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왕은 이제 그 위로 오롯이 서서, 태양 앞으로 가매 (2) >
*
달빛이 닿지 못하는 깊은 심연. 저 아래로 빨려 내려가며, 페르난데스는 으스러지고 있었다. 공간과 공간의 도약은 육신을 가진 생명체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공간이 비틀리고 뒤엉키며 그의 몸은 부서지고 있었다.
‘커흑!’
통각이 머리 속에서 날뛰었다. 이미 통각을 느낄 신경계가 불타고 찢어져 통각 자체는 환지통에 불과할 것이었지만. 그는 불안정한 영혼으로 울부짖었다.
-이제야 내 기분을 알겠나?
페이자쉬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때론 가까이서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심연 속을 낙하하며, 때론 부상하고 때론 부유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니까, 성대가 있었다면 그랬겠으나.
‘끄으으윽!!’
육신 없는 영혼은 불완전하다. 육체의 생혈과 생육이 비로소 영혼의 중심을 잡아주기에, 육신은 영혼의 닻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을 여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너는 네 임무가 온전히 마무리될 때 까지 결코 쓰러지지도, 몸을 누이지도, 안식을 찾지도 못하리라. 이것이 네게 부여하는 나의 첫번째 권능이오.]
멀리서, 베이타서스의 빌어먹을 목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영혼이 으스러지는 압박감을 받으며 수육되고 파괴되길 반복하는 육신 안에서 신음했다. 불사의 권능이 곤죽이 된 그의 육신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아들아. 아들아. 아들아···.’
페르난데스는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말을 하며 이성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불타오르는 고통 탓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 말을 멈추면, 편안한 광기에 이성을 의탁하면, 그의 노력은 헛수고가 된다.
‘내 아들아. 너와 나는 육십 년을 등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렇지만.’
죽어가던 아들의 눈이 떠올랐다. 수십 번을, 자신의 몸이 살덩이와 뼛가루가 될 때까지 스스로의 몸을 파괴하던 아들의 광기에 젖은 눈을.
‘나는 이제야 너와 같은 고통을 느끼는구나. 이것은 나의 업이로다.’
꺾인 손가락이 그의 심장 안에서 자라났다. 척추가 발 아래에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럼에도, 뇌가 곤죽이 되어 언어 중추가 꼬이고, 환각 같은 쾌감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며.
다시 살아나고, 다시 죽어갔다. 죽을 때 마다 베이타서스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네 임무가 온전히 마무리될 때 까지 결코 쓰러지지도, 몸을 누이지도, 안식을 찾지도 못하리라.]
‘네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내 목적이 달성될 때 까진 결코 누워 쉬지도, 안식을 갈구하지도 않겠다.’
페르난데스는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의 고함은 그의 심장 안에서 메아리쳤다.
[너는 네 임무가 온전히 마무리될 때 까지 결코···.]
‘결코 나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죽지 않아. 나는 이렇게 죽지 않아.’
[너는 네 임무가···.]
‘나는 너의 개가 아니다!’
이제 페르난데스는 더 이상 편안함을 찾기 위해 아들을 부르지 않았다. 그에게 아들은 편안함과 안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갈망, 소망, 희망. 뜨거운 불과 고통스러운 상처의 이름이었다. 아들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그에게 피를 울컥거리는, 영원히 딱지 얹지 않는 흉터로 남아 있으니.
본디 시간을 떠나, 먼 길을 표류하는 표류자들이다. 아벨이 그리 말했다. 그 현명한 용의 말은, 슬프게도 그녀 자신에게만 해당했다. 그는 표류자가 아니었다. 그는 표류한 적이 없었다.
그의 해도(海圖)는 언제나 북극성을 향해 길을 그렸다. 그의 나침반은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등대가 있다 했지. 그러나 페르난데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너의 개가 아니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감각이란 것은 이 공간에선 의미가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이를 갈며 끝없이 되뇌었다.
‘나는 운명의 개가 아니야.’
그는 그의 삼촌을 죽이며 운명이 과거와 같지 않음은 이미 증명한 바가 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그보다 쉬울 것이다.
*
아벨은 페르난데스를 삼키고 마력의 중심을 잃어 사라진 마법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혼란과 슬픔에 잠겨 있었다.
[떠나 가는구나···.]
그녀의 진신(眞身), 용의 모습은 그녀의 영혼을 빠르게 갉아먹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을 지지하는 부서진 신의 파편은 그녀의 본신을 감당할 정도로 강인하지 않았다.
[멜리실두르,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는 편이 나을 것 같구나.]
아벨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허물어지듯 주저 앉았다. 그녀의 몸이 점차 작아졌다. 검붉은 비늘이 한 장씩 흩어지고, 용의 몸을 지지하던 거대한 근육과 기둥 같은 뼈대가 사라졌다.
해질녘 밀밭 같은 황금색 머리칼이 빗물에 젖어 내려앉고, 희망을 노래하던 푸른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시들었다. 아벨은 인간의 모습으로 엎드려 흐느꼈다.
“너의 말대로, 페르난데스. 내 다신 용의 모습을 취하지 않겠다. 네 말을 들으마. 그러니. 그러니 제발.”
그녀는 목을 더듬었다. 목걸이가 없었다. 허전한 목덜미가 심장을 찢는 듯했다. 죽음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찬란했던 영웅들의 업적을 기리겠다고.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애가(哀歌)를 부를 수 없었다.
-펄럭.
“···키르하스.”
“비가 차가워요. 아벨.”
어느새 다가온 키르하스가 그녀에게 망토를 둘러 감쌌다. 빗물에 푹 젖은 망토가 그녀의 몸에 달라붙었다. 키르하스는 아벨의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이가 떠났다.”
“아니에요.”
“···?”
아벨은 젖은 눈으로 키르하스를 올려 보았다. 키르하스의 몸은 땀과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먼 길을 뛰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그녀의 주군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마주한 것은 페르난데스의 혈흔이 가득한 어전의 풍경 뿐이었지만. 그러나 그녀의 청록색 눈은 의지와 희망에 불타고 있었다.
실제로, 키르하스에겐 아직 빛이 보였다. 새벽 하늘의 짙푸른 빛이. 그 빛을 뿜어내는 길이. 희미하게 깜빡이지만, 올곧게 이어져 있는.
그녀의 주군을 향해 이어진 그녀 만의 길이. 망상이라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 키르하스는 아벨의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은공께선 살아 계십니다.”
“···키르하스.”
“슬픔에 매몰되지 마십시오. 언제나 우리의 발 밑의 들꽃을 살피며 나아가듯이.”
키르하스는 품 속에서 마르고 시든, 작은 꽃망울을 따서 아벨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벨은 신음하며 그녀의 손에서 꽃을 받아 들었다.
“미안하오만, 알베트르 경이 살아있든, 그가 정말 죽었든. 지금 우리에게 남은 일이 하나 더 있소.”
비센테 왕자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비센테 왕자는 용의 부활과 방금 전의 일전에서 받은 충격에서 아직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비록 놀랍도록 아름답긴 했지만, 어쨌건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아벨에게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아벨의 푸른 눈을 마주보고, 비센테 왕자는 어린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거인이 우리의 도시를 파괴하고 있소. 매장 교단의 준동은 끝나지 않았소.”
비센테는 다음 말을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에도 거인이 점차 몸을 일으키며 도시에 파괴를 불러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엔 연약하게 흐느끼고 있는 아낙의 모습이. 그리고 죽어 쓰러진 용을 위해 애도하는 데인 왕의 벽화가 보였다.
“한번 더, 우리를 위해 나서줄 수 있소?”
“···아아. 그래. 너희 어린 인간들은 언제나 내 도움을 필요로 했지.”
아벨은 푸른 눈을 빛내며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키르하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키르하스. 그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겠느냐?”
“···네. 보입니다.”
“너는 그이를 보좌 하거라. 그이는 네 도움을 필요로 할거야.”
“당신은···?”
“다인의 아이들은 나의 자식들이나 다름 없다. 언제나 그랬지. 연약한 인간들. 나의 도움이 필요했어. 나는 이 아이들의 도움을 차마 거절할 수 없구나.”
인간들의 수호룡. 기사왕의 어미이자 스승. 최후의 순간까지 인간의 도시를 지키기 위해 몸과 숨을 불살랐던 그녀는, 결코 도움을 청하는 인간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페르난데스의 위치를 찾아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다인의 나라가, 그의 도시가. 용이 날던 평원과 언덕이 이렇게 허물어지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너를 믿겠다. 키르하스. 반드시 그이를 살려서, 다시 데려 오거라.”
“네. 아벨. 반드시 그럴게요.”
키르하스의 올곧은 청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벨은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저 어린 아이에게서 희망을 볼 줄이야. 아벨은 잠시 고개를 저었다.
“아이야. 칼을 다오. 내 비록 그이와의 약조가 있으나, 최선을 다해 보겠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일분? 한 시간? 십 년? 어쩌면 백 년이 지났을 수도 있다. 도약 주문은 진입과 사출 시점의 시간과 공간 좌표를 정하지만, 그 통로의 정체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으니까.
-철퍼덕.
페르난데스는 바닥에 떨어진 이후에도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몸은 이미 육체 조각의 무더기에 불과했다. 인간적인 감각을 느끼기엔 이미 인간에서 너무 벗어나 있었다.
-후우우웅···.
하지만, 바람이 불었다. 세계가 정지해 있었다. 어쩌면 그의 육신이 정지했을 지도 모른다. 페르난데스는 역겨운 혼란을 느끼며 천천히 생각했다. 그의 귓가에 멀리서, 페이자쉬의 목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놈. 여기가 네 종막이냐?
‘아니.’
무엇의 끝인지 알지 못했지만, 페르난데스는 짧게 대꾸했다. 어떤 종류의 끝이든, 목적 전에 결말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쿵, 쿵, 쿵.
그의 육신 어딘가에서 천천히 심장이 형체를 만들어가며 맥동했다. 살이 모이고, 뼈가 뒤틀리며 자리를 되찾아가—
-우드득.
팔이 뒤로 꺾이며 손가락들이 하나씩 형상을 찾아간다. 부서진 퍼즐을 조립하듯이. 한 조각씩. 한 조각씩. 천천히.
-두근, 두근, 두근.
디모니카의 혈액이 되살아나 전신에 혈류를 뿜어내고, 육신의 형상이 온전해지기 시작했다. 굵은 힘줄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허리를 감싸고, 팔을 타고 올랐다.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자신의 몸 어딘가에 꽂혀 있는 대검을 더듬거렸다. 육신의 회복에 이것은 불순물이다.
-스르릉.
대검을 뽑아내어, 그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짚었다. 대검의 날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기둥처럼 대검에 지지하고, 천천히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검은 머리칼이 내려와 그의 얼굴을 가렸다. 심장이 다시 거칠게 맥박 치기 시작했다. 불사의 성흔은 단지 죽음을 회피하게 해줄 뿐이었다. 그러나 영혼이 육신의 영향을 받듯, 당연하게도 육신 또한 영혼의 영향을 받는다.
육신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형태로, 천천히. 온전히.
-정신이 드느냐? 정신이 붕괴했느냐?
‘아니.’
검은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이 빛났다. 차갑게 벼려진 세인트메탈 장검처럼. 피로에 찌든 눈이 어둠을 불사르며 타올랐다.
[내게 네게 임하였으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너는 나와 만신전의 대리인이 되었노라. 너는 결코 무너지지도, 타협하지도, 안주하지도 않으리라. 이것이 내가 네게 부여하는 나의 두 번째 권능이다.]
베이타서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등허리에 박힌 성흔이 새하얗게 타올랐다. [불굴의 성흔]. 어떤 경우에도 그의 영과 성, 혼과 백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베이타서스의 축복 때문만은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이를 깨물어 촉감을 확인했다. 손가락도 멀쩡히 붙어 있었다. 디모니카의 축복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육신은 완전한 기능을 복구했다.
샤일드의 축복은 아쉽군. 달빛이 비추지 않는 심연인 탓인지. 아니면 한 몸에 두 신의 축복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실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불사의 축복 전에도, 그의 의지는 죽은 적이 없었다. 불굴의 축복 전에도, 그는 결코 멈춰 선 적이 없었다. 베이타서스의 축복은 그저 쓸모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는 결코 안주한 적이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우우웅···.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심연 속에서, 그는 거대한 공간감을 느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손가락을 튕겼다. 회로가 없어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부싯돌은 마법이 아니라 재주에 불과했다.
-타닥.
작은 불꽃이 눈 앞에 튀며, 짧은 순간 빛을 만들었다. 디모니카의 동체시력이 그 순간 주위를 훑어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본 적 있는 유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익숙한 구조의 유적이었다.
아벨의 무덤과 같은 모습이었다. 정위치에 있을 때, 흙더미에 매몰되지 않은 온전한 유적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벨레사스가 잠들어 있던 유적과 같은 모양의 유적이었다.
저 멀리, 데인 왕이 앉아 있는 거대한 옥좌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