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서로의 소망 >
*
페르난데스는 아벨이 따라준 물잔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의자를 살짝 뒤로 빼고 앉았다.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느냐?”
“···무엇이 말이오?”
“잔에 벌레라도 들었느냐?”
“그런 것 아니오.”
“···흐음?”
아벨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탁상을 톡, 두들겼다. 페르난데스의 시선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잔에 담긴 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벨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의 검게 찌든 눈을 바라보았다. 뭘 하는 거지?
“언제 이야기를 시작하겠느냐?”
“···먼저 물어보시오.”
“왜 날 바라보지 않느냐?”
“그게 질문이오?”
“중요한 질문이다.”
페르난데스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팔짱을 끼고 있는 아벨을 보고 다시 자연스럽게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을 보자니 심장이 뛰고, 시선을 애매하게 내리자니, 그녀의 팔에 지긋이 눌린 살에 눈길이 돌았다.
‘제기랄.’
-제발 나잇값을 좀 해봐라. 어른스럽게.
‘니가 해봐.’
-전생에 내가 그 상황이었을 때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제기랄. 페이자쉬.’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영혼이 더럽게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킬킬거리며 음담패설을 시작하는 페이자쉬와, 끊임없이 아벨의 땀을 닦아주고 따듯한 말을 건네라고 속삭이는 듯한 데인 왕의 파편까지.
“난 여기에 있다. 페르난데스.”
-휘릭.
아벨의 하얀 손이 그의 눈 앞에서 흔들렸다. 페르난데스는 깜짝 놀라며 아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불퉁한 표정으로 앞머리를 늘어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요즘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영성은 좀 어떠시오?”
“···뭐?”
“알트베르트에서 용으로 변한 이후 격에 타격이 좀 있었을 것인데, 아직 거동은 괜찮소?”
뜻밖의 말에, 아벨은 당황하며 말했다.
“앞으로 백 년 정도는 거뜬할 것 같구나. 그리고 백 년이면 충분하기도 하지. 인간은 원래 그 정도를 살아가니, 이 참에 인간이 되었다 생각하는 편도 괜찮겠지.”
아벨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 아이를 놀리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지금 나를 걱정했느냐? 후후, 페르난데스.”
-드륵.
아벨이 의자를 살짝 더 당기자, 정확히 그 거리만큼 페르난데스는 뒤로 물러섰다. 디모니카다운 거리감각이었다. 그리고 아벨은 용의 인지감각으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 같은 거리를 멀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왜 멀어지느냐?”
“원래 이 정도 떨어져 있었소.”
그야 그 정도 떨어져 있기는 했지. 아벨은 자신의 눈을 피하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비록 쇠락했으나, 반신에 도달한 영혼의 격이 페르난데스의 분위기를. 보다 정확히는 영혼의 분위기를 빠르게 간파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페르난데스가 빠르게 말을 막았다.
“음, 아벨. 사막이나 대황야에 대해 들어본 적 있소?”
“소문으로는. 그래.”
아벨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품 속에서 편지를 꺼내었다. 제국의 밀랍 봉인이 박힌 편지였다.
“그 곳에 초청 받았소. 함께 해주시겠소?”
“···후. 못된 녀석.”
아벨은 살풋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곧 그녀는 찬란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 말하면 내가 묻고 싶은 것을 물어볼 수가 없지 않느냐.”
그녀는 편지를 쥐고 순간 인상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코 끝에 가져갔다.
“향수···?”
“아, 곧 만나게 될 거요. 제국 특무대 쪽 인물인데···.”
“흐으으음. 여자 향수라.”
아벨은 편지봉투를 뜯어 보지도 않은 채 탁상 위에 내려 놓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잠시 스트레칭을 했다. 헐렁한 옷 사이로 보이는 하얀, 탄력적인 근육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성이 보낸 초대장을 내가 먼저 뜯을 수는 없지. 자, 따라 나오거라. 가볍게 몸을 풀어야겠으니.”
“···아벨?”
“네가 익힌 검술을 나도 보아야겠다.”
사심은 없어. 아벨은 성큼 방 밖으로 나섰다.
*
수도원의 정문을 나서자마자, 앙헬라는 피식 웃으며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정문 옆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다가와 손끝에서 불꽃을 피워 불을 붙였다.
-치익.
“씁. 후. 빌어먹을 금욕주의자들.”
“가신 일은 어찌 되셨는지요?”
앙헬라는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리며 사납게 웃었다. 사내는 그녀에게 마차 문을 열어주며 공손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마차 위로 오르며 말했다.
“타라. 브랜든. 밖에서 떠들 이야기가 아니다.”
“예, 대장님.”
-끼익. 탁.
마차는 거친 바퀴소리를 내며 산로를 달려 나갔다. 마차 안에서 앙헬라는 창의 커튼을 닫고 철창을 내렸다. 완전히 밀폐된 그 안에서, 그녀는 기지개를 펴며 융단이 깔린 소파 위에 몸을 늘어트렸다.
“그 이상주의자들이 숨기고 있던 보물 치고는 싹수가 괜찮더구나. 당초 작전대로 시행해도 되겠어.”
“청장님의 걱정이 크십니다.”
“그 꼰대가 뭐라 말하든 관심 없다. 브랜든.”
“베이타서스 교회는 작은 시골 신전이 아닙니다. 만신전의 성자는 지나가던 동네 청년이 아니고요.”
“본관도 시골 아낙이 아니고, 본 특무대도 동네 경비대가 아니다.”
브랜든은 앙헬라의 손끝에 재털이를 가져다 댔다. 앙헬라는 손을 살짝 틀어 재를 털어내고 다시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후. 피차 실패하면 옷이건 목숨이건 내걸어 둔 입장에서 무슨 겁이 그리 많더냐?”
“저는 괜찮지만, 대장님께서···.”
“킥. 그만둬라. 아주 금칠을 하려 드는구나. 이 녀석.”
앙헬라는 부스스 일어나며 재털이에 담배를 털었다. 그녀는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열었다. 시계의 태엽들이 복잡하게 얽히며 기이한 문양을 만들었다.
“그러다 그 성자가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시금석이 될 운명이라면 거기 까지지. 되었다. 채비해 두거라. 나흘 뒤에 출발할 예정이니. 녀석의 운명은 그때 가늠해 보자꾸나.”
“···예, 대장님.”
*
페르난데스는 터지고 갈라진 근육과 피부에 붕대를 감싸고, 그 끝을 이빨로 끊었다. 짐은 대강 다 싸 두었고, 마르티리오 형제에게 받아온 무장도 충분했다. 애초에 2급 심문관이 된 이후부터 무장 불출에 제한이 크게 줄어 편했다.
-똑똑.
“아, 키르하스. 어서 들어와.”
“예, 은공.”
곧 키르하스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간에 서서 불안한 표정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고 있어?”
“저, 은공. 저는 그러니까···. 제가 짐작하기로는···. 그, 혹시···.”
“아, 아벨에게 들었나? 맞아, 네 고향으로 갈 거야.”
“···그렇군요.”
키르하스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귀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연신 페르난데스의 짐을 힐끗거렸다.
평소 답지 않게도, 그녀는 여행을 떠날 채비를 전혀 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왜 그래? 여기 앉아봐.”
페르난데스는 침상을 툭툭 두드렸다. 키르하스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의 곁에 앉았다.
“이것 좀 당겨줘. 아, 그래. 고마워. 좀 더 세게.”
키르하스는 그의 벗은 상체를 보며 조심스럽게 붕대를 당겼다. 아벨과의 대련에서 거의 박살이 나다시피 구른 탓에 온몸이 자상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에 키르하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흉터 가득한 페르난데스의 근육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얇은 피부 아래로, 강인한 근육이 뜨겁게 맥동하고 있었다. 곰의 근육과 사자의 심장을 가진 영웅···.
“아벨도 너무 하셨습니다. 곧 먼 길을 떠나야 하는데···.”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키르하스, 디모니카는 빨리 회복하니까. 그래, 무슨 일이야?”
“앗, 어···.”
키르하스는 침대에 꼬리를 탁, 치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불안해 하고 있군.
‘그건 보면 알아.’
-멍청아. 일가족이 모두 불타고, 노예로 팔려갔던 수인족이 인간과 같이 나타나면 동족들이 퍽도 환영하겠구나.
‘아···.’
자존심 높은 수인 호족들 사이에서 인간과 함께 나타난 그녀는 인간에게 몸을 판 탕녀로 비춰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키르하스는 동족과 접촉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배려가 부족했군.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반 박자 늦게, 그녀의 귀가 곧게 섰다.
“걱정 마. 키르하스. 내게 계획이 있으니.”
“···?”
“너를 수치스럽게 하진 않겠다.”
황야의 방패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수인 호족 연합을 만들어 카라드스카르를 막아낸 대영웅. 전생의 그녀는 모든 수인 호족들의 우상이나 다름 없었다.
전생이라고 달랐을까. 그녀는 고향을 잃고 인간들의 땅에 노예로 팔려갔으며, 심지어 이단 사교도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련을 딛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20여년, 키르하스 하트테이커의 군기가 황무지에 곧게 설 때. 그 누구도 그녀를 ‘노예 출신’이라 멸시하지 못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숙적 중 하나로서, 그녀가 어떻게 그 지휘에 올랐는지 여실히 알고 있었다.
‘50년 전쟁의 변수.’
페르난데스는 눈을 꼭 감고 그의 손길을 느끼는 키르하스를 내려보았다. 그녀가 전생에 이뤘던 업적들 중엔 ‘고대 만신전의 유적 돌파’가 있었다.
이 시대엔 오로지 그녀만 알고 있는 위치에 있는 고대 유적. 지금은 멸망한 칼라니 씨족의 비밀 거점. ‘카자크 카단의 몰락’
그 심처를 돌파해 고대 만신전의 교단을 부활시키며 화려하게 데뷔한다면. 전생에 그녀는 충분한 입지를 다진 후에 그 업적을 이루었지만, 노예 출신으로 평판을 시작해야 하는 키르하스로서는 그보다 좋은 디딤판이 없을 것이다.
사냥의 카단. 뭄토의 손에 의해 죽은 첫 번째 신. 만전의 상태이면 모르되, 알트베르트 사태로 힘을 잃고 문을 걸어 잠근 뭄토에게 있어서, 자신이 죽였던 신의 부활보다 성가신 일이 있을까.
“···네. 은공.”
키르하스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곧은 신뢰에, 페르난데스의 입이 부드럽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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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달빛을 받고 있었다. 멜르실두르는 여명의 신이었고, 태양이 떠오르기 바로 직전인 이 시간, 그녀의 힘이 정점에 달했다.
-후···.
그녀의 입에서 하얀 김이 서렸다. 영성이 빠르게 조립되고, 정렬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남은 삶이 얼마나 될까? 크게 무리하지 않는다면 200년? 조금 더 격렬하게 살게 된다면 100년 가량?
‘상관 없다.’
그녀의 푸른 눈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래, 상관 없었다. 100년이면 충분해. 그녀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인물들의 품에서 눈을 감을 수 있다면.
‘···다인.’
아벨은 낮에 페르난데스가 보여주었던 검격을 떠올렸다. 거칠고 투박했지만, 그건 분명 다인의 검술이었다. 그녀의 검술이었다. 그녀가 직접 가르쳤던.
‘다인, 네가 직접 그를 만나 너의 검을 주었구나.’
그녀는 그녀의 방 벽에 걸려 있는 낡은 망토를 바라보았다. 다인 왕의 인장이 박혀 있는 모직물이었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포효하는 사자가 그려진 인장을 바라보았다.
‘부디, 이 여정의 끝까지 그를 가호해 다오.’
어미이자 스승으로서 너무 잔인한 부탁일까? 아벨은 슬프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저 멀리,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