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사냥의 신 >
*
자칼 신의 성상이 제단의 끝에 서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한 발씩 옮겨 나아갔다. 제단의 한 가운데에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녹슬고 낡은 천칭이 걸려 있었다.
천칭을 감싼 제단에는 상 아시트 제국의 고대 상형 문자가 그려져 있었다.
[네 죄악의 무게를 변호하라.]
어떤 은유도, 묘사도 없는 간결한 문장이었다. 페르난데스가 제단의 끄트머리에 잠시 멈춰 서자, 자칼 신의 얼굴이 움직였다.
-드르륵.
뽀얀 먼지가 성상의 주위로 흘렀다. 자칼 신의 눈이 페르난데스를 내려 보았다. 죽은 신의 파편에 불과했으나, 이미 대부분의 능력을 상실하고 그저 끈적한 저주로 남아 있었으나.
신의 존재감은 여실했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에 헐떡이며 제단을 올려 보았다.
-네 악의 무게를 견뎠구나. 네 영혼이 네 살점보다 무겁거늘.
자칼 신의 갈라진 웃음소리가 복도를 뒤흔들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럼에도, 한점 미동 없이 천칭을 노려 보았다.
-쿠우우웅.
천칭의 한쪽 끝에, 천천히 맥박 치는 심장이 나타났다. 검게 물든 늙은 심장이 느리게 박동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네 업의 무게에 무엇을 달겠느냐.
자칼 신의 눈이 비웃듯 비틀렸다. 페르난데스는 피가 말라붙은 눈으로 신을 노려 보았다. 곧, 그의 손이 천천히 수인을 짚었다.
-콰직, 콰직.
마법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얽혔다. 청동 왕좌의 회로를 타고 거친 마력이 흘렀다.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로 검은 헤일로가 타올랐다.
“후회.”
간단한 눈속임 마법이었다. 빈 손에서 허상을 덧씌운 꽃을 한 송이 만들어내는 것 정도. 지금의 그는 고작 이런 마법을 얽어내는 것에도 청동 왕좌의 잔량을 소비해야 했다.
그러나 상관 없었다. 기회가 있다면. 다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더, 더 잘 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마침내 주어졌다면. 그렇다면 상관 없었다.
설령 모든 마법을 잃는다 하더라도, 설령 디모니카의 육신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그건 그저, 처음 이 세계에 눈을 떴던 날, 숲 속의 아침으로 돌아간 것일 뿐일 테니. 애당초 그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영혼이 된다 하더라도. 그 무엇이든.
“후회를 달겠다.”
-네 악의의 무게를 심판하겠다. 필멸자여.
-끼이이익.
페르난데스의 마법이 만들어낸 프레지아 한 줄기가 천칭의 반대편에 떨어졌다. 심장의 반대편에. 둔중하게 맥박치는 검은 심장에 비해, 그 한 송이 꽃은 너무 가냘프고 가벼워 보였다.
-끼이익···.
천칭이 요동쳤다. 그리고, 곧.
천칭의 사슬이 수평을 이루었다.
자칼 신의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복도를 뒤흔들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를 내려 누르던 중압감이 점차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무릎이 펴졌다. 굽었던 허리도, 부서졌던 발목도 다시 복구되기 시작했다. 너무나 억세게 깨물어 으스러졌던 어금니마저도.
-회개자여, 네 삶이 곧 너의 형틀이니. 나아가라.
자칼 신의 웃음소리와 함께 천칭이 허물어졌다.
-쿠구구구궁!!
그의 눈 앞의 제단이 반으로 갈라지며, 지하로 향하는 길이 나타났다. 페르난데스는 얼떨떨한 눈으로 지하 통로를 바라보았다.
황동과 강철로 화려하게 장식된 통로가 보였다.
-화르륵!
길의 바닥에 작은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이 통로를 밝히며, 통로를 이루고 있는 금속 장식들이 일제히 빛났다.
익숙한 장식이었다.
“베이타서스···!”
베이타서스의 십자검이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멍하니 통로를 따라 걸었다. 그 뒤로, 찢어지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구도자여. 형틀을 이고 나아가, 네 이상을 이루라.
십자검 문양의 끝에 적힌 상 아시트의 상형 문자가 일렁거렸다.
[기도하라. 바라라.]
[어떤 말이든. 어떤 소망이든.]
[아무 신에게라도. 누구에게든.]
통로는 짧았다. 자칼 머리를 한 사냥의 신이 망자의 두개골을 내려 찍는 황동 판화가 거대한 문 전체에 그려져 있었다.
불길이 일렁거려, 판화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이 움직였다. 조각된 망령의 두 눈에서 푸른 불똥이 반짝였다. 자세히 바라보니, 보석이 박혀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자칼 신이 들고 있는 창에 비스듬하게 적혀있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하면, 얻으리라.”
-두쿵.
-끼이이익···.
문이 천천히, 위로 밀려 올라갔다.
*
신과 악마, 망령과 지옥, 천상에 대한 조각들이 벽을 타고 늘어서 있는 거대한 돔이, 페르난데스의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빛이 들어와, 이 거대한 홀은 화려하게 빛났다.
홀의 정 가운데에, 십자검이 가슴에 박힌 바싹 마른 미라가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면, 황금 가면 아래에 보이는 두개골은 분명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짐승에 가까운 긴 두상이었다. 가면 아래로 바싹 마른 피부 조직과 털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 벌린 입 사이로 빼곡히 늘어서 있는 날카로운 이빨들도.
자칼의 두개골을 가진 거인의 미라가, 심장이 뚫린 채 무릎 꿇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미라의 앞에 섰다.
-베이타서스의 성물이군···.
‘어째서 전생엔 보지 못한 거지?’
-우리가 알지 못했을 수도 있지. 군신의 네 챔피언을 소환하는 제물로 쓰였을 것 같군.
‘하긴, 그런 수준의 존재를 물질 세계에 소환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격이 필요했겠지.’
준신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매임에 틀림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복잡한 도식이 그려진 은빛 검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주위를 봐.
페이자쉬의 말이 들렸다. 홀의 천장, 거대한 돔 형태에 그려진 동상들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천상 전쟁 시절의 이야기들을 다룬 그림이었다.
지옥과 만신전,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용의 전쟁. 대륙의 형상을 바꾼 신화적 대전의 모습이었다.
‘고대 만신전에서 카단은 규율의 신이라고 했지.’
-죄악의 천칭을 다루었으니, 그 용의 말이 맞을 거야.
‘그리고 그 신의 유해가 베이타서스의 성소에 있다···.’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에 빠르게 정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베이타서스는 천상 전쟁 당시에도 활동하던 만신전의 유서 깊은 대신이었다. 고대 만신전 시절은 물론이고, 창세 시절 만신전에도 포함되어 있는 신이다.
그런 신의 신전에 규율의 신이 죽어 있다고? 페르난데스는 홀에 있는 동상들을 훑어보다가, 카단의 유해 바로 머리 위에 있는 비석을 보았다.
거대한 비석엔 상 아시트 시절의 상형 문자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있었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문자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여 태양이 그림자 뒤로 숨고··· 초원이 불타 사막이 되어···]
[그 숨이 다할 때 까지, 빼앗긴 신성을 되찾고자]
[죄악의 저울추를 바로 잡으며]
[···에게 간구하였으니.]
[신성을 잃은]
[목숨이 다할 때 까지, 사냥할 것을 맹세하였다.]
[악마를, 이단을, 그리고 마법사를.]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에 수많은 정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천상 전쟁 이래, 인류 문명의 도래. 그리고 뭄토의 탄생까지.
뭄토의 손에 의해 신성을 잃은 최초의 신. 규율의 신 카단. 신성을 잃고도 신이 죽지 않았다면, 한낱 필멸자로 전락한 그가 무엇을 생각했을까.
페르난데스가 알고 있는 전설에 따르면, 카단은 사냥의 신이었다. 그러나 카단의 성소로 향하는 복도의 벽화엔 흔히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 따윈 보이지 않았다.
망령과 인간들을 추적하던 자칼 신의 모습 뿐. 그렇다면 어째서 그가 사냥의 신이라 불리웠던가. 그런 전승이 남았단 말인가.
페르난데스는 침을 삼키고는 조용히 카단의 미라에 다가갔다.
“최초의 이단심문관. 이단사냥의 카단.”
죄악에 대한 심판, 그리고 이단 사냥의 의무. 여기 이 유적지는 최초의 이단심문청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어째서 베이타서스의 성물이 이 성소의 한 가운데에 박혀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뭄토에 의해 황무지로 변한, 한 순간에 몰락한 상 아시트 제국의 후예들이 영원히 이단과 싸우기로 맹세한 비밀 거점이었다.
숨겨진 입구를 통해 들어와, 죄를 저지른 이들을 천칭에 달아 시험하는 이 관문 전체가 이단심문청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베이타서스의 열쇠검에 손을 얹었다. 칼자루의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흘렀다.
-화르륵.
그의 가슴, 그리고 등허리에 박힌 성흔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디모니카의 혈액이 핏줄을 타고 맥박쳤다. 베이타서스가 내린 구성 인자들이 이 검과 공명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이 성소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손아귀에 느껴지는 강대한 신성을 움켜쥐며, 천천히 칼을 뽑아 올렸다.
은백색 장검이 뽑혔다. 그리고 곧, 카단의 유해가 가루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철컹.
유해가 허물어지며, 턱 아래 부분이 부서진 카단의 황금 마스크가 바닥을 굴렀다.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손에 쥐었다.
마스크에선 작고 미약한, 그러나 확연히 존재하는 영성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베이타서스의 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군···.”
*
키르하스와 아벨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복도의 벽화가 제멋대로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조명이 깜빡이는가 싶었던 그 순간에, 페르난데스가 사라졌다!
“어, 어, 어···?”
키르하스는 멍하니 페르난데스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 복도에 함정이 있었나요?!”
“잠시만.”
-콰아앙!
아벨은 대뜸 페르난데스가 있었던 자리를 걷어찼다. 강력한 일격에 순간 복도가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아벨도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도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으음···.”
아벨은 잠시 다리를 주무르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돌벽이다. 함정 같은 건 없는데···.”
“그럼 그냥 돌벽에서 갑자기 은공이 사라질 수가···. 이것도 마법, 뭐 그런 걸까요?”
“그것도 아닐 거야. 마력을 느끼지 못했어.”
그녀들은 멍하니 복도의 끝을 바라보았다. 정말 갑자기,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지다니? 키르하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닥을 살폈다.
평소에, 페르난데스를 향해 뻗어 있던 푸른 길이 이젠 온 복도 전체에서 빛나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방향을 잡을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아벨.”
“가보자꾸나.”
아벨은 인상을 찌푸리며 앞장서 걸었다. 복도에 갈림길도, 함정도 없는 이상.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면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