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자기 존재의 증거 >
*
푸른 초원, 붉은 석양. 수채화처럼, 아니 파스텔로 그려 놓은 동화처럼 그 시절 그 초원은 아름다웠다. 페르난데스는 흉터가 빼곡히 덮인 자신의 건틀릿을 내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시절. 그 시절···. 낯선 단어다.
낯선 단어. 낯선 감각. 페르난데스는 문득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묵빛 대검, 그 검신에 작게 쓰여 있는 자신의 이름. 다인.
다인, 용의 말로 연민이라. 깨끗하게 닦인 검신이 거울처럼 그의 얼굴을 반사했다. 왕관을 쓴 중년 사내의 얼굴이 비쳤다. 강인한 턱선과 굳건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 다인 왕.
‘꿈이군.’
다인 왕의 기억 속에 들어왔다. 페르난데스는 빠르게 자신의 상황을 점검했다. 해질녘 풀잎의 눅눅한 냄새까지 정교하게 느껴졌지만. 자신의 심장에서 맥동하는 핏물이 여실히 느껴졌지만.
이건 꿈이다. 나는 왕이 아니야. 나를 잊어선 안 된다. 나를 잊어선.
두 사람의 영혼이 섞인 그 날 이후부터, 그의 영혼이 점차 변해가고 있었다. 원치 않는 일이다. 그는 혀를 찼다.
“폐하, 왕자 전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오, 그래. 그래.”
그의 입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렀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흘러가는 상황에, 잠시 관망하기로 했다.
-다각, 다각.
곧, 말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스 왕자가 석양을 등지고 서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가 그림자 속에서 반짝거렸다. 어릴 적 그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 같은 모습에, 다인 왕은 맑게 웃었다.
“아들아.”
“네, 폐하.”
-턱.
왕자가 말 아래로 내려섰다. 그가 입은 중갑엔 아직 핏물이 녹처럼 끼어 있었다. 전장에서 복귀하자마자 나를 찾아왔군. 훌륭한 효심이야. 다인 왕은 내심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직접 왔더냐? 조금 더 쉬어도 좋았을텐데, 짐이 직접 네 처소로 찾아가도 좋았다.”
“아닙니다. 폐하. 어찌 그러겠습니까.”
“네 마음이 기꺼우나, 아쉽구나. 부자간에 술 한 모금 나눌 시간도 부족하느냐?”
그의 말에 엘리아스가 웃으며 마구 안에서 수통을 꺼냈다. 퐁,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수통의 뚜껑을 뜯은 왕자는 곧 그것을 왕에게 던졌다.
무례한 행동이지만, 왕도, 왕자도 흔쾌히 웃었다.
“아버지, 여기에 석양을 벗삼아 마시는 편이 운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은 수통을 낚아채고 냄새를 맡았다. 보리주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났다. 그는 껄껄 웃으며 한 모금 목을 축였다. 독주가 목젖을 타고 짜릿하게 흘러 내렸다.
“이 고얀 녀석. 행장에 수통을 술로 채워?”
“하하, 아버지. 어찌 취기 없이 전장에 나설 수 있습니까.”
“마구스들이 알면 경을 칠 일이다.”
“원탁 기사들이 알면 같이 나눠달라 부탁할 일이죠.”
“하하!”
마구스들과 원탁 기사들. 그 사이에서 완벽한 치세를 펼쳤던 다인 왕과는 달리 그의 아들은 기사에 더 가까웠다. 왕은 그 사실이 내심 불안하긴 했다. 기사의 힘으로 국가를 일으키는 것은 가능했어도, 검과 창으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구스들의 지혜와 조언, 그리고 행정 능력이 없다면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왕은 가라앉은 눈으로 수통을 바라보다가, 왕자에게 건넸다.
“마법사와 결혼하거라.”
“···엑?”
왕자는 한 모금 마시다 말고 컥, 하며 술을 흘렸다.
“그 책상물림 곰팡내 나는 샌님들 사이에서 어찌 사자의 핏줄이 이어지겠습니까?”
“그 샌님들이 나라의 기둥이다. 아들아. 너에게 부족한 것은 힘이 아니라 지혜이니.”
“자식의 혼사엔 신경 쓰지 않겠다 공언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페이른 그 잡것들이 감히 널 데릴사위로 데려가겠다 하니 한 말이었고···.”
왕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젠 힘으로 대적할 외적이 없다. 자신의 대에서 피와 화염의 시대는 끝이 날 것이고, 이제 나라에 필요한 것은 전쟁 군주가 아닌 현군, 그리고 명군이다.
왕자는 전란의 시대에 태어나 적응한 인물이다. 그 나이대의 젊은 기사들은 열성적으로 이 소탈한 왕자를 지지했지만, 지금 시대에 필요한 왕의 덕목으로는 부족했다.
지금은 사자가 내달릴 필요가 없는 시대니까. 양떼를 지키는 일은 번견에게 맡기고, 이제는 독수리처럼 군림해야 하는 때였다.
“내 진즉 봐둔 규수가 있다. 하이 마구스 메를린의 여식이다. 너도 보면 좋아할 거야. 언제까지 길가의 꽃이나 따고 다닐 생각이냐? 내가 네 나이였을 때엔···.”
“아, 아! 아버지! 정말 지금 원로회 꼰대들 같으십니다!”
“너는. 이놈아. 너는 아비에게 그게 무슨···.”
내가 너무 아들을 오냐오냐 키웠던가? 다인 왕은 당황 속에서 진절머리 치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왕을 향하기에도, 제 아비를 향하기에도 과하게 무례한 행동이었다.
저 젊고 활기찬, 혈기왕성한 모습에 젊은이들의 지지가 대단했지만···. 그 또한 저랬던 때가 있었지만.
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칼을 쥐었다.
“칼을 뽑아라.”
“···네?”
“자식 교육 시간이다.”
“···갑자기요? 어. 어, 아버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저 이젠 봐주지 않습니다?”
“고얀놈.”
-스르릉.
풀 냄새가 났다. 석양이 하늘을 달구는 마지막 시간 특유의 냄새가. 지는 태양 아래로, 이제 저물어가는 기사의 검이 빛났다.
아들아, 새 태양은 네가 될 것이다. 내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이 더 남았지만.
슬프구나. 우리의 삶은 단명하니.
두 기사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짙은 쇠 냄새를 흘렸다.
*
“술 더 내놔라.”
“거 아버지 왕이나 되신 분이 무슨 말투가···.”
“마구스들처럼 말하지 마라. 아들아. 짐은 왕이다.”
“하여간 애가 된다니까요.”
땀에 푹 젖은 두 기사가 초원에 주저 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릿한 손목을 풀며, 다인 왕은 아들이 건네는 수통을 쥐고 벌컥 들이켰다. 수염 끝에 흘러내린 술이 한 방울 스며들었다.
“허, 달구나.”
“하하, 아버지. 그러면 이제 아들 혼삿길엔 관여 않는 걸로 결정 된겁니까?”
“···봐 준거다.”
“공간을 베어 내시던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짐이 유일한 후계자를 죽이겠느냐? 당연히 네가 막을 수 있는 수준으로 베었다.”
“···네, 아버지. 뭐, 그렇다 칩시다. 그럼 아들 결혼도 막을 수 있는 수준으로만 간섭하시는 걸로?”
왕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아찔한 알코올 부즈가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피가 홧홧하게 달아 올랐다. 땀을 흘려 차갑게 식은 몸이 오히려 기분 좋았다.
젊은 시절, 전장을 내달리던 때에도 그는 그의 가신들과 이렇게 뒷풀이를 하곤 했다. 즐거운 기억이다.
“마음에 찬 여인이 있더냐?”
“···레나타. 그 아이와 요새 만나고 있습니다.”
“그건 뉘 집 여식이냐?”
“제 침소를 정리하는 시종입니다만.”
“···어휴.”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아찔했다. 덜컥 아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마구스들이 단체로 거품을 물고 발작하게 될 것이다. 자칫 자신이 일찍 죽게 되거든, 그 아이를 암살하려 들지도 몰랐다.
마구스와 원로회 사이에서 자신의 아들은 크게 인기가 없었으니. 자신의 핏줄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직 그의 권력이 굳건하지 않았다면 왕조 자체가 뒤흔들렸을 것이다.
어린 것아. 어린 것아···. 왕의 늙은 눈엔 슬픔이 서렸다. 아직 너무 철이 없었다.
“원정을 떠나라.”
“어디로 갈까요?”
원정이란 말에 왕자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즉답이었다. 낡고 고루한 왕실에서 정치 싸움을 하느니, 차라리 칼밥을 먹겠다는 뜻이다. 왕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는 수통을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공을 세워서, 그리고 함께 원정을 떠난 가신들과 함께 지지 기반을 다져서 돌아오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자신이 버틸 수만 있다면.
샤일드시여, 가호하소서. 어머니, 왕가를 가호하소서.
“어디든. 네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곳으로. 네 이름 아래 복종하는 기수들을 모아서 떠나라.”
“오, 네! 가신단을 꾸려보겠습니다.”
왕자는 활달하게 웃었다. 그 티 없이 맑은 눈을 바라보며 늙은 왕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 아이가 언제고 밝게, 언제나 즐겁게. 이 세상의 밝은 부분만을 바라보며 살길 바랬다.
그래,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 그는 하얗게 타오르는 별을 바라보았다. 술기운에 별무리가 흔들렸다.
그는 말의 뒷목을 쓰다듬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젊고 어리다. 전쟁 중에 태어난 아이가 저토록 해맑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제 어미의 영향이 컸겠지. 나는 저 아이를 키우는 데에 일조한 것이 적으니.
그러니 아들아.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구나. 네 삶을 저버리지 말고, 어디로든 떠나거라. 네가 어디에 있던, 네가 돌아올 자리는 내가 준비해 두겠다.
달이 떠오르고, 찬 바람에 풀이 누웠다. 왕은 칼을 짚고 일어섰다.
*
“흐···.”
페르난데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났다. 그는 황급히 눈가에 손들을 올렸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전신 혈관에 맥박치는 성자의 신성과 꿈틀거리는 디모니카의 근육까지.
나는 왕이 아니다. 나는 페르난데스야. 나는 페르난데스야.
아련하게 왕자를 바라보던 것은 자신이 아니다. 영혼이 섞인 이후 이따금씩 데인 왕의 기억을 읽고는 했지만, 이 정도로 깊숙하게 그의 경험이 녹아든 적은 없었다.
검, 검. 검이 필요하다.
그는 더듬거리며 머리맡을 만졌다. 흑마법사로서 살아가던 시절, 그는 언제나 단검을 그 아래 두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이래선 안 된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손을 거칠게 휘둘러 주위를 더듬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시야가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사물이 뿌옇고 흐리게만 보였다. 불안했다.
-턱.
그때 가느다란, 그러나 굳건한 손가락이 그의 손을 겹쳐 쥐었다. 따듯한 손이었다. 페르난데스가 멈추자, 손가락이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은공. 괜찮습니다. 은공.”
“···키르하스?”
“저 여기에 있습니다. 은공.”
그제야 페르난데스는 점점 잔잔하게 가라앉는 심장을 느꼈다. 적어도 지금 적지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군. 수감된 것 같지도 않고. 그는 뿌연 머리를 애써 흔들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동자가 걱정을 가득 품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여긴 어디지?”
“샥시시의 은신처 중 하나입니다.”
“얼마나 지났지? 어떻게 된 거야?”
“···은공께서는 더 쉬셔야 합니다. 정신을 잃으신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어요.”
“한달?”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전성기 시절의 마법을 다루던 것이었다. 생명을 불태워 맺은 마법, 급격한 노화에도 전능감에 중독되어 날뛰던 모습이 떠올랐다.
“거울을 줘.”
“···네?”
“거울. 아무거나.”
“네. 은공.”
키르하스는 곧 낡은 청동 거울을 가져왔다.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얼굴을 비쳤다.
늙은 기사왕도, 나이 든 흑마법사도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 안에는 흔들리는 푸른 눈을 가진 20대 초반의 남자가 보였다.
적어도 늙어 죽는 순간에도 불사의 축복이 발동된다는 뜻이군. 인위적으로 늙는 것은 가능해도, 축복 자체가 영생을 보장한다는 뜻인가?
부상에 의한 사망을 제외하고, 자연사에 가까운 노화도 돌이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거울을 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흰 머리가 자라나 있었다. 제법 크게 한 움큼, 왼쪽 이마 끝에서.
‘페이자쉬.’
-그래. 정신이 좀 드나?
‘이거, 제약일까?’
-그렇겠지.
불사의 축복은 무한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어떤 축복도 영속적일 수 없었고, 불사와 같이 강력한 축복일수록 휘발성이 강했다. 베이타서스의 축복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검은 머리칼은 자신이 소모한 불멸성에 남은 잔량이라고 봐야 하겠지. 이 흰머리는 그 백레시이고.
페르난데스는 거울을 내려놓고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곧고 강인했지만, 짙은 피로감에 찌들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손을 움켜쥐고 있는 키르하스의 거친 손가락을 느꼈다.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내가 쓰러진 이후부터 설명해 줘.”
“···전황이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은공.”
키르하스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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