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오아시스의 밤 >
*
오아시스의 밤은 아름다웠다. 페르난데스는 도시를 가로질러 복잡하게 이어진 수로를 바라보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 새하얀 달빛이 수면에 일렁이고 있었다.
“은공.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페르난데스는 지도를 펼쳤다. 연막을 가정해 삼십 분, 놈들이 대비하기를 기다려 다시 삼십 분. 그래서 한 시간. 지도 위의 점은 한 시간 째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대상의 혈액과 신체 기관 등을 이용해 벌이는 고전파 추적 마법은 효과가 대단히 직관적이지만, 자신이 마법에 걸렸다는 것을 파악하기도 쉬웠다. 페르난데스는 청동 왕좌의 마법 총량이 다소 증가한 것을 느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추적 시도 총 열세 건. 저쪽 마법 전력도 포기를 모르는군.
‘서른 번을 시도한들 결과는 같아.’
모든 마법은 잔향을 남긴다. 이런 방식으로 그 효과가 오래간 지속되는 종류의 마법은 필연적으로 역추적이 용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전자가 평범한 마법사라면.
아쉽게도 페르난데스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이미 상대는 마법의 정체를 파악하고 역추적을 시도하고 있었다. 모든 역추적 마법이 실패했으니 아마 상대편도 지금쯤이면 준비를 마쳤겠지.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단검을 갈무리했다.
페르난데스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펼쳐진 거대한 시가지를 향해 뛰어 내렸다.
“키르하스, 가자.”
“예, 은공.”
*
모사트 시의 시가지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애당초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발전한 상업도시 답게도, 그리고 전쟁 위험을 지근거리에 이고 있기 때문에.
도시 자체의 연식은 고대 상 아시트 제국 시절로 이어지지만, 난개발 탓에 구 시가지의 경우 끔찍하게 혼란스러웠다.
페르난데스는 시장 골목 바로 옆 하렘가를 걷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하수로에 멈춰 섰다. 지도가 없었다면 길을 찾기 제법 힘들었을 것 같았다.
베인의 피에서 이어진 추적 마법의 잔향이 지근거리에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지도에 명멸하는 붉은 핏방울을 보고는 지도를 접었다.
“키르하스. 준비해.”
“···네, 은공.”
키르하스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언제든 달려나갈 것 같은 흉흉한 기색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음침한 술집의 나무문을 밀었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밀렸다. 주점 내부는 어둡고, 지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페르난데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철컥.
주점의 희미한 조명 아래에, 바탠더와 손님들이 일제히 그들을 노려보았다. 진득한 살의가 피부에 닿아 흐르는 것 같았다. 바텐더가 닦던 컵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디모니카의 예민한 청각에, 칼날이 검집을 스치는 작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처음 뵙는 분인데···?”
“간 보는 시간은 건너 뛰지.”
“요리는 할 줄 모르시는 분 같군요. 제일 중요하고 재밌는 순간인데.”
페르난데스는 바텐더의 웃음을 무시하며 주점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주위에 한량처럼 늘어져 있던 손님들도 하나 둘 일어섰다.
“저희 친구 하나를 곤란하게 만드셨던 것 같군요. 제국인이 어째서 이렇게 깊숙이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바텐더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의 손에 길고 얇은 세검이 들려 있었다. 그와 동시에 주점의 손님들이 일제히 칼을 꺼내 들었다.
“은공!!”
키르하스가 장검을 뽑아 자세를 잡으며 외쳤다. 수가 많았다. 이보다 많은 수를 상대한 적도 있었지만, 아무리 대영웅이라 하더라도 피륙에 칼날이 박히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
“그만 둬라. 너희 상대가 아니니.”
바의 깊숙한 곳, 휘장이 드리워진 방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청아한 목소리가 주점을 가득 채우고 있던 끈적한 살의를 깨끗하게 밀어버렸다. 페르난데스는 휘장 안쪽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담대하군, 마법사.”
“그쪽이 샥시시인가?”
“삶이 즐거운 이유는 이러한 마주침에 있지. 젊은 마법사.”
-사르륵.
휘장이 걷히며 검은 머리칼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사막 민족 특유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보석 같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갈색 살결을 거의 그대로 드러내는 얇은 천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단검 한 자루를 손가락 위에서 굴리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고, 뇌쇄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보다 젊군. 놀라워. 술수의 수준으로는 무슨 늙은 대마법사를 생각했는데 말야.”
따라오게. 그녀는 끈적하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
주점의 개인실은 보라색 유리알을 끼운 등유로 화려하고, 몽환적이었다. 여인은 벨벳이 깔린 소파 위에 기대어 앉아, 물담배 향로에 불을 붙였다.
-치익.
곧, 향로 위에 얹힌 액체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여인은 물담배의 관을 쥐고 물부리를 물었다. 퇴폐적인 향이 방 안에 가득 퍼졌다. 후각이 예민한 키르하스는 콜록거리며 코를 막았다.
그녀는 그런 키르하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린 수인 처녀로군. 어느 부족 출신이지?”
“신변잡기를 나누자고 온 것이 아닌데.”
“그러자고 온 것일 텐데? 나는 그러려고 그쪽을 초대한 것이고. 단순히 우릴 추적하고, 소탕하기 위해 벌인 짓은 아니지 않나?”
쉽지 않은 인물이로군.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인은 끈적하게 웃었다.
“원탁 기사 알베르트. 적어도 우리가 파악한 그쪽 이름은 이런데, 다른 이름도 알려줄 생각이 있나?”
“그쪽 이름을 알려준다면?”
“아, 젊은 마법사.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여인은 비단이 스치듯 웃었다. 아찔하고 달콤한 향기가 그녀의 숨결에 따라 흘렀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향로를 살폈다. 여인의 눈이 청명하고 또렷한 것을 보아, 마약 성분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샥시시의 사디아 아말. 지금은 나를 그렇게 부르게.”
“안젤로.”
“오. 예상과 다른 이름인데. 베이타서스 계열이군? 이단심문관들의 이름인데?”
여인, 사디아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웃었다. 하얀 이가 조명에 반짝거렸다.
“자네, 아이언사이드의 개새끼들이 아니었군. 같은 개라도 만신전의 개새끼 쪽이 좋아,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다른 얘기 말고, 좀 더 간결한 이야기를 원하네만.”
“그렇게 삶을 담백하게 살지 말게. 인생은 짧고, 즐거운 일은 많지 않나.”
키르자트 샥시시. 술탄 직할 최정예 요원들. 요인 암살, 정적 제거, 파괴 공작, 여론 조작, 정보 수집···. 술탄이 직접 공개적으로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도록, 술탄의 모든 배후 업무를 수행하는 공포의 상징.
현 키르자트 술탄, 이사 무스크 야흐아 알’하쉬르가 가진 두 개의 검 중 하나라 불리는 이들. 키르자트의 불멸 대대와 더불어 가장 악명 높은 조직이 바로 키르자트 샥시시다.
페르난데스는 사디아의 능청스러운 표정을 보며 짙은 흥미를 느꼈다. 서로의 심계를 나누는 것은 흑마법사의 기본 소양이었다. 그리고 이 짙은 향기 사이로 느껴지는 것···.
이 여자도 흑마법사였다. 그것도 제법 고위의.
“마법을 익혔군. 사디아.”
“내가 지금 자네를 당장 죽이지 않는 것도 그 이유야. 젊은 기사. 어떻게 샤일드의 가호를 받은 위대한 원탁 기사,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 그리고 나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같은 인물일 수 있지? 이 중 어떤 것이 거짓일까. 어떤 것이 자네 진짜 정체일까?”
“셋 다 내가 맞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지.”
“본론, 본론이라···.”
사디아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단검을 굴리며 말했다.
“바라는 게 뭐지? 우리 정보원을 핍박해가면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뭔가?”
“이 도시 지하에 있는 것. 적어도 그 입구까지 가는 통로를 제공하길 바란다.”
“거래 조건은?”
“제안해 봐.”
그 말에 사디아는 큭 하고 웃었다. 대단하군. 사디아는 정말 이 젊은 청년에게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파악한 정보는, 최근 아이언사이드 쪽에서 활동하는 이 젊은이의 정체가 데인 왕국의 신입 원탁 기사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의 정보원에게 마법을 걸고, 그녀 자신의 역추적 마법을 모조리 회피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자신의 마법이 들통났다는 것을 인지하고도 그 소굴에 걸어 들어온다니?
이런 담대함, 이런 기민함. 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의 인물이었다. 아이언사이드의 개였다면 당장 처리했겠지만···. 안젤로, 이단심문청의 인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적어도 샥시시와 적대하는 진영은 아니었으니.
술탄의 샥시시로서 사디아는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그녀는 입술을 핥으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아이언사이드가 이 도시에서 원하는 것이 뭔지 궁금하군.”
“샥시시를 잡고 심문하는 것?”
“아니, 이 도시 지하에 잠들어 있는 것이 뭔지 안다면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닐텐데.”
“네크로폴리스 콘클라베의 세 번째 봉인이지. 그 누구도 해주한 적 없는 견고한 고대의 봉인.”
“그리고 자네가 왔다라···. 샤일드의 가호를 받은 기사이자, 뛰어난 흑마법사···. 후, 아이언사이드 놈들 인재 영입 능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샥시시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위협적으로 말했다.
“네크로폴리스의 봉인을 푸는 것은 금기에 속한다. 이단심문관 안젤로. 악마 사냥은 너희 본토에서도 충분히 즐길 만큼 바쁠 텐데, 굳이 이 사막까지 찾아왔나? 우리가 대봉인을 좌시하는 이유는, 상 아시트의 비극을 다시 한 번 겪고 싶지 않아서야.”
“봉인을 좌시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숭배하는 모습이더군. 네 정보원이 고용한 용병이 뭄토의 계파던데?”
“타락은 사용하기 따라 유용한 도구지. 우린 종교가 아니라, 술탄을 따르거든.”
페르난데스는 품 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암녹색 검신과 복잡한 황동 새김이 박힌 투박한 단검. 네크로폴리스의 검이었다. 사디아는 그 검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봉인이 이미 풀리기 시작했어. 사디아. 이미 늦었어. 상 아시트 제국의 몰락을 재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협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잠깐 볼까.”
사디아는 조심스럽게 네크로폴리스의 단검을 들어 올리고 꼼꼼히 살폈다. 그녀의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고대 아시트 제국의 음각 양식이었다. 진품이다.
“어디서 났지?”
“탈출한 망령 하나를 잡았지. 데인 왕국까지 흘러 들어왔더군. 이 도시에서 놈들이 봉인을 깬다면, 자. 어떻게 될 것 같나?”
“···모사트 시엔 사만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살고 있어.”
“이제 무고했던 시민이 되겠군.”
“협박하는건가?”
“조언하는 거야. 사만 명 분의 망령 군단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조력하라고.”
사디아는 침을 삼키고 천천히 단검을 내려 놓았다. 마치 당장 폭발할 폭약을 만지는 듯 섬세하게. 그녀는 재빨리 성호를 긋고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네크로폴리스의 대봉인을 지키는 다섯 개의 기둥이 있고, 그 중 하나가 이 모사트 시 지하에 묻혀 있다. 상 아시트 제국이 네크로폴리스의 발호와 동시에 멸망했고, 그 자리가 지금의 대사막이 되었다는 전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일 그 봉인 중 하나가 스스로 열리게 된다면?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망령과 악마들이 모사트 시 위로 흘러 나온다면? 이 도시의 운명은 그날로 끝이다.
봉인은 적어도 이천 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네크로폴리스의 대봉인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자들은 매우 드물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세대에 봉인이 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부러 깨려고 노력해도 부서지지 않은 견고한 고대 주문이었으니까.
그런 봉인이 지금 풀리려 한다면···.
“네가 그 봉인을 다시 강화하겠다는 건가?”
“아니, 완전히 풀어내려 한다.”
“···미친 소리!”
사디아가 거칠게 소리치자, 휘장 너머에서 사내들의 인기척이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뽑고 다가오는 사내들의 기척을 느끼며 웃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잠든 콘클라베를 직접 찢어 죽이려 하지.”
“해본 적 있다는 투로 말하는군?”
“물론.”
페르난데스는 사디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보라색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그 안에서 불안함과 공포를 읽고 있었다.
아이언사이드가 그에게 이 단검을 준 이유. 샥시시에게 사용할 조커 카드를 쥐어준 이유가 뭐였을까. 아이언사이드가 그에게 네크로폴리스의 봉인을 풀도록 종용하는 이유가 뭘까?
‘무엇이든 상관 없다.’
그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키르자트에겐 혼란과 부담을 안겨줄 테니까. 아이언사이드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것 없는 도박이겠지. 어리석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얕은 수였다.
그는 대악마와 거래할 때에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한 적이 없었다.
“길을 터주지. 단, 내가 동행하겠어.”
“좋아.”
페르난데스는 단검을 품에 갈무리하며 웃었다. 아이언사이드의 노림수가 키르자트 제국에 혼란을 유발하는 것. 단지 그것 뿐이라면···.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 이용하기 수월한 잔재주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