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69화 (70/388)

< 69. 왕은 이제 그 위로 오롯이 서서, 태양 앞으로 가매. (1) (여기부터 유료 회차입니다!) >

*

떨어지는 빗물이 한 방울씩 인식될 정도로 고양된 정신,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무너져가는 육신. 페르난데스는 한 팔을 움직여 사슬을 당겼다. 느슨하게 늘어졌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마력을 흘렸다.

-촤아아악.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빗물이 그쳤다. 눈을 돌리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아벨레사스가 날개를 펼쳐 하늘을 막아주고 있었다. 빗물 뿐만 아니라, 그를 감시하는 뭄토의 시선조차.

이 공간 아래에서, 뭄토는 더 이상 개입할 수 없었다. 먼 옛날, 천상전쟁 당시에 활동하던 고대 신. 멜르실두르의 신성을 이어 받은 아벨레사스는 그녀 자체로 반신의 격에 달했다.

봉인된 뭄토로서는 지금 당장 그들에게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달빛을 가로막은 아벨레사스의 거체 탓에, 어전이 어둠 속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네크로폴리스의 망령에겐, 그리고 페르난데스에겐 시야가 필요하지 않았다.

-콰드드득.

네크로폴리스와 용의 마력이 어전 안에서 휘몰아쳤다. 마력의 흐름이 일구어낸 바람이 어전의 석주와 벽화를 긁어내고 있었다. 덧칠하듯이. 과거의 흔적 위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듯.

‘아벨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리 길지는 않을 거다.

‘빠르게 끝내자.’

마학자들에게 내려오는 오랜 속담이 있다. 어떤 힘도 전능할 수 없다. 전능은 일종의 이상, 일종의 환상에 가깝다. 신에게도, 악마에게도.

천오백 년 전에 죽은 용을 온전히 부활시키는 것. 마찬가지로, 천오백 년 전에 죽은 신을 온전히 부활시키는 것. 천 번 겹친 기적이 다시 천 번 겹쳐진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아벨을 지금 살려 움직이는 것은 단지 멜리실두르가 남긴 희미한 자취에 불과했다. 소모되는, 제한 있는. 페르난데스는 아벨에게 결코 용으로 변하지 말라 권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안위를 포기한 것은 데인 왕국과 매장 교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페르난데스는 이어진 지배의 사슬에서 그녀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후회하나?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해. 그 이상은 시간 낭비지.’

나의 후회는 내가 눈을 감던 순간에 두고 왔다.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되뇌이며 한 발자국 걸었다. 촤르륵, 사슬이 그를 따라 이끌렸다. 망령의 시선이 느껴졌다.

수인도 짚지 못하는 한 팔로,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노왕의 비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타다닷.

한쪽 팔이 없는 채로 달리는 것은 기묘하게 어긋나는 균형감을 일으켰다. 페르난데스는 사슬을 끌고 곧장 알현실의 앞으로 내달렸다.

-콰지직!

암녹색 번갯불이 튕겨져 그의 몸을 강타했다. 오른 다리의 신경계가 손상되고, 근육이 오므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아벨의 마력을 사용할 때가 되지 않았다.

-콰지지직!

한 발자국 더. 이제 거의 발을 끌듯이. 그의 가슴을 지지며 붉은 창이 파고들었다. 심장을 세 치 빗겨 나갔다.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뼛조각이 폐를 찌르며 호흡이 턱까지 올라왔다.

-두근. 두근. 두근.

위기를 감지한 디모니카의 심장이 그 어느 순간보다 크게 뛰었다. 혈류가 미친듯이 널뛰기하며 동맥이 터질 듯 부풀어, 머리가 뜨거웠다. 고통을 억제하기 위해 엔도르핀이 터져 몸이 공중에 뜨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 발 더.

어전의 금지를 넘어, 왕의 곁으로.

-콰지지직.

그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놈의 마력과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젠 둘 모두의 제어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저 날뛸 뿐인 폭주. 페르난데스는 비전 시야가 마력을 폭주를 더 이상 읽지 못하고 과부하 하는 것을 느꼈다.

-콰지지직!!

마력이 어전의 벽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점점 더 상흔이 많아지고, 어전의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데인 왕의 서사시가 떨어져 나갔다. 늪의 괴물. 언데드 군대. 매장 교단. 찬양하는 기사들. 샤일드의 가호. 이제, 평원을 나는 용.

[죽어, 죽어! 쓰러져라! 이제 쓰러지란 말이다!!]

놈의 발악이 멀리서 들렸다. 물리적 거리감이 아니라, 정신적 거리감으로. 점점 혈액에 전달되는 산소의 농도가 말라가며 아찔하게 코끝에 혈향이 터져 나왔다.

“후우우···.”

폭주하는 마력과 한 손으로. 수인조차 짚지 못하는 상황에서. 페르난데스는 점점 더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갔다. 왕은 뒤로 물러서다가, 왕좌에 걸려 넘어졌다. 그는 주춤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수인을 짚었다.

[너는 괴물이야!!]

“익숙한 말이군.”

전생에서 그에게 괴물이라 매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페르난데스는 추억에 젖어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그 대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죽은 피와 내장 조각이 섞인 마른 기침 뿐이었다.

-우드드득!

배꼽 위로 검이 박히고 뒤틀렸다. 노왕은 마법을 준비할 정신도 없이 그저 손에 잡히는 것을 휘두를 뿐이었다. 페르난데스에겐 이를 인지하고도 피할 체력과 시간이 없었다. 그의 배에 깊숙하게, 의장용 대검이 틀어 박혔다.

살이 갈리며 대검의 혈조를 따라 핏물이 터져 나갔다. 페르난데스는 떨리는 손으로 대검을 쥐었다. 노왕의 비틀린 웃음이 보였다.

[해냈다. 해냈어! 흐하하하하! 죽어라 이 괴물아!!]

“기도해라. 파프테트.”

[뭐?]

대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 샤일드의 가호가 남아 있었다. 아직 그에겐 불태울 생명력이 남아 있었다. 남은 생명을 모조리 불태울 기세로, 그 대가로 타오르는 힘으로. 그는 노왕의 손을 바싹 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페르난데스는 노왕의 손을 놓고, 놈의 이마를 붙잡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부상을 입은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도록. 강한 악력이 그의 머리를 쥐었다.

지옥의 대악마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천상의 신이 선고하는 말투로. 페르난데스가 노왕의 눈을 노려보았다. 놈의 검은 눈, 그 심연 속에서 떨고 있는 망령에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무 신에게나, 어떤 말이든. 간절히.”

[···넌. 너, 너는 여기서 죽어! 나, 나는 가겠다. 나의 승리야!! 나는 불멸이다!]

노왕의 눈에서 점차 심연이 걷혔다. 왕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망령이 겁에 질려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부서지기 직전의 비전 시야가 마지막으로 망령의 영체를 감지했다.

-콰드드득!

파프테트의 영체가 마력이 휘몰아치는 어전의 위로 떠올랐다. 놈은 어전 한 가운데에 있는 도약 주문으로 가고 있었다. 생체는 지나갈 수 없는 공간 도약 주문. 놈은 영체였고, 저 통로를 통해 어딘가에 숨어든다면 승기는 놈에게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마력 속에서, 놈의 비릿한 웃음이 보였다. 놈의 눈에서 공포가 빠르게 걷히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식어가는 몸을 느끼며 외쳤다.

“아벨, 다신 용으로 변하지 마시오.”

[아니 된다. 아니 된다!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게냐!]

멍하니 페르난데스를 바라보고 있던 아벨이 황급히 손을 뻗어 그를 움켜쥐려 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 아벨은 그의 몸이 입은 부상들을 훑어보며 당황해 외쳤다.

[이렇게 떠나지 말거라. 이렇게 떠나면 아니 된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성흔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녀 앞에서, 아니. 그 누구의 앞에서도 쉽게 죽은 적이 없었으니.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눈에 얽히는 슬픔을, 사슬을 통해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을 느끼며 웃었다.

‘이번 생은 그래도 보람이 있군.’

적어도 시체가 되는 순간까지 증오와 비명을 듣지 않았으니. 전생보다 낫다. 페르난데스의 말에 페이자쉬가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할 일이나 해라.’ ‘그래, 그래야지.’

-콰드드득!!

사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벨의 팔이 순간 멈췄다. 지배의 술식이 끊어지며, 흩어지던 마력이 다시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석으로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사슬의 끝이 갈라지며 터져 나갔다. 검은 사슬의 파편이 가루가 되어 허공을 수놓았다. 마력이 흡수되며, 잠시 망령의 움직임이 더뎌지고—

-촤르르르륵!!!

페르난데스는 팔을 휘둘러, 허공에서 출렁이던 사슬을 휘둘렀다. 빠르게 증발하던 지배의 사슬이 공중을 치고, 그대로 나아가며. 망령의 목을 옥죄었다!

[커-흑!]

“일국의 국부를 참절한 죄. 일국의 왕조를 능멸한 죄. 사자로서 생자의 업에 개입한 죄. 괴력란신으로 백성을 홀리고, 감히 신의 권위를 탐한 죄!”

-촤르르르륵!!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망령의 목을 끌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망령이 재빨리 수인을 짚어 마법을 흩어 놓으려 했지만, 페르난데스의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망령의 몸이 바닥에 끌리며, 놈은 한 손으로 목에 얽힌 사슬을 잡아 늘리고, 다른 한 손으로 연신 수인을 짚었다. 다급한 손짓으로, 해주, 해주, 해주!

-촤르르륵!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지배의 사슬을 타고, 페르난데스의 마지막 마력이. 아벨에게 미처 가지 못했던 그 마지막 실낱 같은 마력이 망령의 마력 회로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눈을 감고서 바늘귀를 꿰어 맞추는 정밀함으로. 망령의 모든 주문을 파훼하며!

[이게 필멸자에게 주어질 수 있는 재주냐?!]

“피고의 죗값은 무기형이다.”

-촤르르륵!!

지배의 사슬이 완전히 놈의 목에 감겼다. 망령은 바닥을 긁으며 공포에 질려 소리질렀다. 죽어가는 페르난데스의 몸이 거대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존재로 비쳐 보였다.

불타오르는 대지를 배경 삼아, 칠흑의 그림자를 로브 삼아 덮고. 만마의 숭배를 한 몸에 받으며 수많은 영웅들의 시신을 장대에 내거는 대흑마법사의 모습이. 한 순간 망령의 텅 빈 눈 안으로 비쳤다.

-촤르르륵!!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놈의 죽음에 동반자로 영원히 소멸할 수는 없었다. 지배의 사슬이 그의 혼백, 영성을 관통하며 놈과 이어지고 있었다. 끔찍한 일체감 속에 망령이 울부짖었다.

[소멸 된다 하더라도, 네 놈에게 가장 끔찍한 죽음을 선사하겠다!!]

망령이 내달렸다. 영혼이 완전히 바스라지기 전에, 온 힘을 다해서! 사슬을 이끌며. 페르난데스의 몸이 힘을 잃고 허물어져 망령의 몸짓에 따라 끌려갔다. 망령은 공간 도약 주문 위로 뛰어 오르며 외쳤다.

[네 죽음은 어느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할 것이다. 너는 위대한 주인님의 영역 안에서 홀로 식어갈 것이다!! 나의 승리다!!]

샤일드의 가호로 더 이상 불태울 생명력이 남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몸에서 힘을 빼며 느긋하게 사슬에 끌려 갔다. 그의 생명력이 꺼져가며, 동시에 지배의 사슬이 얽은 망령의 몸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네크로폴리스의 콘클라베. 다섯 번째 기둥을 지키는 파프테트. 한 놈을 끝냈으니 네크로폴리스에 접근하기 한결 쉬워지겠군.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부서져가는 망령을 바라보았다. 놈은 이제 반쯤 공간 도약 주문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검은 구체의 어둠 속에서, 놈이 갈라진 얼굴로 비릿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촤르르륵!!

사슬이 끌려가며 페르난데스의 몸이 도약 주문의 구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라던 바야.’

페르난데스의 시야가 완전히 어둠에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공간 도약 주문의 입구가 닫혔다. 페르난데스는 이 극적인 연출에 피식 웃었다. 추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하강이라. 익숙한 일이다.

그는 공간이 뒤틀리고, 육신을 갈아내는 압박감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