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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73화 (74/388)

< 73. 편히 잠드소서. >

*

빗물이 춤춘다. 그저 수직으로 곧게 내려 꽂히던 빗방울들은 이 깊은 심연의 공동에서, 두 기사들의 움직임에 따라 흩어지고 있었다.

-촤아아악!

-챙!

페르난데스는 연속된 죽음으로 멍해진, 열 오른 머리를 빗물로 식히며 움직였다.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생존 본능이 없을까. 매 순간의 검격, 매 순간 합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맥동했다.

-쿵, 쿵, 쿵.

-챙!

크게 한바퀴 돌아 검을 후려치고, 다른 검이 그 검격을 막아 흘리며 위로 튕겨낸다. 누구의 검이 어떤 공방을 나누는지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 둘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카드드득!

무기의 차이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데인 왕의 검은 충격과 파괴에 대해 어떤 흔적도 없었지만, 페르난데스의 검은 의장용 대검. 그 내구성과 격에서 벌어진 차이가 그의 검을 파괴하고 있었다.

‘부서지겠군.’

페르난데스는 지금 그의 검이 빗방울을 가르고, 튕겨나간 빗방울들이 비산하는 모습 하나하나를 눈으로 쫓을 수 있을 정도로 고양되어 있었다. 그는 검날에 거미줄처럼 얽힌 실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친 격검은 무리였다. 하지만, 아직. 데인 왕의 눈에 내려 앉은 광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콰드드득!

페르난데스의 검이 데인 왕의 갑옷을 치고 지나갔다. 그의 갑옷은 이미 검격에 의한 상흔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페르난데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이제 방어를 도외시한 채 공격에 전념하고 있었다.

-푸욱!

페르난데스가 검을 회수하기도 전에, 데인 왕의 검이 페르난데스의 몸을 꿰뚫었다. 아홉 번째 죽음이다. 페르난데스는 오히려 차분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환시를 기다렸다.

데인 왕의 경험과 그의 업을.

*

언덕 거인을 죽이는 순간은, 승리와 정복의 쾌감보다 비통함이 앞섰다. 신의 사생아. 동족에게 사랑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존재에게, 그는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괴물과 악마에게 고향을 잃고, 황폐한 산촌과 타락한 도시를 전전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호수에서 용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삶 또한 동족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그에겐 어머니이자, 스승이며, 그의 지주였던 존재가 있었지만. 이 불우한 거인은 그렇지 못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서서, 그의 목덜미에 검을 박아 넣고. 거인이 내뿜는 마지막,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그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이 거인에게 죽은 우리의 동포, 나의 형제와 나의 가신들. 그 수많은 영혼들처럼. 이 거인 또한 편히 쉬기를. 네 업은 내가 잇겠다.

세상 모든 슬픔을 감내할 순 없어도, 홀로 되어 주저 앉는 이는 없게 하리라.

언덕의 기사 다인, 용의 언어로 그 이름은 연민이라. 그 날, 청년은 왕이 되었다.

*

페르난데스는 검을 휘두르며 데인 왕에게서 물러나 자세를 다잡았다. 두 기사의 시선이 교차했다. 서로의 경지를 견제하며. 데인 왕은 더 이상 쉽사리 공세를 펼치지 않았다.

존재의 격은 그 삶의 업적에 준한다. 페이자쉬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영혼을 나누며, 업 또한 섞이고 있다.

‘왕에게?’

-너에게도.

데인 왕은 아무 말 없이 검을 겨누곤, 가만히 서 있었다. 쏟아지는 빗물 아래에서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너는 벨라윈이 아니구나. 하긴, 벨라윈은 그날 죽었지.]

“정신이 드십니까?”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공했나? 왕의 이성을 되찾고, 그를 다시 무덤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었다.

[이 세계는 더 이상 짐의 세계가 아니구나.]

“···이 싸움은 의미가 없습니다. 폐하. 산 자에겐 산 자의 삶이 있는 법입니다. 이제 쉬소서.”

[젊은 기사. 나이든 마법사. 짐은 네 삶을 보았다.]

페르난데스가 데인 왕의 인생을 경험하듯이, 둘의 영혼이 섞이는 순간 데인 왕 또한 그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왕은 검을 치켜들었다. 공간을 갈아내는 상단, 데인 왕의 삭은, 낡은 망토가 빗방울 아래에서 떠올랐다.

정점에 도달한 검사에겐 마력이 깃든다. 페르난데스 또한 같은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빗방울의 소리가 더 커졌다.

-쿠르르릉.

저 멀리에서 거인이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더 집중한다면,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마저도. 페르난데스는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끼는 슬픔과 고통이 데인 왕의 감정인지, 자신의 감정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독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격을 나누며, 업을 이으며, 영혼을 섞으며. 페르난데스의 영혼 또한 변하고 있었다.

[너 또한 힘든 시절을 홀로 보내었구나. 젊은 기사. 네 삶을 부정하지 않겠다. 짐은 그저, 시험하고 싶구나.]

페르난데스의 눈이 뜨였다. 그의 머리칼이 조금씩 흔들리며 흩어졌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이 빛났다. 올곧게, 왕을 향해. ‘오십시오.’

데인 왕의 투구 아래엔 싸늘한 해골만 있겠지만. 어쩐지 망자의 새파란 안광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콰아아앙!!

두 기사의 검이 공간을 갈아내며, 부딪혔다.

사슬이 이어졌다.

*

죽은 기사들이 돌아와 그의 도시를 불태우고 있었다. 사자의 기사, 태양의 기사, 십자로의 기사. 그의 소중한 형제들이자 가신들. 위대한 원탁 의회의 기사들이.

다인 왕은 미처 죽지 않은 망자들에 대항해 검을 들었다. 수많은 피가 흘렀다. 전투 중에 전사한 병사들은 십 분이 되기 전에 다시 일어서 적이 되었다.

끝 없는 소모전이 이어졌다. 그들 모두가 지칠 때, 평원 위의 용이 떨어졌다. 가장 깊숙한 적진 한복판에서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용의 입김이 평원을 불태우고, 기사들의 검이 용의 비늘을 꿰뚫었다. 매장 교단의 핵심 인력들은 용의 분전 끝에 섬멸되었지만, 용 또한 멀쩡할 수 없었다.

죽음의 기사들이 협공한 끝에, 용은 죽음에 달하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기사왕은 마력을 잃고 사그라드는 망자들 사이를 질주하며 용에게 다가갔다.

용의 푸른 눈에서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리 떠나시면 아니 됩니다!!”

[후후, 내 아이. 걱정하지 말거라. 이 정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어머니.”

[아이야. 울지 말거라. 네 눈물은 네 동족을 향해야 마땅하니.]

용은 미소 지으며 기사왕의 머리칼을 흐트렸다. 어렸던 시절에 그녀가 곧잘 그랬던 것처럼.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루거라. 아들아. 네 사람들을 이끌고, 그들을 위해 울어라. 나는 네가 눈물이 많아, 그것이 참으로 기껍다.]

“어머니. 어머니!”

용의 감긴 눈은 그 뒤로 결코 뜨이지 않았다. 사흘, 기사왕은 비바람은 맞으며 용의 머리맡을 지켰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기사왕은 그제야 일어서 검을 들었다.

검의 날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다인, 용의 언어로 연민. 그는 검신에 삐뚤게 적힌 그의 이름을 쓰다듬었다.

“어머니, 동포의 죽음에 연민하라 하셨으나, 당신의 죽음엔 어찌 하오리까.”

*

-콰지지직!!

공간을 갈아내던 검의 끝이,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라졌다. 기술과 경험, 그 격이 부족했다. 페르난데스는 멍한 눈으로 부서져 나가는 그의 검을 바라보았다.

결국 한 발자국이 모자랐다.

-콰드득!

그때, 데인 왕의 검 또한 공중에서 잠시 멈췄다. 하늘에 금을 그어내 듯 떨어지던 검이 멎었다. 그 사이를, 페르난데스의 부서진 검이 파고들었다.

-콰직!

데인 왕의 갑옷이 산산조각나며 왼쪽 어깨부터 가슴까지 크게 베였다. 페르난데스는 데인 왕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채 혼란에 휩싸였다.

왕은 일부러 그의 공격을 맞았다. 페르난데스는 코 앞에서 이글거리는 데인 왕의 안광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훌륭한 검기로다. 젊은 기사. 네 이름을 말해다오.]

“세르너드의 페르난데스입니다. 폐하. 송구하나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하겠느냐? 좋다.]

-툭.

데인 왕이 검날을 돌려 페르난데스의 어깨를 검신으로 가볍게 쳤다.

[적을 앞에 두고 두려워 말라. 또한, 언제나 네 선을 행함에 용기를 가져라.]

-툭.

다시 한 번, 다른 어깨를 치고.

[매사에 항상 진실되게 임하며, 죽음 앞에서 초연하라.]

데인 왕이 팔을 높게 들어, 페르난데스의 머리를 살짝 치고 말했다.

[그리고 약자를 보호하라. 네 서원이 무엇이든, 그 길에 스러진 자들을 연민하라. 이것으로 너는 짐의 원탁 의회에 권한을 갖는다. 자, 원탁 기사 페르난데스. 이제 네 의무를 행하라.]

그렇게 말하고는 데인 왕은 검을 바닥에 꽂았다. 페르난데스가 그것을 바라보자, 데인 왕은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검을 쥐었다.

무거웠다. 디모니카의 힘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는 아니었지만, 이 검이 가진 업과 그 격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졌다.

[짐은 준비가 되었다. 산 자에겐 산 자의 삶이 있는 법이지.]

“기도하시겠습니까?”

[샤일드시여, 이 젊은 기사를 가호하소서.]

“폐하의 업은 제가 잇겠습니다. 편히 잠드소서.”

-서겅.

페르난데스는 검을 휘둘러, 데인 왕의 머리를 베었다. 투구가 거칠게 갈라지며 데인 왕의 눈에서 안광이 사그라들었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바닥에 검을 꽂고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위대한 왕이 이번만큼은 안식을 찾기를.

-쿠르르릉···.

저 멀리에서, 거인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진동이 공동을 뒤흔들고 있었다. 데인 왕이 죽으며, 그가 일으킨 망자의 불이 꺼져 공동엔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화르륵.

그의 등 뒤에서,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허리를 펴고 서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키르하스.”

“네, 은공.”

토치맨, 횃불을 들고 따르는 자들. 키르하스가 마법사들의 피로 물든 검을 한 손에 쥐곤 횃불로 페르난데스의 곁을 밝히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생이 많았구나.”

“은공께서도요.”

키르하스는 피로에 찌든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다인 왕의 망토를 주워 페르난데스에게 둘러주었다.

“밤이 차갑습니다. 은공.”

“디모니카는 추위에 병들지 않아. 키르하스.”

“제 마음은 은공의 추위에 병드니, 부디 가신의 심려를 헤아려 주세요.”

“고맙다.”

페르난데스는 기사왕의 망토를 쓰다듬었다. 세월에 삭고 낡았지만, 후손들의 관리와 보수로 여전히 망토는 따듯했다. 죽은 왕에게 바치는 후손의 경의가 느껴지는 모직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비를 맞으며 망토 아래에서 노숙했던 그의 생일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혼자였지만.

그는 키르하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르하스는 귀를 눕히곤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은 걱정이 가득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쿠르르릉.

점점 더 진동이 커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기사왕의 검을 등에 둘러 고정시키고는 무덤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이제 끝내러 가자. 여정이 길었어.”

“네, 은공.”

키르하스는 횃불을 들어 그의 주위를 밝히며 그를 따라 걸었다. 그들의 곁에 싸늘하게 식은 매장 교단 마법사들의 시체가 늘어서 있었다. 제법이다. 페르난데스는 그들 모두가 한 칼에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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