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장례 성사 >
*
그 날은 비가 내렸다. 축축하고 음산한 빗방울이 드래곤스파인 산맥을 가득 덮어, 인퀴지션 킵의 가장 높은 첨탑에서도 길고 곧게 이어진 산로가 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깨끗이 씻고 수도복을 둘러 입었다. 금식령에 따라 그날은 아침이 없었고, 또한 디모니카의 아침 운동도 없는 날이었다. 디모니카의 전당에도 고요함과 엄숙함이 감돌았다.
-끼이익.
묵주를 한 팔에 감고,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낡은 문을 열었다. 드래곤스팅의 봄은 차갑고 무거웠다. 봄비가 내리는 아침은 더욱이.
빗물이 침엽수림을 치며 맑고, 습하고, 묵직한 냄새가 났다. 디모니카의 후각이 이 요새 전체를 감도는 향로의 냄새를 읽어냈다. 그는 나무 창틀 너머로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수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묵주, 또는 향로를 든 채로 뜰을 향하고 있었다. 열쇠검 성소로.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결코 개방되지 않는 성소로.
아주 특수한 경우란 ‘유해가 발견된 이단심문관’의 복귀를 의미했다. 모든 이단심문관들은 세계의 가장 어둡고 위험한 곳을 자신의 전장으로 삼았고, 따라서 대부분의 이단심문관들은 그 유해를 되찾지 못했으니.
오늘은 금식령이 내려진 날이었다.
감정이 없어야 하는 이단심문관들에게, 감정이 허락되는 날.
죽은 형제를 위한 날.
오늘은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다.
*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비바람이 떨어지는 열쇠검 성소에서, 이단심문관들은 마치 바위가 된 것처럼 가만히 서서,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쇠검 성소의 단상엔 거대한 열쇠검 조각과, 그 조각을 중심으로 밝혀진 꺼지지 않는 작은 등들이 즐비해 있었다. 모든 등에는 로사리오가 걸려 있었다. 죽은 형제들의 이름을 새긴 로사리오들이.
열쇠검을 곧장 올려보는 바로 앞엔, 사람 하나 누울 크기의 화로가 있었다. 등유가 발려 있는 나무 장작들이 빗물 속에서 번들거렸다. 아마포로 곱게 감싼 시신 한 구가 그 위에 누워 있었다.
시신을 중심으로 기도문들이 빼곡히 적힌 양피지들이 늘어서 있다. 베오른은 그 앞에 서서,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악마를, 이단을, 마녀를 불태우리라.”
“베이타서스의 영광을.”
베오른의 말에 이단심문관들이 일제히 속삭였다.
“우리는 진창에 발을 딛고 서 있다. 형제들. 심연 속으로 몸을 묻고, 언제나 우리의 이상을 그리며 걷고 있다. 마침내 우리 모두에게 평화가 찾아오길 바라며, 가장 평화와 거리가 먼 곳을 기꺼이 방황하고 있다.”
“베이타서스의 영광을.”
베오른은 외눈 안경을 벗어 품에 갈무리했다. 그는 성유를 엄지 손가락 끝에 찍어 아마포에 감싸인 시체 위에 한 방울씩 떨어트리고, 이마와 뺨, 그리고 어깨를 찍었다.
“우리는 안식을 찾지 못하리라. 안식을 찾아 나가지 않으니. 우리의 갈 길은 피요, 살이요, 그리고 형제의 시체와 죽음으로 포장되어 있다. 우리는 다만 그 길에 끝이 있기를, 다만 그 길의 끝에 단 한 사람의 선인이라도 온전히 서 있기를. 주께서 역사하실 때 그 가장 가까운 곳에 우리의 명단이 오롯이 서 있기를 바랄 뿐이다.”
“베이타서스의 영광을.”
페르난데스는 다른 수도사들과 함께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폄하할 수도 없는 기도사였다. 그의 목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으니.
-정말 힘이 나는 말들만 골라 하는군.
페이자쉬가 빈정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그는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형제들의 시체를 반석 삼아 오른 이 길의 끝에 그의 목적이 오롯이 서 있기를.
“여기에 우리의 형제가 누워 있다. 형제들, 바라건데는 그를 위해 기도하지 말기를. 다만 축복하기를. 우리 모두의 미래를 대신해 눈을 감았으니. 부디 우리 또한 우리 형제들의 길이 될 수 있기를.”
“베이타서스의 영광을.”
베오른이 팔을 뻗었다. 그의 곁에 부복하고 있던 시종이 재빨리 횃불을 꺼내 들어 그에게 건넸다. 베오른은 횃불을 들고 화로 위에 섰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해를 감싸고 있는 기도문을 바라보았다.
“이단을, 마녀를, 악마를 불태우리라. 형제여, 우리의 묘비명은 언제나 같았다. ‘용기와 희생’. 타고 남은 잿가루는 한때 우리가 빛났음을 증명하기에.”
“베이타서스의 영광을.”
열쇠검의 거대한 크로스가드에 걸려 있는, 고대 게일어가 적힌 아마포가 펄럭였다. [펙투스], [인켄숨]. 용기, 그리고 희생.
“그러니 이제 재로 남아 편히 잠들거라. 형제여. 천국에도 우릴 위한 자리가 있겠지.”
“막토.”
“막토 수페를라우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추모사가 끝났다. 베오른은 이글거리는 횃불을 화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빗물에 젖은 나무가 검은 연기를 내며 타올랐다. 곧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베오른은 화로의 바로 옆에서, 불똥이 튀어 오르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어 앉았다. 짧은 추모가 끝난 후, 그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
베오른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피로한 어깨를 주물렀다. 차 한 모금이 그리웠다. 금식령 기간에 수도사들이 마실 수 있는 것은 물 한 잔 뿐이었지만.
그는 서류철을 뒤적이려 손을 뻗었다가,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책상을 톡, 톡 두드렸다. 흉터 가득한 그의 단단한 주먹이 살짝 떨렸다.
-똑똑.
“누군가?”
“수도원장님. 앙헬라 공입니다.”
“···아. 앙헬라. 들라 하시게.”
곧 문이 열렸다. 화려한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 물을 열고 들어섰다. 짙은 녹색 눈동자는 활기와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베오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성큼 걸어와 맞은편에 걸터 앉았다. 타이트하게 조여진 가죽옷 사이로 그녀의 몸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베오른은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긴 수도원일세, 앙헬라 공.”
“금연 구역이란 뜻입니까?”
“그게 부탁하는 태도인가?”
“부탁? 후후, 부탁이라.”
앙헬라는 길고 날렵한 다리를 천천히 꼬며 피식 웃었다. 담비털이 화려하게 장식된 숄을 한 번 쓸어 만지고는, 그녀는 몸을 가까이 끌어 베오른의 탁상을 짚었다.
“부탁보단 권고에 가깝죠. 정보 공유, 인적자원 공유. 뭐, 실드베인 수도원장. 피차 다 아는 바 아닙니까? 우린 서로 필요한 사이란 걸.”
“우린 세속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네. 오히려 세속이 우리의 도움을···.”
“그런 진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 있으실텐데.”
베오른은 인상을 찌푸렸다. 매를 닮은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꿈틀거렸다. 수십 년간 헤레티카로 복무하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그의 인상은 냉막하고 날카로우며 위압감 넘쳤지만, 앙헬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샤일드 교회에서 불만이 대단한 걸로 압니다. 당분간 데인 왕국에 베이타서스 교회가 직접 손을 뻗는 것은 외교적 부담을 안게 되겠죠. 하지만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하셨을 텐데.”
앙헬라는 피식 웃으며 품속에서 낡은 원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지고, 기이한 문양이 얽혀 있는 유물이었다. 베오른은 본능적으로 그 유물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마력의 향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수도원에 그런 타락한 물건을 반입하다니?”
“쓰기에 따라 타락은 유용한 도구죠. 실드베인 수도원장. 나무 말고, 숲을 보는 건 어떻습니까?”
“필요한 게 뭔가?”
“아 거래조건.”
앙헬라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의 웃음에선 만개한 장미와 같은 화려한 향기가 났다.
“네크로폴리스. 그 빌어먹을 전설 속 망령들의 소굴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지긋지긋한 부기맨들이 언제까지 침대 밑, 장롱 안에서 키득거리게 놔둘 수는 없죠.”
“이교도 토벌을 의뢰하는 건가?”
“본관의 이교도 토벌을 지원하라는 겁니다. 본관이 만든 밥상에 한 수저 얹게 해드리죠. 베오른 수도원장. 본 특무대가 발견한 것을 기꺼이 나눠 드리겠습니다.”
앙헬라는 테이블 위에 청동 원반을 올려 두고는 빙글빙글 돌렸다. 그녀는 매끄러운 손가락을 뻗어 원반의 한 귀퉁이를 조작했다.
-딸깍.
원반이 열리며 복잡한 태엽장치들이 나타났다. 장치들은 스스로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얇은 침 하나를 흔들었다. 침이 곧 한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앙헬라는 그 날카로운 첨단에 검지 손가락을 살짝 얹었다.
“네크로폴리스의 입구로 향하는 나침반입니다. 그 안엔···. 대악마가 잠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대악마. 후후, 그 어떤 시대에도 그런 놈을 토벌한 기록이 없건만. 우리 시대에 전설이 쓰이겠군요.”
“명예를 위해 움직이지 않을텐데?”
“키르자트 그 빌어먹을 개자식들과 제국이 치고 박고 싸우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자원?”
“그리고 그 핏물 낀 전장 지하에 빼곡히 박힌 것들은?”
“마력석이겠지.”
“그게 있는 장소는?”
“···.”
앙헬라는 키득거렸다. 그녀는 베오른의 등 뒤, 벽에 크게 걸려있는 거대한 지도를 손가락질했다.
“그 마력석들이 오밀조밀 모여서 제발 자길 써달라고 비명 지르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네크로폴리스 그 개자식들이 잠자고 있는 곳입니다. 베이타서스 교회? 명예와 명성? 이단 정화? 다 가져가요. 제국은 세속의 것을 취할 테니.”
“우리에게서 바라는 지원은?”
“그쪽 보물.”
앙헬라는 색기가 넘치는 녹색 눈을 부드럽게 굴렸다. 붉은 입술 한 켠을 살짝 물고는, 그녀는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신으로 네크로폴리스 콘클라베를 아작 냈다는 그쪽 그 위대한 성자 나으리. 베이타서스와 샤일드의 성자. 데인 왕의 지상 대리인. 뭐, 어디까지 진실이든. 본 특무대의 귀여운 신병이 그 녀석에게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더군요.”
“어디까지 알고 있지?”
“레바인테르 아이언사이드가 모르는 정보는, 이 세상에 아직 없는 정보 뿐이랍니다.”
앙헬라는 깔깔 웃었다.
*
-똑똑.
“페르난데스 형제. 들어오게.”
“귀신같이 맞추십니다.”
나무 문이 열리고, 페르난데스가 제피스의 개인실로 들어섰다. 여전히 소름 끼치는 풍경이었다. 삭막한 이단심문관의 방엔, 온갖 종류의 무구와 실험 도구들. 그리고 보고서와 참고 자료들이 즐비해 있었다.
“앉게.”
“여기 앉아도 안 무너지죠?”
“아마도.”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서류가 쌓인 의자를 정리하곤, 그 위에 앉았다. 낡은 나무 의자가 삐걱거렸다. 제피스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잠시 팔짱을 끼고 앉았다.
“형제, 내 개인적인 질문을 몇 가지 해도 되겠나?”
“···? 편하신대로.”
“자네는 세르너드 남작령이 불타오른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나?”
잠시 페르난데스는 침묵했다. 그는 조용히 제피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피스는 티 없이 깨끗하고 올곧은 눈을 하고 있었다.
곧 침묵을 깨고, 페르난데스가 입을 열었다.
“몇 명이 살 수 있습니까?”
“···뭐?”
“제게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제가 불타는 세르너드 남작령을 포기하고 다른 어딘가에 파견되었다는 가정을 의미하겠죠. 그럼 제 임무로 몇 명이 살 수 있습니까?”
“···허.”
제피스는 그의 말에 감탄했다. 몇 명이 산다라. 그 새에,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고향, 그리고 자신이 삼촌과 사촌을 모두 죽이며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그의 영지와, 전혀 연고 없는 누군가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두고 있었다.
제피스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차가운 계산이다. 차갑고 정밀한 계산.
“제가 영주 직을 맡고 있을 때 파악한 세르너드 남작령의 인구는 총 258명과 세례 받지 못한 아이 다섯이었습니다. 일 년 정도가 지났으니, 그 사이 인구 변동이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300명 어림으로 생각 되는군요.”
“···그리고?”
“제 영지가 불타는 광경을 그저 보기만 해야 한다면, 그 시간은 반드시 그보다 값지고 많은 일을 하는 데에 소모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대가로 저는 몇 명을 구하게 되겠습니까?”
“자네 나이가 어떻게 되나?”
제피스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피스는 천천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보고서를 펼쳤다. 페르난데스 또한 볼 수 있도록.
그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의 개인 기록물이었다. 몇 년도에 태어나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치밀하게 조사된.
“열일곱 살입니다.”
“정말인가?”
제피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 나이 또래가 보일 수 있는 전략적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제피스는 그 나이 때 이단의 머리에 모닝스타를 더 잘 박아 넣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천재? 그런 수식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 경험에서 비롯된 판단력과, 그런 판단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삶의 방식이 느껴졌다.
페르난데스는 곧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성자를 어떻게 의심하겠나.”
“성자 말고, 저를.”
“세르너드 남작의 행보는 다소···. 범상치 않긴 하지.”
“저는 어떻게 됩니까? 이단 재판?”
“성자를 장대에 걸 수는 없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도, 형제를 그렇게 하고 싶진 않군. 형제에게선 악마의 냄새가 나지 않네. 그저, 나는 개인적으로 궁금할 뿐일세. 자네의 정체에 대해서.”
페르난데스는 의자를 뒤로 빼며 팔짱을 끼었다. 낡은 나무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지금 말씀드릴 수 없다 한다면?”
“하나만 확실히 말해주게.”
제피스는 피로가 얹은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페르난데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단이라면? 악마의 주구라면? 디모니카의 육신을 입고, 성흔을 박아 넣고, 최근 모든 사건들을 해결했던.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을 치밀하게 조율하는 정치적, 외교적 식견을 가진 이 젊은 이단심문관이. 그 재능을 가지고 문명 사회의 적이 된다면?
이 젊은 청년이 앞으로 십 년을, 또는 이십 년을 더 성장한다면? 누가 이 녀석을 막을 수 있을까?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나?”
“아니오.”
페르난데스의 말에 제피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보다 더 정교하고, 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죠. 제피스 형제님. 저는 이단의 섬멸이 아니라, 세계를 구하려 합니다.”
다섯 대악마와 놈들의 수천 가지 암수를 모조리 꺾고 난 뒤에, 그래서 마침내 이 문명 세계에서 그 어떤 이단도 발을 붙일 수 없는, 확고한 역사를 새로 쓰고.
대의나 정의가 아닌 그 자신을 위해서. 아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