었다.
샤일드의 빛이 왕성의 입구에 멈춰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어가며, 검은 구름에 휩싸여 있는 왕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로, 추위와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이들에게 있어서, 지금 이 도시의 유일한 빛과 다름 없었다. 그의 주위로 더 이상 망령이, 그리고 검은 빗물과 끔찍한 죽음의 기운이 다가오지 못했다.
“기사님···. 저희를 구원하소서···.”
“기사님···.”
-페르난데스.
페이자쉬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옷깃이라도 붙잡으려 애쓰는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얽힌 짙은 공포가 느껴졌다.
연민은 종교인의 자세다. 하지만 나는 베이타서스의 개가, 만신전의 번견이 아니야. 페르난데스는 피로에 찌든 눈을 애써 감았다. 한 발자국 더. 저 그림자 안으로 들어서며.
“아아···. 기사님.”
“기사님.”
-무시해라. 우리는 저들의 슬픔을 나눠 마시기엔 이미 충분히 많은 눈물을 빚지고 있어.
‘페이자쉬. 만약에.’
페르난데스는 한 발자국 더 내딛고, 잠시 멈춰 섰다. 그는 거대한 먹구름에 점차 살라 먹혀, 희미하게 사그라드는 달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만약, 기사왕이었다면 어땠을까?”
-헛소리 하지 마. 우린 연극을 하기 위해 이 판을 기획했어.
“알아. 페이자쉬. 알고 있어. 우리는 영웅이나 왕이 될 수는 없지.”
-찰팍.
성하대로의 바닥은 검은 빗물에 젖어 진창이 되어 있었다. 늪처럼, 진흙이 구름에 휩싸여 일렁거렸다. 저 먼 늪 속으로, 한 발 더 깊게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키이이이잉···.
비전 시야가 날뛰었다. 그의 눈 앞에, 왕성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이 검은 구름의 중심부가 보였다. 암녹색 마력이 왕성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저걸 뚫기 위해선 어차피 나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저벅.
그 마력의 중심지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격이 떨어지는 망령들이 그 사람의 주위를 맴돌며 연신 검은 안개를 뿜어대고 있었다. 큰 키와 장대한 체구, 그리고 비명 지르는 얼굴들이 전신에 돋아난 검은 갑주의 기사.
그의 몸에 휘몰아치는 네크로폴리스의 마력 사이로, 기사의 진짜 얼굴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바이에미어 경···.”
-죽음의 대지에 사로잡혔군. 원탁 기사.
바이에미어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순간보다 훨씬 어려진 얼굴이었지만, 그 창백한 얼굴과 검게 물든 눈동자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데스는 기사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스르릉.
[와라, 반역자.]
바이에미어는 광기에 짓눌린 신음을 흘리며 장검을 뽑아 그에게 뻗었다. 그는 피 끓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왕가의··· 명예를!]
“네크로폴리스 콘클라베의 작품이군. 광란의 파프테트. 네놈의 짓이구나.”
페르난데스는 바이에미어의 눈동자 너머에서 웃고 있는 망령의 존재를 느끼며 속삭였다. 비전 시야가 놈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전생에 만난 적 있던 놈이다.
네크로폴리스 콘클라베의 일원, 파프테트. 폐광촌의 배후가 바로 저 놈이었군.
놈은 저 멀리, 왕궁 안에서 그를 내려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바이에미어를 향해 한 발자국 더 걸어가며 말했다.
“거기서 기다려라, 파프테트.”
[네가 뭘 할 수 있지?]
비전 시야를 통해, 놈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페르난데스는 바이에미어의 떨리는 손과, 울부짖는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한 발 더 걸었다. 그는 단검을 꽉 틀어 쥐었다.
“재판.”
바이에미어는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뛰어들었다. 엄청난 속도와 무게감!
-콰지지직!!
바이에미어의 검이 공중에서 멈췄다. 페르난데스의 단검이 그의 검을 막아내고, 크로스가드를 틀어 막고 있었다. 대단한 힘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팔에 전해지는 압박감을 애써 털어냈다.
-투우웅!
바이에미어는 곧장 어깨로 그를 밀어냈다. 페르난데스의 가슴을 치고, 충격이 퍼져 나갔다. 바이에미어의 검이 자석처럼 그의 목을 향해 날아 들었다.
-채애앵!
칼과 칼이 얽히며 거친 불똥이 튀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짧은 틈 사이로 울부짖는 바이에미어의 얼굴이 보였다. 혼란, 광기, 분노, 증오. 수많은 감정이 그의 얼굴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챙! 챙! 챙!
페르난데스는 바이에미어의 검을 막아내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장검과 단검의 길이에서 나오는 힘의 차이는 쉽사리 무시할 수 없었다. 광기로 인해 바이에미어의 검술이 둔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녹록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카드드득!
페르난데스는 걸음을 멈추고 힘껏 바닥을 디뎠다. 진창에 빠진 그의 신발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뒤로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달빛을 쫓아 몰려온 시민들이 그의 바로 뒤에 있었다.
-콰지지직!
그의 단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이에미어의 검에 달빛이 내려앉으며 시리게 빛났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휘둘러 치는 그의 장검을 바라보았다.
피하면, 또는 물러서면. 페르난데스는 짧은 순간 검의 궤도에서 덜덜 떨고 있는 시민을 바라보았다. 무의식적인 순간이었다. 그의 상처 입은 오른팔이 바이에미어의 검을 가로막았다.
-촤아아악!
장검이 그의 팔을 치고, 순간 엄청난 고통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잘려 나가는 팔과, 흐르는 듯 움직이는 장검이 멈춘 듯 천천히 보였다. 달빛이 짧은 순간 구름을 뚫고 내려와, 그의 머리맡을 밝혔다.
“···신이시여···.”
그의 귓가에 겁에 질린 시민들이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달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비산하며, 희미한 헤일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만신전이 봉문한 뒤 삼십 년이 지나고, 더 이상 문명 사회에 기적이 내려오지 않는 시대에. 알트베르트의 시민들은 검은 기사와 맞서 싸우는 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 입은 몸으로, 단검 한 자루를 쥔 채. 어떤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젊은 기사의 모습에, 시민들은 하나 둘 빛과 구원을 찾아 모여들었다.
짧은, 그러나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젊은 기사의 단검이 부러져 나갈 때. 검은 기사의 검이 빗겨나며 시민들을 향해 떨어졌다.
-촤아아악.
그 순간, 젊은 기사는 자신의 오른팔을 뻗어 기사의 검을 받아내었다. 피가 사방에 비산하고, 검은 기사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은 청년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새하얀 헤일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이시여···.”
주위를 감싸고 있던 죽음의 기운이 휘청거리듯 허물어졌다. 장막이 밀려 거둬지며 왕성의 입구를 가리고 있던 검은 구름이 흩어졌다. 한 팔을 잃은 청년은, 멈춰 선 검은 기사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
-멍청한 것.
페르난데스의 귓가에 페이자쉬의 호통이 들렸다. 고통과 출혈로 멍해진 귓가에도,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부서져가는 단검을 틀어쥐고 한 발씩 바이에미어를 향해 걸어갔다.
바이에미어는 충격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서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런 그의 목젖 위에 천천히 단검을 들이 밀었다.
[페르난데스···. 끝내게···.]
“편히 잠드시오. 알트하이스의 바이에미어.”
[샤일드의 가호가 함께하길.]
-푸욱.
-콰지지지직!!
바이에미어의 목소리에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목 깊숙히 단검을 박아 넣었다. 그와 동시에, 왕성의 성벽을 감싸고 있던 죽음의 마력이 산산이 끊어졌다.
그 안으로. 페르난데스는 피를 흘리며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