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왕이여, 왕이여. (1) >
*
부싯돌의 잔상이 끝나고 시야가 차단되었다. 그러나 그 덕에 오히려 디모니카의 예리한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혼란에 휩싸였던 감각이 다시 정렬되며 잃어버렸던 청각, 촉각, 그리고 본능이 돌아오고 있었다.
-쏴아아아···.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복구되는 신경계에서 저릿한 통각을 느끼며, 빗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제법 큰 구멍이 지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공동에 불어 닥치는 바람은 그 탓이었던 것 같다.
“후우우···.”
눅눅한 빗물 사이로 젖은 피의 비린내가 작게 느껴졌다. 빗소리 사이에서 들리는 조그마한 속삭임과, 인기척들도. 마법인지, 기술인지 알 수 없었지만. 놈들은 기척을 극도로 죽이고 숨어 있었다.
-스르릉.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끌어 자세를 잡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몸의 균형감각이 엉망이었지만, 몸 풀기로는 적당할 것 같았다.
-쿠르르릉···.
저 멀리 지상에서부터 내려오는 진동이 공동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공간 도약을 하기 전에 보았던 거인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시간이 없었다.
‘청동 왕좌는?’
-글쎄 한 반나절 정도?
‘최대한 빨리 수리해 둬야지. 필요할 때 쓸 수가 없군.’
청각이 점점 예리해지며 빗소리 사이에 섞인 속삭임이 점점 더 날카롭게 들렸다. 그는 빗물이 쏟아지는 공동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몸을 때리며 점점 더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촤아악.
무언가가 그를 따라 빗물 안으로 들어섰다. 페르난데스는 이제 디모니카의 육신 성능을 거의 사랑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작은 소리들마저 하나하나 들리다니!
-하나 온다, 오른쪽. 목으로!
-채앵!
페이자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페르난데스는 오른쪽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칼날에 단검이 부딪쳐 튕겨나가는 감각이 있었다.
“큭!! 보, 보이나!?”
가래 낀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방금의 암습을 막아낸 것은 그의 본능과 디모니카의 청각이 만들어낸 일종의 기적과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말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빗방울이 대검의 날에 튕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페르난데스는 분노한 사자처럼 움직였다. 빗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튕겨나가는 소리가 하나 하나 들렸다.
시각이 차단되어 극도로 예리해진 청각, 촉각과 생존본능이 그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척수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촤악!
무언가가 검끝에 걸려 찢어져 나가는 촉감이 있었다. 제법 묵직한 감각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사납게 웃으며 칼을 휘둘렀다. 더 크게. 더 크게!
-촤아악!
“4호가 당했어! 맙소사. 괴물인가?”
“콘클라베가 어째서 저런 놈을 데려왔지?”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저거 인간 맞아?”
“부활하는 것 못 봤어? 키메라 같은데!”
“어느 학파에서 방해를 온 거야!!”
공동의 구성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들이 들렸다. 소리의 잔향으로 파악해 볼 때 많아야 다섯 명쯤. 한 놈이 죽고 난 뒤에 누군가가 더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숨을 고르며 칼을 늘어트렸다.
“주, 주문을 사용해!”
“사용하지 마! 죽고 싶어!! 여긴 화약고라고!”
영혼을 찌르는 듯한 불쾌한 감각은 마력의 잔향이었나. 페르난데스는 칼자루에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것의 안정감이 그리웠다. 온몸이 산산조각 났던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겠지만.
“제기랄. 제기랄. 시간을 벌어! 놈들을 던져 줘!”
“아직 주문이 완성되지 않았어. 그건 아직 그냥 잡졸 정도밖에 안 되잖아!”
“놈은 어차피 혼자야!”
아, 저 말이 또 나왔다. 페르난데스는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저렇게 말했던 놈들이 모두 그 혼자 온 놈들한테 찢겨 나갔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 자신 또한 한 신의 챔피언에게 저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날 그는 그의 모든 수하들을 잃고 본거지를 두고 도주했었다.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뒤의 일이지만.
‘다이란 쉬라이크가 지금 몇 살이지?’
-우리랑 나이가 비슷하지.
‘한번 보러 가야겠군. 그 녀석은.’
이번엔 적어도 그 빌어먹을 자식과 척질 일은 없겠군.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그 사이, 무언가 묵직한 발걸음이 그에게 다가오는 소리들이 들렸다.
‘셋? 아니, 다섯이군.’
-확실히 디모니카의 육신이 좋긴 해.
-절그럭.
골렘처럼, 무기질적으로 움직이던 놈들이 그를 중심으로 둘러싸는 것이 느껴졌다. 페르난데스는 대검의 반동을 느끼며 가장 가까이에서 다가오는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채앵!
‘막았어?!’
-죽음의 기사군. 이성은 없어도 낡은 영혼에 쌓인 본능은 있지. 서쪽, 위에서 아래로!
-채앵!
페이자쉬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검을 등 뒤로 넘겨 공격을 막았다. 대검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묵직했다. 검을 맞대는 순간에, 무언가 간질거리는 것이 그의 가슴 아래에서 느껴졌다. 기묘한 이질감이었다.
-콰드드득!
검을 억지로 비틀어 뽑아내자, 대검의 날이 갈려나가며 불똥이 튀었다. 짧은 순간, 페르난데스는 그의 머리를 향해 가로로 찔러 들어오는 녹슨 검을 보았다.
-촤아아악!
검이 빗물을 가르며 빈 공간을 치고 지나갔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아래로 구르며 놈들의 거리에서 벗어났다.
“저 움직임을 봐, 진짜 보이는 거 아니야?”
“쉿, 의식에 집중해! 이제 머지 않았어!”
놈들이 준비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전에 끝내야 했다. 비전 시야의 과부하 탓에 마력의 흐름이 감지되지 않았다. 순전히 디모니카의 육신, 그리고 핏줄을 타고 흐르는 신성의 감각에 의존해 마법의 자취를 느껴야 했다.
-채앵!
다시 빗소리를 뚫고 들어오는 검날을 튕겨냈다. 다행이 놈들은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공백이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치고 들어오는 칼을 튕기고, 뱀처럼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카드득!
잠시의 저항 끝에, 대검의 날이 놈의 갑옷을 짓이기며 바스라트리는 것을 느꼈다. 확실한 무게감이 있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몸을 틀어 다음 공격을 피했다.
-촤아악!
-두 놈 동시에 온다. 뒤로 피해!
‘아니, 기회야!’
[이건 힘으로 대응할 경우, 네 공세를 물리는 방법이다.]
아벨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과거, 아벨과의 대련에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몸동작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렇게 했던가?
-터엉!
페르난데스의 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놈들의 칼날을 크로스가드에 얽고, 그 모멘텀을 이용해 튕겨지듯 휘어졌다. 놈들은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탄력적인 코어가 반동을 이용해 감겨 들고, 페르난데스는 허리를 튕기며 대검을 크게 그었다!
-콰드드득!
갈랐다. 확실한 촉감이 있었다.
-쿠웅!
놈들의 몸이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급격한 뒤틀림으로 몸에 가해진 부담을 흘리며, 페르난데스는 잠시 멈춰 섰다.
-촤아아악!
-왼쪽!
황급히 머리를 틀었지만, 뺨에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엄청난 힘을 담은 찌르기! 페르난데스는 뇌를 강타하는 충격에 균형감각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몸을 굴렸다. 빗물에 몸이 미끄러졌다.
-위!
-콰드드득!
빗줄기를 가르는 소리에, 페르난데스는 몸을 튕겨 일어서며 검을 휘둘렀다. 공중에서 칼날이 얽히며 다시 잠시 불똥을 흘렸다. 두 놈, 한 놈은 공세의 충격에 추스르고 있고, 다음 놈의 공격이 이어진다. 곧!
-콰드득!
멈춰 있는 놈의 머리를 후려치고, 곧장 다음!
-챙!
정확한 타이밍에 칼날이 부딪치며 대검이 기분 좋게 감겨 들었다. 이건 통한다! 페르난데스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그는 칼날을 비틀어 공세를 흘리며 그대로 안으로 찔러 넣었다. 교본 그대로 구현된 듯한 강인한 찌르기!
-콰직!
다시 한 놈의 머리를 날리고, 다음! 그의 오른팔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혈관을 타고 신성을 품은 혈액이 미친듯이 뜀박질 쳤다. 극도로 고양된 감각이 그의 본능을 두들겨 깨우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다!”
-콰드드득!
비틀거리는 놈의 머리에 대검의 날이 틀어 박히며, 놈의 투구와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이 여실히 느껴졌다. 죽음의 기사는 대부분의, 물리 공격으로 인한 부상에 면역력이 있었지만—
워커와 구울, 그리고 대부분의 언데드 구조물이 그렇듯 놈들 또한 머리가 약점이다. 페르난데스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칼날을 바닥에 박아 넣고 잠시 멈췄다.
“원탁 기사 다섯 명을 혼자?!”
“아, 아무리 이성이 없어도. 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먼 옛날에 죽었던 원탁 기사들. 그들의 생전 능력을 최대한 모사할 수 있도록 유지하며 되살리는 공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롭던가. 데인 왕 시절에 매장 교단이 한 번 몰락하며, 사실상 대부분의 기술이 실전되었던 탓에 이 수준의 언데드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언덕 거인을 되살리는 것은 네크로폴리스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매장 교단의 자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임기응변이 모두 파훼 되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
-왜?
‘언덕 거인이 되살아 났잖아.’
-음?
페르난데스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하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하나 주워 들었다. 그의 팔이 꿈틀거리며 부풀었다.
‘폐광촌에서 그 레이스 몽크가 했던 말 기억해?’
-그 덜떨어진 놈. 그래.
‘놈의 목적은 언덕 거인의 부활이 아니었어.’
-콰득!
무언가가, 저 멀리에서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위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마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박혀 있던 것을 억지로 뜯어내는 듯한 소리가.
그의 본능이 미친듯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놈의 목적은 건국왕의 부활이었어.’
-건국왕의 시체를 죽음의 기사로 일으켜 세운다고, 이 나라를 집어 삼킬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건 은유···.
‘아니라면?’
-···.
‘은유가 아니라면?’
-콰드득!
페르난데스가 이 나라에 오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그러니까, 페이른 왕국과 데인 왕실의 전쟁을 막기로 마음 먹었을 때 착수한 계획은. 건국왕의 재림이라 불릴 만한 명성을 인위적으로 조작 하자는 것이었다.
일단 명성을 확보한 이후, 정교한 외교 공학을 이용해 사태를 정리하자는 것.
그 자체로 전쟁 억제력을 갖춘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를 꾸며 내자는, 다소 허황된 계획.
어떻게 할 것인가? 왕혈을 잇지 못한 입장에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다행히도, 건국왕의 전설은 뭇 영웅들의 전설이 그렇듯이 다시 돌아올 것을 예고하며 끝난다.
다시 죽음이 돌아오고, 전설 속 괴물들과 악마들, 그리고 끔찍한 난세가 도래했을 때.
사라진 왕이 돌아와 백성들을 구하리라는 희망적인 서사시.
-콰드득···.
-스르릉.
무엇인가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렸다. 곧 환호성이 공동을 메아리 쳤다.
“성공했어! 우, 우리 시대에 성공했어!”
“제기랄, 네크로폴리스 방향으로 절이라도 할까봐!”
“하하하, 첫 시험 기동은 저 놈으로 하면 적당하겠군. 운이 좋아.”
페르난데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검을 내던졌다. 애초에 투척술은 그에게 있어 가장 자신 있는 영역이었다. 강한 힘을 담은 장검이 깨끗한 궤적을 그리며 정확히 그가 예상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콰지직!!
어둠 속에서 일어난 존재가 장검을 튕겨내며, 작은 불똥이 튀었다. 부서진 옥좌, 그리고 그 주위에 늘어선, 로브를 뒤집어 쓴 노인들.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의 시체. 그 피로 그려진 복잡한 마법진.
-화르륵.
놈의 눈에서 푸른 귀화가 피어 올랐다. 리치에게서 보이는 특유의 안광. 놈에게 이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망령이 돌아다닌 것도, 언덕 거인이 부활한 것도. 전부 계획이었다면.’
-···되살아난 기사왕이 놈들을 물리친다면···.
“하하하, 죽여라. 가서 죽여!!”
천오백 년은 긴 세월이었다. 위대한 영웅의 혼백을 충분히 타락시킬 수 있을 정도로.
페르난데스는 침을 삼키며 크게 일어서는 안광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보다 머리 하나 정도의 신장 차이가 있었다. 살아 생전엔 대단한 거구였겠지.
놈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맙소사. 정말 기사왕이 재림했군.
‘아벨이 여기에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