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대립과 선포 (1) >
*
달빛 고고한 밤하늘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실금이, 그러나 곧 거미줄처럼. 깨진 유리를 그림 위에 덮어 놓은 것처럼 미묘한 굴절로 인해 달빛이 두 줄기로 내려 앉았다.
-후우우웅···.
바람이 휘몰아쳤다. 도시의 시민들이 이 이변을 느낀 것은 어느 순간엔가 온 거리, 온 하늘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빛이 굴절되고 난반사하며 마치 백야 현상이 일어난 듯 하얗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그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시민들은 삼삼오오 거리에 모여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린 아이가 물감을 가지고 놀듯이 하늘의 빛이 일그러지고, 번졌다.
“으아아앙···.”
-컹! 컹!
거리의 시민들은 조용히 속삭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놀란 아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사람보다 예민한 본능을 지닌 작은 동물들의 울부짖음이 도시를 휩싸고 있었다.
모두가 이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무언가가 온다. 태풍이 불어 닥치기 전날 밤의 미지근한 비 냄새를 맡듯이. 자연재해와 유사한 무언가가 이 도시 위에 내려 앉고 있었다.
*
페르난데스는 죽음의 마력을 흩뿌리는 유골을 노려보며 잠시 침묵했다. 암녹색 빛을 내뿜는 마력석들마저 흐리게 색이 바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었다.
유골은 정좌한 자세를 풀지 않으며 그저 그런 페르난데스를 내려보았다. 푸른 귀화가 일렁거렸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니, 복잡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청원자여, 다섯 번째 기둥과 면식이 있나?]
“파프테트는 죽었다.”
-스르릉.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들어 유골을 겨누었다.
[죽은 자를 다시 죽일 순 없다. 파프테트, 그 어린 망령은 그 녀석 답게도 쓸모 없이 사라졌나 보군.]
유골의 눈이 페르난데스의 검을 바라보았다. 유골은 자세를 바꾸며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와 섰다. 페르난데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이었다.
[그 무능한 것 말고도, 많은 것이 느껴지는구나. 흥미롭군.]
전투는 불가피했다. 놈의 능력을 파악하기 전까진 키르하스와 아벨을 잠시 피신시킬 필요가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사디아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디아. 지금 이 피라미드 입구에 내 동료들이 와 있을 것이···.”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페르난데스의 고개가 퍼뜩 올라갔다. 깊은 지하, 마력석으로 가득 찬 광맥과 강력한 존재감을 내뿜는 콘클라베 망령의 너머로. 저 먼 하늘 위에서 꿈틀거리는 마법의 기척이 희미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짙푸르게 빛났다. 그는 피라미드 내부를 휘몰아치는 마력의 흐름 사이에서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여기에서 느껴질 정도라면 지금쯤 지상은···. 페르난데스는 하, 하고 웃었다. 제국 파괴술 대학 특유의 무기질적인 마력 잔향. 그것이 지금 느껴진다는 의미.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정보들이 뒤엉키고는, 차곡차곡 쌓여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함정이었군.’
-아이언사이드의 목적, 역시 단순히 네크로폴리스의 봉인이 아니었어.
‘네크로폴리스의 봉인을 풀고 후방을 교란시킨다라···. 괜찮은 계략이야. 전선 후방에서 놈들이 날뛰면 효과적이긴 하겠지.’
-변수를 가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지.
페이자쉬는 하늘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를 따라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 우리라는 변수를 가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괜찮은 계략이야.’
네크로폴리스의 군단이 전선 후방에 나타난다면, 키르자트의 입장에선 순식간에 양면 전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틈을 노려 진군한다면, 제국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
아이언사이드의 계략은, 봉인 풀린 네크로폴리스를 자유롭게 날뛸 수 있도록 판을 깔아두는 것이었다. 깔끔한 차도살인지계였다.
페르난데스를 버림패로 쓰겠다는 발상을 제외한다면. 훌륭한 계략이다.
“사디아, 지금 내 동료들을 데려 피신 하시오.”
“···알겠다.”
사디아는 마력의 흐름을 읽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그녀로서는 저 유해 파라오의 마력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페르난데스의 시선은 그 너머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기묘한 압박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는 재빨리 뛰어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유해를 바라 보았다.
[재롱은 끝이냐?]
“휴전을 제안한다. 콘클라베.”
[호오?]
유해는 흥미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주위를 맴도는 부장품들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짐에게 ‘제안’이라···. 당돌하구나. 마음에 든다. 하지만 불가하도다.]
유해의 근처를 떠돌던 부장품들이 허공에 기묘한 도형을 그렸다. 유골은 푸른 귀화를 빛내며 킬킬거렸다. 그의 앙상한 손가락이 뒤틀리며, 허공에 수인을 새겨 넣었다.
[짐은 알타락, 마흐라스의 왕이다. 누가 감히 짐에게 제안할 수 있단 말이냐? 누가 감히, 짐의 하문에 답하지 않을 수 있더냐? 필멸자, 청원자. 너는 짐과 논할 격을 갖추었느냐?]
-후우우웅!!
엄청난 압박감이 페르난데스의 사지를 얽매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 생에 대한 본능적 갈망을 불러 일으키는 마력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검을 겨눈 자세 그대로 멈추어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평화로운 휴전은 글렀군.
“격이라.”
콘클라베, 콘클라베···. 그래. 조금 돌아가더라도. 페르난데스는 저릿한 압박감 속에서 칼끝을 비틀었다. 마력의 격류가 칼날을 타고 흘러 그의 팔뚝을 휘감았다. 등 뒤로 돌린 그의 왼손이 천천히 수인을 짚었다.
두 마법사의 시선이 교차했다. 각자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지만. 한 때 이 세상을 오시 했던 강자 된 입장으로. 그 시절처럼, 각자의 목적이 있다면. 그저 힘으로 얻어 내면 될 뿐!
“논해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페르난데스와 알타락의 수인이 동시에 공중을 그었다.
*
-쿠구구궁!!
사디아가 석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간 직후부터, 석실 내부에서 터져 나온 진동이 피라미드를 울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복도를 타고 달렸다.
어째서 도망치라고 했을까? 네크로폴리스 콘클라베, 상 아시트 시절의 잊혀진 전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다섯 명의 사제들. 그 정도의 강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오히려 힘을 합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내가, 짐이 된다고···?’
그녀는 일선에서 활동하는 종류의 전투원이 아니었다. 뒷공작과 암살 사주, 사보타주, 정보 수집과 여론 조작···. 술탄이 직접 손을 델 수 없는 더러운 일들을 처리하는 행정 직원에 가까웠다. 하지만, 하지만.
충분히 훈련된 마법사로서, 오랜 시간 복무한 샥시시 요원으로서. 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쿠구구궁!!!
“꺅!!”
그녀는 등 뒤에서 덮쳐온 강렬한 충격파에 발을 헛디디며 굴렀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흘렀다. 발을 삔 것 같았다. 그녀는 욱신거리는 발목을 움켜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이렇게 무능하다고?’
샥시시에 입단하고 단 한번도 스스로를 폄하한 적이 없었다. 비록 불멸 대대와 같이 화려한 전공을 세울 순 없어도, 그녀는 술탄의 검이었다. 술탄의 검!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려다가, 그녀의 바로 눈 앞에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괜찮아요?”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아름다운 청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저 젊은 기사가 데리고 다니는 어린 수인족 수행 종자였다.
“···자네 주인의 전언이 있었다.”
“말해 보거라.”
수인족의 뒤에서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묘한, 아주 낡은 억양의 말투였다. 곧, 화려한 황금색 머리칼이 사디아의 시선을 가득 채웠다. 새하얀 손가락이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우선 일어나거라.”
차갑고 섬세한 손가락이 사디아의 손을 잡았다. 곧 억센 힘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당황 속에서 비틀거리며 자신을 일으켜 세운 이를 바라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아름다운 눈동자, 새하얀 턱과 해질녘 밀밭처럼 펼쳐진 부드러운 금발···. 아주 정적인, 마치 어린 아이의 그림책에서 나올 것 같은 고전적인 미인이었다.
“자, 아이야. 전언을 말해 보거라.”
“알베르트의 동료십니까?”
“동료? 음. 아직은 그렇지. 아직은 그냥 동료에 불과하지.”
여인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 지었다.
“아벨이라 부르거라.”
“저는 사디아 아말···.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아벨은 잠시 긴 회랑의 너머, 페르난데스가 있을 석실을 바라보았다. 피라미드를 울리는 진동, 대기에 휘몰아치는 진득한 마력. 살기.
아벨은 곧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어찌 또 다시 그러겠느냐.”
“···?”
“아니 그렇느냐, 키르하스.”
“네, 아벨. 두 번 그럴 수는 없지요.”
사디아가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던 수인족 처녀마저 웃으며 끄덕였다. 그녀들은 사디아의 곁을 지나쳐 회랑 안으로 나아갔다.
콘클라베가 흩뿌리는 죽음의 기운 저 안으로. 사디아가 홀린 듯 도망쳤던 그 안으로. 마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그럴리가 없다. 죽음의 위기를 겪지 못했던 이들은 이 유적의 입구를 밟을 수 없다. 사디아는 멍하니, 폭음이 쏟아지는 회랑으로 걸어가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
‘페이자쉬, 청동 왕좌의 잔량을 말해줘.’
-내가 네 조수로 보이느냐.
페이자쉬는 투덜거리면서도 성실하게 세 손가락을 폈다.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손가락을 곁눈질하며 주문을 맺었다.
검은 마력이 알타락의 몸을 맴돌며 이어진다. 상 아시트 시대의 주문, 그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겠지만—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만류귀종? 아니, 차라리 수렴진화라 하리라. 그리고 그 수렴의 끝에 서 있던 마법사로서, 페르난데스는 노련하게 주문의 맥을 짚고 있었다.
알타락의 첫 번째 수인은 파괴, 집합, 속박. 거의 동시에 세 번의 수인을 짚어낸 것도, 그 정도의 마력을 조작하며 섬세함을 잃지 않는 품위까지도 인정해줄 수 있었다. 그는 뛰어난 마법사다.
그러니, 격에 맞춰 대접해주지. 페르난데스의 입술이 비틀리며 올라갔다. 이런 수준 높은 마법전이 얼마나 간절했던가.
이 전능감이.
‘아, 좋군.’
파괴의 대척으로 창생이라. 집합은 왜곡되고 속박은, 그래. 속박의 역순은 오히려 속박이다. 페르난데스의 수인이 재빨리 맺히고, 풀렸다.
외과의의 수술칼처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러나 단 한 번의 머뭇거림 없이.
완벽한 타이밍에 맞춰서 그 리듬을 잃지 않으며.
[짐의 속도를 따라왔다고···?]
“이제 네가 따라올 차례야.”
고명한 검사들의 대련은 오히려 화려하지 않다. 화려한 격검은 하수의 것. 진정한 검사들은 상대방의 수를 읽고, 그 대응 수를 펼치며, 그와 동시에 다음 반격을, 그리고 그 다음 반격을 대비한다.
마찬가지로, 마법사들간의 전투 또한 같은 양상을 보인다. 상대방의 수인을 보고 마법을 예측하며, 반대항의 마법을 준비한다. 검사의 카운터처럼, 정교한 스펠 카운팅을 눈으로 쫓으며, 때로는 마력으로 느끼며.
따라서, 페르난데스와 알타락은 서로 그 어떤 마법도 구현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마법을 준비하면, 상대는 그 대척점의 주문을 준비한다. 양측의 마력은 매듭이 지어지기 전에 해주 된다.
반사신경, 마력감응, 그리고 마법전 자체에 대한 천부적인 센스가 필요한 영역의 전투였다.
그 ‘감각’이라는 애매한 부분에 대해서, 페르난데스. 아니 당년 페이자쉬는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 없었다.
[···이 녀석!]
알타락이 신음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마법을 견제하기만 하던 페르난데스가 이제 처음 보는 수인을 짚기 시작했다. 선제권을 빼앗겼다!
-두 번 남았다. 페르난데스.
‘충분해.’
알타락의 마법을 해주하는 데에, 청동 왕좌에 허락된 세 번의 기회 중 하나를 사용했다. 페르난데스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