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난세 도래 >
*
“전황이 이상하게 흘러가···?”
페르난데스의 메마른 입술이 비틀리며, 갈라진 목소리가 흘렀다.
한달 간의 혼수상태는, 언제나 만전을 유지하는 디모니카의 항상성마저 흔들어 두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몸과 정신이 모두 바스라지기 진적까지 몰려 있었다.
전신에 흐르는 힘이 미약하다. 키르하스는 재빨리 컵에 물을 따르며 그에게 건넸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목을 축였다.
차가운 수분이 갈라진 목젖을 적시며 짜릿하게 뇌수를 일깨웠다. 천천히, 천천히. 스펀지처럼, 또는 사막처럼. 게걸스럽게 물을 들이키며 그의 감각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의 기억까지도 섬세하게.
잊고 싶었던 트라우마들마저도, 그림자 안에서 솟아올라 망막 너머에 잔상으로 남았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흔들렸다.
“음, 작전 상황실에 알리겠습니다. 모두들 은공의 귀환을 기다리···.”
-턱.
“···은공?”
뒤로 돌아서려는 그녀의 팔을, 페르난데스의 손이 움켜쥐고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푸른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은공.”
“잠시.”
페르난데스는 숨을 고르며 속삭였다. 이게 현실이야.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곳이 현실이야. 한달 간, 그는 데인 왕의 기억에 녹아 무너지고 있었다.
화목한 가정, 따듯한 미소, 자신을 존경하는 아들. 자신의 말에 복종하며, 또한 기꺼이 자신을 숭배하는 가신들.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전생에 그토록 가지고 싶었으나,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질투했다. 동경했다. 데인 왕의 기억을 바라보며, 그저 관망하며. 때론 그 감정과 촉감을 공유하며.
-우리는 표류자들이구나, 각자의 시간에서 떠나 먼 곳에 왔어.
‘그렇소, 아벨. 정말로.’
그의 해도는 북극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은공.”
“잠시만, 키르하스. 잠깐이면 된다.”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두 번 죽인 아비가 어찌 그 광경에 허물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날 이후 그의 두 눈은 메말라 버렸지만, 그렇다고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의 심장에, 그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는 여전히 피를 울컥거리고 있는데도.
키르하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슬픔과 애통함, 갈망이 장절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떤 과거를 짊어지고 있을까. 이 젊은 기사는.
그녀의 눈엔 페르난데스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짙푸른 색 비단이 깔린 길이. 지금 그 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 여기에 있어요. 은공. 제가 항상 당신 곁에 있습니다.”
그녀는 기꺼이, 이 사내의 닻이 되어 주기로 맹세했다. 침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페르난데스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사륵.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이 페르난데스의 어깨 어림에 흩어졌다. 톡, 하고. 그녀의 따듯한 이마가 페르난데스의 이마에 맞닿았다.
페르난데스의 예민한 후각에 키르하스의 체취가 잡혔다. 시원한 하늘과 바람을 닮은 살 내음. 그 청량한 향기에 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동자가 그의 눈 바로 앞에 있었다. 키르하스는 얼굴을 붉히며 살짝 멀어졌다. 머리칼이 차양처럼 늘어지며 흩어졌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혹은 항상 신랄하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한 순간 부드럽게 휘어진다. 키르하스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턱.
“고맙다.”
사륵, 하고 머릿결을 쓰다듬는 거친 손이 느껴졌다. 키르하스는 귀를 뒤로 눕히며 눈을 감았다. 잠시 그녀의 목에서 갸르릉 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신파는 끝이냐?
‘그래. 이제 끝이야.’
-정신은 좀 들고?
‘다행히, 아직 내가 누군지는 알 정도로는.’
-하긴, 하기야. 하하. 우린 언제나 제정신은 아니었지.
키르하스의 너머에서, 페이자쉬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고 손길을 느끼는 키르하스를 내려보고는, 다시 눈을 올려 페이자쉬를 바라보았다.
‘휴식은 우리에게 필요한 요인이 아니야. 페이자쉬. 육신은 소모품에 불과하지.’
-이젠 다소 귀한 소모품이지만.
페르난데스는 부드럽게 키르하스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균형감이 마뜩치 않았다. 여전히 몸이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다.
“검을 다오.”
“네, 은공.”
페르난데스의 몸에 갑옷과 무구를 입혀 주며, 키르하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잠시간의 휴가는 끝이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한달이나 쉬었으니.
정신이 무너지고, 육신이 허물어져도. 그는 평생 안주하며 살지 않았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키르하스는 문가에 조용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 곁으로, 페르난데스가 걸어 나갔다.
*
샥시시의 작전 상황실은 혼란스러웠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전서구와 전령, 그리고 마법적 통신과 대마법 관측소의 파발. 그 모든 정보가 혼잡하게 얽혀 작전 지도에 실시간으로 반영되고 있었다.
사디아를 포함한 샥시시는 이 자리에 총 다섯. 그리고 그들을 보조하는 열세 명의 작전 장교들이 지금 이 상황실의 수뇌부를 이루고 있었다.
“십자구호기사단 진영에 군기가 모이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정보 습득 시간은?”
“세 시간 전입니다!”
“지금쯤 교리수호회 군단이 라비라타 왕조 측으로 진군했겠군. 무시해.”
샥시시들은 작전 지도에 그려지는 복잡한 도형을 노려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지난 한 달간, 단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
습득한 정보에 한해, 습득 시점에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고대 유물 지도, [넬로스의 눈]. 샥시시의 작전 지부에 비치된 이 거대한 지도는 그 날 이후로 깨어진 토기 그릇처럼 어그러졌다.
교리수호회의 십자구호기사단, 동부왕국 연맹 기사단. 레바인테르 제국의 제 1, 2, 3, 4 전초 기지, 라비라타, 아포타자르, 투탄 가르텝, 콘클라베 삼 왕조. 키르자드 술탄국, 거기에 수인 호족 연합까지.
서부 대황야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단순히 서부와 동부를 대표하는 두 연합군의 전쟁이었던 50년 전쟁은 극적인 종막을 맞이했다.
사디아는 이 난장판을 내려보며 피로한 눈을 쓸어 만졌다. [모사트 시의 봉화]라 불리는 그 날의 사건을 기점으로 전황은 단 한 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카오스 상태에 봉착했다.
사방에선 망자들이 일어나고, 만신전 교회가 갑작스레 성전을 선포하고, 동부왕국에선 눈을 붉히며 기사단을 급파하는 상황. 이는 암수와 전술을 담당하는 샥시시로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겨, 경. 여기는 출입 제한 구역···. 윽!”
-쾅!
묵직한 것이 문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감히 샥시시의 사령부에서 난동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사디아의 눈이 날카롭게 뜨였다. 샥시시들은 제각기 무기를 잡아 들고 문을 노려 보았다.
-드르륵.
곧, 문이 열렸다. 묵빛 대검, 무기질적인 회색 갑옷.
-절그럭.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힘 있는 한 걸음. 두꺼운 부츠가 바닥을 밟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걸음에 흔들리고, 그 사이에서 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알베르트.”
사디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언제, 어떻게? 한달을 혼수 상태에 빠져 있던 사내가 어떻게 이렇게 멀쩡히 걸어 나왔단 말인가?
이 무례한 행동에도, 샥시시 중 그 누구도 감히 먼저 나서지 못했다. 알베르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들 모두 이 사내가 누구인지 깨달은 것이다.
[모사트 시의 봉화] 사건. 홀로 레바인테르 제국의 대마법 전력을 막아내 도시를 구한 남자. 그리고 홀로 콘클라베를 섬멸한 사내.
원탁 기사이자 이단심문관. 알베르트.
“무례를 용서하길.”
“···아닙니다.”
오히려 키르자트의 샥시시로서 그들은 이 젊고 난폭한 기사에게 감사를 표해야 했다. 사만 명이 거주 중인 평화로운 상업 도시를 혼자 힘으로 구해낸 사내였으니.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이 사내를 마냥 기꺼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금 혼란에 빠진 이 전쟁에서 그는, 일종의 태풍의 눈과 같은 사내였으니까.
가면을 쓴 샥시시가 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 들어설 자격이 없소. 이단심문관.”
“자격?”
그 말에, 페르난데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건틀릿을 쥐락펴락 하며 사내를 노려 보았다.
“내 가신에게 익히 들었지. 지난 한달 간 나와 내 가신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말야. 어째서 내가 포로 대접을 받고 있지?”
“···우리는 혼수 상태에 빠진 귀하를 거두고 치유했소.”
“아니, 수감했지. 샥시시. 내가 아니었으면 모사트 시는 잿더미가 되었을 거야. 아니면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었거나.”
그 말에 사내가 발끈하며 탁상을 쳤다.
“귀공이 아니었다면 모사트 시는 그저 평화로운 상업 도시로 남았을 거요! 아이언사이드 놈들과 손을 잡고 수작질을 벌인 것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소?”
“샥시시. 그렇다면 왜 날 죽이지 않았지?”
“···.”
사내가 침묵하자, 페르난데스는 지도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전술 지도에 그려진 문양, 익숙한 십자검 문양이 눈에 박혔다.
만신전 교리수호회의 십자구호기사단. 그들의 문장이 보였다.
“그대들도 날 이용할 생각이었겠지. 전장의 혼란을 틈타 만신전과 거래할 상품으로 말야. 아닌가?”
“귀공을 편히 내어줄 수는 없소.”
“나 또한 지금 돌아갈 생각은 없다.”
페르난데스는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하며, 그는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그러니 이제 비로소 협상을 시작할 수 있겠군.”
“협상?”
“평화로운 협상.”
샥시시는 페르난데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평화? 평화를 바라는 자의 눈이 저렇단 말인가?
그의 눈에서 재와 화염, 피와 강철의 냄새를 풍기는 눈이었다. 전쟁의 지독한, 뜨거운 악취가 났다.
“평화를 위한 협상이지. 그대들이 바라는 것 아닌가. 전쟁의 종막을 말이야.”
“이 난장판을 어떻게 끝낼 수 있단 말이오?”
“극한의 혼돈은 곧 극한의 질서지.”
지도를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내심 앙헬라의 재치에 감탄했다. 콘클라베의 망령들을 일시에 깨워 전장을 흔들고, 교회의 성기사들까지 끌어들여 이젠 숫제 종교 전쟁에 가까운 양상이 되었군.
모사트 시의 실패로 정치적 부담을 질 수 밖에 없었던 앙헬라로서는 최선의 수였을 것이다. 판도 자체를 흔드는 것이.
그러니, 내 직접 도와주지.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지도의 한 귀퉁이를 짚었다.
“호족 연합과 협상 테이블을 잡아.”
난세를 원한다면 기꺼이 장단에 맞춰 주지. 오히려 더 크게 불꽃을 피워 올려 주마.
난세는, 페르난데스에게 있어서 더 없이 익숙한 영역이었다.
*
-톡, 톡.
-톡.
-툭.
베오른은 자신의 눈 앞에 놓인, 보고서를 묵묵히 읽으며, 습관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점점 더 강하게.
-콰직.
두꺼운 원목 테이블에 균열이 일어났다. 베오른은 곧 손가락을 떼고, 외눈 안경을 벗어 천천히 닦았다.
“우리는 속세의 분쟁에 완전한 중립을 표방한다네, 제피스 형제.”
“압니다.”
“그러니, 우리는 공식적으로 속세에 전력을 투사해서는 아니 되네. 그런 전례를 남길 수야 없지 않겠는가.”
“압니다. 수도원장님.”
제피스는 베오른이 내려 놓은 보고서를 집어 갈무리했다. 그 모습을 보며 베오른은 눈가를 쓸었다.
“우리 성자 형제가 정말 전사했겠는가?”
“···아닐 겁니다.”
“아이언사이드의 짓이겠지.”
“네, 수도원장님. 정황상 확실합니다.”
-드르륵.
베오른은 의자를 뒤로 밀어 등받이에 길게 기댔다.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촛불의 빛 밖으로 물러나, 그림자 속에서 베오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종교 재판 사법권, 이단 즉결 처형권, 구마용 군이양지권, 교단성사 대리지권. 제피스 시라다스트 형제. 만신전이 보장하는 위 권한으로, 이단 조사를 실시하게.”
그 말에, 제피스는 아무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로 분노가 흘러 떨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감히 이단심문관을 속세의 정치 논리로 암습하려 한 이단들에게 보여주게. 만신전의 분노를. 형제. 모든 형제들에게 전하게. 이 시간 이후 비공식적, 자발적인 이단 조사를 허가하겠네.”
“막토.”
“막토 수페를라우도.”
-끼이익. 탁.
문이 닫혔다. 베오른은 한참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언사이드, 그레이서클, 샥시시, 키르자트와 제국의 전쟁. 또는 네크로폴리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감히 이단심문관을 공격하는 이가, 이단이 아닐 리가 없으니.
악마를, 이단을, 마녀를 불태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