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77화 (78/388)

< 77. 이단심문관의 일 >

*

디모니카의 야외 찬송의 전당엔 이른 오전부터 디모니카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제각기 간단한 주전부리를 들고 와서 풀밭에 앉아 쉬고 있었다.

“오오, 나왔다. 나왔네, 형제들!”

“오오오!!! 해보게! 또 해보게!!”

“아 제기랄. 꺼지십시오 좀!!”

페르난데스는 양손대검을 들고 상단자세를 취했다가, 재빨리 풀며 투덜거렸다. 키르하스가 그 모습을 보며 깔깔 웃었다. 그녀는 거리를 살짝 벌리고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은공, 그러지 말고 한번 더 보여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무인이 비기를 익히는데 그걸 이렇게 대놓고 구경하다니?”

“정말 기사 같은 소리를 하는군 형제! 하하, 우린 성직자들일세!”

파비아노가 수통에 담긴 물을 벌컥거리며 웃었다. 그를 포함한 디모니카들은 운동용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거의 속옷만 걸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진짜 우리가 전생엔 저런 놈들을 왜 무서워했지?

‘죽이기 더럽게 힘들어서?’

전생, 그러니까 페이자쉬가 활동하던 전성기 시절에도 디모니카가 참전하는 전장은 퇴각 및 지연전을 기초 전술로 잡았다. 놈들이 대동하는 다른 이단심문관들이야 어떻게 처리가 되더라도, 디모니카는 죽이기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르난데스는 이 지긋지긋한 덩어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체념했다. 어쩌겠는가. 자신도 이미 디모니카가 되어버린 것을.

그냥 해보자. 다치지 않을 정도만. 페르난데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칼자루를 굳게 잡았다. 그 모습을 보며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키르하스. 막지 말고 피해.”

“오오! 저 말 또 나왔다!!”

“이번엔 성공하겠지? 이번에도 실패하면, 오 형제여. 나는 수치심에 죽은 형제의 장례 성사에 갈 자신이 없네!!”

“펙투스, 인켄숨(용기, 희생)!”

“막토!”

“막토 수페를라우도!”

이단심문관들의 낄낄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페르난데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거인을 벤 이후, 점점 그의 영혼 속에서 데인 왕의 영성이 흐려지고 있었다. 아마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 녹아 내리는 것이겠지.

왕의 경험과 업이 그의 핏속에 섞여 흐르며 무의식 깊은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기술을 복구하기 위해 매일 검을 들었지만, 이뤄낸 것이라고는—

-콰드드···콰직!!

“또!! 깼다!!!”

“으하하하 내 승리일세. 형제들! 자, 누가 걸었지?”

“세르지오 형제는 이번에도 성공에 걸었다네!”

“제기랄! 나흘은 금식해야겠군!”

훈련용 철검이 공간을 갈아버리며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공중에서 바스라져버렸다. 허공을 그어내던 검은 실선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며, 철가루와 칼날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페르난데스는 잡힐 듯 말듯한 감각에 아쉬워하며 칼자루만 남은 검을 바라보았다. 한 발자국. 아니, 두 발자국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그와 데인 왕의 일격에는.

“은공, 여기.”

“아, 그래. 고맙구나.”

키르하스가 그에게 다가와 수통을 건넸다. 페르난데스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그녀가 가져온 다른 철검을 들었다.

“저 기술 이름 기억나나?”

“비기 대검파쇄 아니었나?”

“···자네 요새 그런걸 읽나? 형제여, 수도승이 시장에서 팔리는 로망스를 읽다니?”

“성경은 한 권이지만, 무훈 로망스는 매년 발간 된다네. 얼마나 유익한지 아나? 자네도 읽어 보겠나?”

“아주 합리적이야. 페일론(지혜의 신)의 시선을 받았군. 세르지오 형제.”

“막토.”

“막토 수페를라우도.”

페르난데스는 디모니카들의 잡담에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칼을 치켜 들었다. 무시하자, 무시하자. 한번 더 해보자. 이번엔 될 것 같아. 페르난데스의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엔마기카 한 명이 로브를 끌며 다가왔다. 그는 사방에 널브러진 칼자루들을 바라보며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페르난데스에게 조용히 말했다.

“검을 낭비하는 것은 그쯤 하게, 형제님. 수도원장께서 찾으시니.”

“···오, 벌써 다음 임무입니까?”

다소 빠르긴 하지만, 어쨌건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니까.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키르하스에게 검을 돌려 주었다.

*

수도원장실로 향하는 회랑은 길고 검소했다.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기도하며 지나가는 수도사들을 지나쳐 천천히 회랑을 걸었다. 어젯밤 내내 내린 비가 믿기지 않게도 하늘은 깨끗하고 맑았다.

드래곤스파인 산맥의 기후는 극도로 변덕스럽다. 페르난데스는 창 밖으로 보이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걸었다.

“아, 거기 청년.”

“···청년?”

수도원에선 처음 들어보는 호칭인데? 페르난데스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발을 멈춰 섰다.

노을처럼 붉은 머리칼이 창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봄바람에 하늘거렸다. 쫙 달라붙는 가죽 자켓을 걸친 화려한 여인이 창틀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녹색 눈동자로 페르난데스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며 웃었다. 아주 짙은, 끈적한 시선에 페르난데스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누구신지···?”

“본관을 앙헬라라고 불러도 좋아. 지금은.”

“앙헬라. 허.”

-임페리얼 아이언사이드?

‘이단심문청엔 어쩐 일이지?’

저런 코드네임에 저런 말투를 쓰는 녀석들이 세상에 달리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앙헬라라는 여인을 살짝 경계하며 멈춰 섰다.

앙헬라는 도톰한 입술을 살짝 핥고는 웃었다.

“듣던 것보다 생긴 건 내 취향이군.”

“수도사를 유혹한다고···?”

“아, 미안해. 본관이 생각을 말했군.”

앙헬라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팔짱을 풀었다. 그녀는 또각, 또각 걸어와 페르난데스의 앞에 섰다. 머리 하나가 작아, 그녀는 페르난데스를 올려 보아야 했다. 짙고 아찔한 장미향이 풍겼다.

그녀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뻗었다. 페르난데스는 이게 무슨 뜻일지 잠시 고민했다.

“악수 처음 보나? 본관은 제국 아이언사이드, 그레이서클의 한 중대를 맡고 있는 사람이야. 영광으로 여겨야 해.”

“이단심문관은 주교의 권한을 가지고 있고, 저는 2급 이단심문관입니다만?”

“하! 역시 사내는 이래야지!”

앙헬라는 깔깔 웃으며 페르난데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즐거움에 반짝거렸다.

“요새 꼬마들은 하나같이 숫기도 없고 여려서 참 마뜩치 않았는데. 본관에게 말대꾸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

“용건이 뭡니까?”

“잘 해보자고. 잘 지내자는 뜻이야.”

앙헬라는 피식 웃으며 숄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긴 곰방대를 꺼내 우아하게 들었다.

“수도원은 금연 구역입니다.”

“아, 깜빡했군. 미안해.”

그녀는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사과하고는 짙게 웃었다. 앙헬라는 손을 팔랑거리며 천천히 멀어졌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짙고 아찔한 장미향이 회랑에 천천히 흩어졌다.

“또 보자고, 알베르트.”

-귀찮은 게 꼬였군.

‘제국이 나섰다면 중부 대륙 문제겠어.’

-네크로폴리스?

‘가능성 높지.’

멀어지는 앙헬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어떻게 이 시기에 제국이 네크로폴리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지?

‘네크로폴리스의 봉인이 완전히 풀리는 건 40년 뒤야. 페르타스가 죽은 이상 이제 봉인을 풀 수 있는 녀석이 없을 텐데?’

-그 전에 제국이 시도한 적이 있었나보군.

‘그건 실패했다는 뜻이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페르난데스는 곧 고개를 털고는 수도원장실로 향했다.

*

베오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벽에 걸려 있는 거대한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수도원장실 문을 열었을 때에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저, 수도원장님?”

“그래. 거기 앉게.”

베오른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로사리오를 쓰다듬었다. 페르난데스가 의자에 앉자마자, 그는 문득 입을 열었다.

“50년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멈춰야 할 비극···아닐까 합니다.”

“감상적이군. 솔직하게 말하게.”

“쓸모 없는 자원 낭비입니다.”

페르난데스의 말에 베오른은 의자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베오른은 피로에 찌들어 눈 밑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외눈안경을 벗어 마른 수건에 조심스럽게 닦았다.

“그래. 전쟁에 투자되는 자원이 승리로 얻을 수 있는 최대 이익을 넘었지. 교회의 학자들이 말하기를, 이미 문명 사회의 경제 능력은 10년 정도 퇴보했다고 하더군. 자네는 전쟁이 얼마나 더 지속되리라 보나?”

“앞으로 50년은 더.”

“···이유는?”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페르난데스의 말에 베오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페르난데스는 베오른의 등 뒤에 걸려 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레바인테르, 키르자트, 서부 대황야, 그리고 수많은 군벌들, 대륙 남서부에 있을 유목민족들까지도.

저 전쟁에서 승리한 측도, 이미 투자한 자원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적다. 그러나, 패배한 쪽은?

과연 저 전쟁이 누군가의 확실한 승리로 끝나게 된다면, 패배한 국가가 더 이상 국가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 손실과 어마어마한 전쟁 배상금. 향후 수십 년은 식민지배를 당할 수도 있고, 경제문화적 침략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만한 리스크가 도사리는 전쟁에서, 과연 누가 쉽사리 발을 뺄 수 있을까.

제국이든 키르자트든. 대부분의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전쟁은 소위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전쟁의 발발이 어땠든지, 이제 이 전쟁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승자 독식이라 말하면 웃기지만, 제국과 키르자트 둘 중 하나는 전쟁이 다른 누군가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 몰락할 겁니다.”

“좋네. 그럼. 자네는 누가 이기리라 보는가?”

“악마들이 이길 겁니다.”

“···허.”

베오른의 시선이 점점 더 깊어졌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흘린 피가 너무 많습니다. 패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승전국조차 제 위세를 되찾기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두 거대 국가가 무너지는 순간, 가장 즐거워할 녀석들은 악마들이 되겠죠.”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러니 이건 우리의 일이기도 하지.”

“전쟁을 멈춰야 합니까?”

그 당돌한 말에 베오른은 피식 웃었다. 열일곱 살, 한창 기사도 로망스에 빠져 칼을 들고 설칠 나이, 영웅시와 전설, 또는 술과 여자에 빠져 인생을 낭비할 나이였다.

그러나 이 꼬마는 언제나 이렇게, 우스울 정도로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놀라울정도로 냉철하게 대전략을 세웠다. 베오른은 이 꼬마가 마음에 들었다. 유능함 뿐만 아니라, 담대함까지.

이십 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그가 직접 일선에서 뛰던 시절에 이 꼬마가 신병으로 들어왔다면. 그랬다면 베오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 꼬마를 지원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단심문청의 수장이 되었다.

조직의 수장은 누군가를 편애할 수 없다. 조직의 모든 일원은 그에게 적재적소에 쓰여야 할 인적자원에 불과하니까. 베오른은 자신의 입장이 아쉬웠다.

“그건 주께서 해야 할 일이지. 우리의 일은 주의 뜻을 밝히는 것 뿐이다. 페르난데스 형제. 이걸 가지고 가게. 그리고 필요한 자원을 최대한 챙기도록. 오랜 출타가 될 테니까.”

베오른은 노란 밀랍이 박힌 봉투를 건넸다. 레바인테인 제국의 인장이 박혀 있는 봉인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봉투에서 희미한 장미향이 나는 것을 느꼈다.

*

-똑똑.

“안에 없다.”

“아벨, 들어가겠소.”

“안에 없다!”

-끼이익.

페르난데스는 아벨의 말을 무시하며 문을 열었다. 낡은 나무 문이 열리자, 방 안에선 끈적한 열기가 느껴졌다. 페르난데스는 방의 한 가운데에서 한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아벨을 바라보았다.

“지금 디모니카들처럼 보인다는 걸 아시오?”

“···후.”

-탁.

아벨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몸을 띄우고는 한 바퀴 돌아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야 나와 대화할 생각이 들었느냐?”

“그간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소.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었지.”

“이 못된 녀석.”

알트베르트에서 비센테 왕과 밀약을 나누고, 베이타서스 교황청에서 급히 이단심문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거의 아흐레를 달려와 이단심문청에 도착하고 곧장 장례식에 참여할 때까지.

아벨에겐 페르난데스와 단 둘만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알트베르트의 사건 이후로 점점 더 날이 서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은 거의 페르난데스와 대화를 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녀에게 있어서도 불편한 일이었다. 키르하스를 제외하면 이 시대에 그녀에게 지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한참 불퉁하게 페르나데스를 흘기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또 졌구나. 거기 앉거라.”

“고맙소. 그런데 방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요?”

“이 몸의 성능을 시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용의 모습이 아니니.”

아벨은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닦으며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헐렁한 옷 사이로 살풋 보이는 그녀의 살결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제기랄. 또.’

-하하, 이 못난 녀석. 네 나이를 생각해라.

‘내 잘못이 아니야. 이건.’

데인 왕의 영혼이 지금 빨리 아벨의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검술을 단련할 때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영혼의 편린이 어째서 아벨에게만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지···.

아벨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히 어머니를 향한 데인 왕의 효심이 아니었다. 보다 조금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아벨의 시선을 피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