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88화 (89/388)

< 88. 영웅의 씨앗들 >

*

“족장님!! 족장님, 해골 놈들이 몰려옵니다!!”

“그래, 알아. 올 때 됐지.”

황급히 막사를 들추고 뛰어 들어온 부족 청년을 바라보며, 바트라스는 턱을 긁적이고는 간단하게 행색을 정리했다. 부족장의 회의실에 모여 있는 장로들은 일제히 안색을 굳히고 있었다.

아니, 꼬리를 굳히고 있었다. 겁에 질린 개새끼들처럼. 바트라스는 그 모습이 불만스러웠다. 황제와 술탄이 벌이는 대전쟁 사이에서도 제 한몫 챙기는 것만 생각하던 야심가들이 갑작스레 커진 판에 덜컥 겁부터 먹고 보는 행태라니.

“해골 놈들은 뭘로 대접해야 하지? 그 자식들도 뭘 먹나?”

“···어···.”

“됐다. 대답하지 마.”

바트라스는 당황한 청년을 보며 혀를 찼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기개가 부족했다 기개가. 대황야는 먼 옛날부터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늪을 만들던 전장이었고, 수인 호족 연합은 법과 논리보다 논검을 즐기는 호걸들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더니, 이젠 이런 쭉정이들만 남았구나. 바트라스는 점점 힘이 빠져가는 근육을 탓하며 막사를 걷어 올렸다.

-쾅! 쾅! 쾅!

-챙!

-저 쪽으로 옮기라고 했잖아, 저 쪽으로!

-비켜! 이 빌어먹을 살쾡이들아!

부족의 장정들이 단상을 쌓고, 지반을 다지기를 한창이었다. 하늘은 빌어먹게도 맑았고, 태양은 언제나처럼 쨍쨍했다. 바트라스는 이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꼬리를 만 개 꼴이라니.

저 황무지 지평선 너머에서 뽀얗게 올라오는 먼지 구름을 보며, 실제로 꼬리를 말고 있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한심한 노릇이다.

“부족장님!!”

“그래.”

“저 놈들 너무 많이 몰려오는데요!? 이거 저희 다 뒤지는 것 아닙니까?”

“놈들 사절이 한 말 잊었어? 놈들은 협상이 가능한 것들이라고. 연회나 준비해.”

바트라스는 혀를 끌끌 차며 천천히 나아갔다. 그의 뒤로 장로들이 천천히 따라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떼처럼. 바트라스는 부글거리는 속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니들이 그러고도 대황야의 수인이냐? 어?”

“부, 부족장님.”

“뼈 밖에 없는 개자식들이 무서워서 꽁꽁 숨어가지고는! 내가 다 쪽팔리다 등신들아!”

바트라스의 사나운 말투에 청년들이 일제히 움찔 굳었다. 저 멀리, 아직도 지평선에 걸려 있었지만, 혹여라도 저 망자의 군대가 부족장의 말을 들었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바트라스가 그 꼴에 혀를 차고 있자니, 장로 하나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바트라스의 날카로운 눈이 휙 돌았다.

“뭡니까?”

“군기를 보게 족장. 저 놈들, 정말 평화 협정을 위해 오는 것이 맞나?”

“무슨 개 같은 평화 협정이야? 거래지.”

바트라스는 혀를 찼다. 장로의 말이 맞았다. 지평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색색의 군기들이 위협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바트라스는 빠르게 치솟은 깃대를 세다가 곧 포기했다. 척 봐도 위협이다. 거래에 있어서 보다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과시에 가까웠다.

놈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접경 지역 최전선에 위치한 바트라스를 건드린다면, 수인 호족 연합 전체가 적으로 돌아서리라는 것을. 그건 놈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투탄 가르텝. 상 아시트 제 2 왕조의 가장 위대한 파라오. 놈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바로 지척에 키르자트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놈들이 이제 수인 호족까지 동시에 대적하려 들 리가 없었다.

그러니 피를 보지 않고 손을 잡자는 것이겠지. 아주 좋은 조건으로, 아주 위협적인 논조로. 저 거대한 군세는 그를 위한 포석이다.

-부우우우···.

-부우우···.

저 멀리에서, 뿔나팔 소리가 울렸다. 흉통과 등골을 갉아 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곧, 놈들의 무리에서 한 무리의 전차들이 돌출해,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기도나 하시오. 장로님들.”

“···뭐?”

“제발 격이 맞는 놈이 나왔길 바라란 말이오. 제기랄! 저러고 그냥 하인 하나 덜렁 보낸 거라면, 우리한텐 최악 중 최악인 일이니까!”

바트라스는 위협적으로 칼자루를 움켜쥐며 외쳤다. 투탄 가르텝이 그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과연 부족의 평화가 얼마나 유지될는지. 지금 다가오는 저 휘황찬란한 해골 사절들의 지위에 달려 있을 테니까.

*

황야의 막사는 정오가 될 때까지 뜨겁게 달궈져, 그 안엔 오히려 습기가 가득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단단히 틀어 막힌 창고 안에서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부우우···.

저 멀리에서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름 끼치는 음색에, 여인의 고운 눈썹이 살풋 일그러졌다. 청년은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조금만 참아.”

“대장, 진짜 우리 여기서 무덤 파는 것 아녜요?”

“다행히도 말야, 무덤 안에 기어 들어가면 놈들이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던데?”

“으, 전 그 꼴 못봐요. 제가 시체로 일어나거든 목을 쳐주세요.”

“내가 어떻게 우리 귀여운 오른팔 모가지를 자르겠나?”

청년은 쾌활하게 웃었다. 그는 천이 둘둘 감긴 장대를 품에 안고 팔짱을 끼었다. 바깥의 긴장감과 메마른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감고는 유쾌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 참, 좋아요?”

“좋지 아무렴. 이제 곧 인데.”

“폐하께서도 참, 매번 이래. 우리 둘만 턱, 아주 그냥 턱! 아주 죽으라고 던져요 이런 사지에다가.”

“폐하께선 관대하신 분이니까, 그냥 우린 보상만 기대하자고.”

청년의 말에 여인이 빽 소리를 질렀다.

“명예로운 짐의 검들이여! 이거 한 마디 말이죠? 참 좋으시겠어요, 더 나은 세상 만든다고 목숨 바쳐 싸워대서?”

“암, 좋지. 좋고 말고.”

-두두두두···.

저 멀리에서 들리던 기마의 말발굽 소리가 어느덧 한결 가까워졌다. 청년은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계산했다. 말발굽의 리듬과 속도를 볼 때 열두 필. 땅을 박차는 소리가 사뭇 가볍다. 해골마인 탓인가?

재미있군.

청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천막 밖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들을 순서대로 정리해,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재능 이라기보다는 권능에 가까웠다. 청년은 천천히 감긴 눈을 떴다. 어두운 창고의 그림자 속에서, 새파란 눈이 반짝거렸다. 흥미, 유쾌함, 즐거움, 그리고 올바름.

선의(善意)가 길가의 들풀보다 못한 이 시기에, 찾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세이리, 내가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 뭔지 알아?”

*

“겁 먹지 마라! 놈은 혼자다!!”

페이자쉬는 이를 꽉 깨물며 연신 손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마법이 맺히고, 그의 충실한 하수인들에게 새로운 힘과 권능이 들러 붙었다.

칼림부르크 마법 학회는 그가 평생 이룬 역작 중 하나였다.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야심 찬 마법사로서, 이 학회를 창립하고 그 회장직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력을 쏟아 부었던가!

“아, 좋아. 한번 더 말해줘.”

“이 빌어먹을 자식!!”

“고마워!”

-후우우웅!!

놈의 창이 허공을 가른다. 호쾌하게, 허공을 내려 그으며. 창이 한 획, 허공을 살라버릴 때 마다 그의 하수인이 두 조각이 되어 공중을 날았다.

마법도, 함정도, 유혹도, 심계도···. 놈은 빌어처먹게도 우직하게 달려들어 그의 모든 계획들을 망치고, 허물고, 일그러트렸다!

저 빌어먹을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페이자쉬는 유쾌하게 웃는 사내를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깨물었다.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하하, 왜 넌 내가 가는 곳 마다 있느냐? 데인 왕국 출신이면서, 왜 이 먼 제국까지 건너왔어?”

“이번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해야지. 널 본 게 이제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올해로 마지막이다. 넌 혼자 와선 안 됐어. 내 최강의 마법이 이제 완성되니까!!”

“오! 기대되는데!”

“닥쳐!”

-쿠구구구궁!!!

제국 최강자. 신창, 황제의 눈···. 페이자쉬는 당당하게 웃으며 창을 휘두르는 놈의 얼굴을 보았다. 수많은 꼬리표를 달고 있는 빌어먹을 영웅 자식.

동시대, 제국은 물론이오 문명 사회를 통틀어 힘 깨나 쓴다는 강자들을 꼽아 보자면 반드시 한 손에 세어질 놈이다.

그런 놈이 꼭 빌어먹게도 결정적일 때면 튀어나온다는 것이 문제겠지만.

페이자쉬는 홀을 가득 채우며 치밀어 올라오는 거대한 마력을 느꼈다. 그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단숨에 놈을 죽이지 못하면 정말 묫자리를 파야 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정도의 마력이라면, 이번엔 어쩌면···.

*

“하.”

페르난데스는 번쩍 눈을 뜨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오랜 옛 시절 꿈이었다. 매번 어딘가의 영웅들에게 쫓겨 다니던 나약한 시절의 꿈. 칼림부르크라···. 참 추억이 많은 곳이었지.

페르난데스는 낡은 모포를 들추며 부스스 눈을 떴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고, 짙푸른 하늘은 먼 동쪽부터 천천히 밝아지고 있었다.

황야의 머나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마른 세수를 했다. 떨쳐내고 싶은 기분 나쁜 꿈이었으니까.

“일어났느냐?”

“···잘 잤소?”

“아니, 잠들지 않았다.”

모포를 반쯤 들추고, 아벨은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사륵, 미지근한 바람이 불 때 마다 그녀의 황금색 머리칼이 찰랑였다.

아벨은 곧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막의 밤은 아름다웠다. 하얀, 붉은, 노란, 파란. 온갖 색색의 별들이 진주처럼 반짝였다.

“이곳의 밤하늘은 보석상자 같아, 볼 때 마다 새롭구나. 이 광경을 보고 어찌 잠들 수 있겠느냐.”

“아, 용들은 보석을 좋아하지···.”

“대체 그 낭설이 왜 이리 널리 퍼졌더냐?”

아벨은 피식 웃으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보석을 싫어하는 이가 이 세상에 있더냐? 인간은 황금을 좋아하고, 고기를 선호하며, 강한 향신료들을 즐기고, 야행성 짐승들을 두려워한다. 어떠냐, 인간에 대해 잘 요약했느냐?”

“···할 말 없군.”

“그리고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할 뿐이다. 페르난데스. 이왕이면 살아있는, 그리고 타오르는 것으로.”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눈을 또렷하게 바라보며 짙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눈을 돌려 페르난데스의 등 뒤로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새벽의 사막은 은색으로 빛났다. 달빛과 별빛이 쏟아지고, 저 멀리 밝아오는 여명에 불타오르며 찬란하게도. 아벨은 점점 식어가는 모닥불을 불쏘시개로 쑤셔 불을 피워 올렸다.

검은 연기가 하늘거리며 솟아 올랐다.

“그래서, 저 아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더냐? 나는 도저히 이 너른 땅에서 길을 찾을 수가 없구나.”

“다행히도 제대로 온 듯 하오.”

새근거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키르하스를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따듯하게 웃었다. 그는 키르하스의 어깨어림까지 내려온 모포를 끌어 올렸다.

키르하스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 허우적거리고는 곧장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벨은 키르하스의 살랑거리는 꼬리를 바라보았다.

“···가여운 것.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 가족이 죽었던 곳을 다시 찾아오는 일이.”

“알고 있소. 아직까지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절절하겠지.”

페르난데스는 타오르는 동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사막의 한 귀퉁이를 억지로 잘라내 다른 그림을 붙여 놓은 것처럼. 명백히 이질적인 모습으로.

사막의 한 가운데에 울창한 수풀이 자라나 있었다. 그 너머에 있을 먼 과거의 신전을 상상하며,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딛고 일어설 것이오.”

바람이나 다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가 어떤 인물이 될 지 알고 있었으므로. 지금은 찬 밤바람에 칭얼거리는 수인 처녀에 불과해 보이더라도, 그녀는 굳건히 딛고 일어설 것이다.

서부 대황야의 방패. 수인 호족 연합이 배출한 불패의 영웅, 칼라니 씨족의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