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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91화 (92/388)

< 91. 죽은 신의 시련 (2) >

*

그의 인생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칠흑 같은 먹색, 공포에 질린 도주, 생존을 향한 몸부림, 악의에 가득 찬 심장.

그런 그에게 잠시, 한숨 돌릴 산들바람이 있었다면 그 바람의 이름이 아리아였다. 슬픔을 삼킨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그의 뒤를 따르던 여인.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걸음 걸었다. 그림이 변했다.

아리아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녀의 여린 몸은 거친 방랑과 추적, 그리고 도주를 견디지 못했다.

그녀는 항상 즐거운 것만 가까이 두고, 소박하지만 충실한 삶을 살았어야 했다. 그녀는 정녕코 그럴 가치가 있는 여인이었다.

모든 그림자에 악마가 울부짖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어금니가 부서질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쿠웅.

이젠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에도 전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의 감각이 뒤틀린 것이 아니었다. 디모니카의 힘줄, 그 강력한 구동근육을 모두 사용해도 무릎을 굽혀 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실제로, 한 발자국마다 이젠 묵직한 충격음이 복도를 울렸다. 마치 북소리처럼.

-쿠웅.

-쿠웅. 쿵.

심장이 혈류를 내뿜는 격렬한 소리가 귀까지 차올랐다. 혈액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 펄떡이며 피부에 붉은 울혈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쿵!

심박, 발소리, 전신에서 울리는 파열음. 그것들이 뒤섞이며 마치 북소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빠르고, 끈적하고, 강렬한 리듬이다.

-쿵. 쿵.

페르난데스의 정면, 저 깊고 끝 없는 복도를 가득 감싸고 있는 그림들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걸음에 맞춰, 북소리를 내며.

-쿵!

창공의 기사 파리안 데드리칸. 그렇게 불리는 영웅이 있었다. 황혼에 접어든 페이자쉬에게는 특별히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의 영웅.

그 시절 페이자쉬는 전성기의 세력을 구가하고 있었다.

오랜 마력 오염으로 뒤틀린 육신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에 반해 그의 마법과 힘, 그리고 하수인들은 일국을 위협할 수준까지 성장했다.

그때였다. 한 암살자가 그의 첨탑을 타고 들어왔을 때는. 병들어 죽어가는 아리아의 심장에 비수를 박아 넣고 유유히 떠나던 암살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는.

“아리아!!!”

그의 목에서 울렸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평소 페이자쉬는 결코 소리를 높여 외치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언제나 조용히, 늪지를 기어가는 뱀처럼 속삭였다.

그러나 그 순간, 페이자쉬의 병든 폐는 찢어지는 것처럼 큰 비명을 내질렀다. 침상은 피에 젖어 물들어 있었고, 그의 악마들이 바닥에 흐르는 피를 게걸스레 삼키고 있었다.

커튼이 밤바람에 펄럭였다. 암녹색 구름이 떠 있는 밤하늘이 그 사이로 비쳤다. 그 아래엔, 창백하게 질려 헐떡이는 아리아가 있었다.

“아리아, 제기랄. 꺼져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꺼져!”

“···선생님.”

아리아는 살점 섞인 핏물을 내뱉으며 헐떡였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흘렀다.

“말 하지 마라. 심장을 빗겨 갔어. 아직, 아직 괜찮아. 말 하지 마라.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내 아리아. 아리아.”

“선생님.”

아리아는 벌벌 떠는 페이자쉬의 손목을 잡았다. 그 가냘픈, 완고한 저항에 페이자쉬는 돌처럼 굳었다.

“내가, 내가 널 되살려주마. 내 반드시 너를···. 흡혈귀가 된다 하더라도, 리치가 된다 하더라도. 영혼만 남아 떠돈다 하더라도. 널 이렇게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아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후회가 되었나요···?”

“···아리아.”

“외로운 분. 이제 누가 선생님을 대신해 울어줄까요···.”

그녀의 차가운 손이 페이자쉬의 뺨에 닿았다. 쿨럭, 아리아의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페이자쉬의 심장에서도. 깊게, 크게.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아리아. 나, 날 위해서라면 살아다오.”

“저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후회했다는 그 날 저녁의 고백은, 거짓말이었어요. 아리아는 슬프게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페이자쉬는 다신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혈향 속에서 낯익은 냄새가 났다. 프레지아 꽃 향기였다. 페이자쉬는 가만히 서서 아리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오랜 실험과 지옥 마력의 오염으로 고장난, 건조한 눈에선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페이자쉬는 평온하게 잠든 아리아의 모습을 내려 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처럼 해맑게. 시체로 되살린다면, 망령이 되어 그에게 속박된다면. 그 뒤에도 그녀가 나에게 웃어줄까?

페이자쉬의 손에서 마력이 얽히고, 뒤틀리다가. 곧 사그라들었다. 그는 힘 없이 손을 내렸다.

“네 죽음을 존중하마. 아리아.”

-아우으···.

그 대신, 페이자쉬는 요람 밖으로 나와 흔들리는 작고 뽀얀 손을 잡았다. 따듯하고 말랑한 손이었다. 거칠고 비틀린 그의 앙상한 손가락과는 전혀 다른 손이었다.

그의 긴 삶은 곧 그의 영혼이 받은 고문의 시간과 같았다. 이제 그 역사가 한 줄 더 쓰여진 것일 뿐.

페이자쉬는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과 똑 닮은 짙푸른 눈동자를 내려보았다. 맑고 깨끗하며 눈물에 젖어 있는 그 작은 눈동자를.

“하···.”

손이 빠르게 얽히고, 곧 그의 손에서 작은 꽃 한 송이가 나타났다. 프레지아 한 줄기가 그의 손 아래로 늘어졌다. 그는 아리아의 차가운 가슴 위에 꽃을 내려 놓았다.

슬픔에 젖어 쓰러질 시간이 없었다. 그는 평생 안주하며 살지 않았으므로. 그는 아들의 몸을 들어 안으며, 방을 뒤로 돌아 나섰다.

*

“흐···. 흐으···.”

페르난데스의 입에서 단 호흡이 흘렀다. 그는 이제 거의 바닥에 기다시피 걷고 있었다. 그를 내리 누르는 무게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우드득.

발목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무릎이.

-콰득!

페르난데스는 급히 바닥에 칼을 박아 넣으며 몸을 지탱했다. 그의 눈이 벽에 닿았다. 벽화 속 노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기는 하얀 팔을 뻗어 복도의 끝을 가리켰다.

-죄인이여, 형틀을 향해 걸어라.

“오냐···!”

부서진 어금니 사이에서 피가 흘렀다. 퇫, 하고 뱉어낸 침엔 피와 이빨 조각이 섞여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다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림이 변했다. 복도가 뒤틀렸다. 중력이 어그러지고, 복도가 뒤엉키며 나선형을 그렸다. 페르난데스는 힘겹게 바닥을 짚어가며 그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

지금 떠올려보면, 아들은 보다 제 어미를 닮았던 듯 싶다. 페이자쉬는 자신을 향해 맑은 미소를 짓는 아이를 바라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점점 빠르게 자라났다. 그럴수록 페이자쉬는 자신의 육신이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의 아들이 그의 생명을 빨아가는 것처럼. 다행히도.

벽화 속 노인은 언제나 아이를, 꼬마를, 소년을, 그리고 청년을 꾸짖었다. 뒤틀린 손가락을 모질게 휘두르고, 폭언을 내뱉었다.

“아니야,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아니야, 아니야···. 난 단지, 단지 저 아이가 날 닮지 않길 바랬어.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

차갑게 뒤를 돌아 떠나가는 노인을 향해, 소년이 작은 팔을 들어 올렸다. 소년의 팔은 허공을 몇 번 쥐고는, 힘 없이 떨어졌다.

페이자쉬의 바람이 어떠했건, 아이는 오히려 더 강하게 자라났다. 제 아비처럼, 포기하지 않고. 그는 짙푸른 눈과 검은 곱슬 머리칼이 도드라진 청년이 되었다.

“아버지, 제가 이번엔 놈들의 본거지를 불태우고 왔습니다. 아버지···.”

아들은 두려움과 공포, 슬픔과 분노에 복잡하게 얽힌 눈으로 페이자쉬를 올려 보았다. 옥좌에 앉아 헐떡이는 노마법사는 혀를 차며 싸늘하게 아들을 내려 보고 있었다.

“···카라마르의 요새는 어찌 되었느냐?”

“아직, 아직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저희의 손으로 넘어올···.”

“쓸모 없는 놈.”

아들은 그 말에 움찔 떨며 멈췄다. 페이자쉬의 탁한 눈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아비는 그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저 오시할 뿐.

-킥킥, 킥.

어전에 늘어선 악마들이 일제히 그의 모습을 비웃었다. 아들은 잠시 손을 부르르 떨고는, 꼭 말아 쥐었다.

“다음 번엔,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은 것을 진상해 드리겠습니다.”

아들은 뒤를 돌아 떠나갔다. 곧 어전의 문이 닫혔다.

*

제 어미를 닮은 턱과 입술, 콧대를 바라보고 있자면. 페이자쉬는 아내를 지켜내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을 거울에 비쳐 보는 것 같아 무너졌다.

자신을 닮은 눈과 머리칼, 억센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페이자쉬는 아들의 미래에 놓인 고난과 가시밭길을 보는 것 같아 멀리했다.

아들은 그의 거울이었다. 그의 민낯과 비루한 영혼을 비추는 거울. 페이자쉬는 아들이 미웠다.

그의 시체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커흐윽···!!”

*

“커흐윽···!!”

페르난데스의 입에서 내장 조직이 섞인 핏물이 흘렀다. 폐부가 찢어져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걷고 있었다.

-콰득!

그 날의 기억이, 그 날의 감정과 색, 향과 감각이 그의 혀와 코끝을 맴돌았다. 벽화는 단지 기억을 되살리며 영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경험 전체를 그의 머릿속에 직접 구현하고 있었다.

“후욱···!”

-콰득!

다음 발자국을 내딛었다. 다시 한 번 더.

-콰득!

반쯤 기다시피, 칼날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걸어가며. 그의 얼굴 옆에 늘어선 대검의 검신이 그의 얼굴을 비쳤다.

그 묵빛 칼날 속에선 피를 토하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피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검신을 노려 보았다.

노인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

-끄으아아악!! 으아악! 아버지!! 아버지!!

끔찍한 절규였다. 시체로 되살아난 아들은 자신의 심장을 파내어 그것이 검게 죽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심장이 꺼내어진 뚫린 가슴을 바라보며, 그러고도 자신이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끄으으으··· 끄으으···.

그는 살더미가 될 때 까지 저 스스로를 파괴했다. 페이자쉬의 마력이 이어져 있는 한, 아들은 자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페이자쉬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두 번째 목숨을 끊어 주었다.

그날, 그는 아들을 두 번 잃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어진 아들의 살점을 바라보았다. 싸늘하게 식은 시체 더미에서, 페이자쉬는 우습게도 아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를 닮은 코, 입술, 턱선···. 이제 그는 그녀를 연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후회 한다. 아리아.”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시체를 만지며, 페이자쉬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자신을 향해 뻗어 오던 하얗고 작은 손가락을 떠올렸다.

한번만 더 잡아 주었어야 했다. 한번만 더 따듯하게 웃어 주었어야 했다. 아들아. 나는 너를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있지만.

네가 태어난 날을 기억한다. 네가 나의 품에서 식어가는 순간 조차도.

“후회해. 아리아. 후회하고 있다.”

페이자쉬의 마른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

페르난데스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물리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그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어 앉아 있었다.

복도의 벽엔 더 이상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일그러지지도, 나선형을 그리며 비틀리지도 않았다.

그저 쭉 뻗어, 그의 정면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 싸늘하고 조용한 복도의 한 가운데에서,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형틀에 올라라. 죄인이여. 네 죄악의 무게를 느껴라. 심판을 시작하겠다.

페르난데스의 앞, 저 먼 복도의 끝에 거대한 제단이 보였다. 마침내 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화르륵.

빛이 타올랐다. 페르난데스의 가슴과 등허리에서. 군신의 성흔이 명멸하기 시작했다. 불사, 불굴.

“그래.”

페르난데스의 눈이 치렁하게 내려온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푸르게 빛났다.

-콰드득.

한 발자국 더.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검이 빛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정면에 서 있는 자칼 신의 성상을 바라보았다.

자칼은 웃고 있었다. 놈의 황동 창이 보였다.

-쿠웅.

한 걸음 더. 발이 움직였다. 여전히 몸을 내리 누르는 중압감에 한 발 걷는 것 조차 힘겨웠지만. 멈춤 없이.

그는 결코 안주하며 살지 않았으므로.

이단심문관에게 심판을 내리겠다 선언하는 죽은 신을 향해서.

“내가 간다. 카단. 네 저주가 여기에서 끝이라면, 기도해라.”

아무 신에게나, 어떤 말이든. 간절히. 그 죽은 입술을 비틀어 어떻게서든.

이제 더 이상은 후회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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