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별이 아름다운 밤 (1) >
*
“아벨! 피, 피 냄새가 납니다!”
키르하스는 대기 중에 섞인 희미한 혈향을 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단단한 석재 복도엔 어떤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저 멀리에서 혈향이 났다.
아벨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녀는 푸른 눈으로 저 멀리, 복도의 끝을 노려보았다.
“서두르자.”
“예.”
키르하스와 아벨은 더 이상 함정을 경계하지 않고, 복도를 주파하기 시작했다. 아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매번? 매번 이렇게 그 홀로 모진 곳에 뛰어드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일까.
홀로 나아가는 돛단배처럼. 망망대해를 건너는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스쳤다. 그녀는 표류자였으나, 언제나.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목적을 향해 영혼을 불사르며 걷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초조했다. 잠시, 아주 잠시라도 그가 쉴 수 있는 등대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 마음속에 어딘가 있을 북극성을 향해 홀로 나아갔다.
세월의 차이일까. 시대의 차이일까. 그녀의 발걸음은 그에 비해 너무 늦어, 그저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벨, 여기!”
키르하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상처가 있었다. 전투의 흔적이 아니라, 칼을 박아 넣었던 자국이었다.
“잠시.”
아벨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새겨진 흉터를 만졌다. 거칠게 갈라진 흔적에선 아직 돌가루가 묻어 나왔다. 세월의 흔적이 전혀 없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상흔이었다.
박힌 검의 폭과 깊이, 그리고 모양을 볼 때···. 연민검 다인, 그의 검이었다.
“어째서 이런 흔적이?”
“마치 짚고 간 것처럼···.”
키르하스는 잠시 흔적을 더듬다가, 곧 헉,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이 저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그곳엔 수 많은 흔적들이 찍혀 있었다. 점점이, 그리고 점차 더 좁은 간격으로. 마치 간신히,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간 것처럼.
칼날을 박아 넣으며 발을 떼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상태가 되었을까? 키르하스는 초조하게 눈을 빛냈다.
여전히 페르난데스를 향해 뻗은 길은 그 갈피를 모르고 퍼져 있었다. 그때, 수인족 특유의 예리한 후각에 미묘한 향기가 잡혔다.
꽃···?
어딘가 아련한, 당장 봄날의 미풍에서 스러질. 그런 향기가 났다. 점점 짙어지는 혈향 속에서, 그런 냄새가 났다.
-화르르륵!
“!!!”
그 순간, 바닥에 푸른 길이 불타오르며 나타났다. 페르난데스와 그녀가 다시 연결되었다. 키르하스는 귀를 쫑긋 세우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턱, 턱.
무겁고 진중한, 그리고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
저 멀리에, 오직 키르하스의 눈에만 보이는 그 푸르게 너울지는 길의 끝에서.
“은공···!!”
페르난데스가 걸어 오고 있었다.
*
-나를 섬겨라.
‘쉿.’
내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건 페이자쉬 하나로도 충분해. 페르난데스는 투덜거리며 황금 가면을 흔들었다. 가면을 흔들 때 마다 목소리가 일렁거렸다.
-나를, 섬겨라.
가면에서 들리는 자칼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절박할 지경이었다. 죄악의 시련에서 들렸던 자칼 신의 목소리와 사뭇 다른 논조였다.
‘하긴, 그건 과거를 반복 재생하는 그림자에 불과하긴 했지.’
-본체 쪽이 더 한심하군.
‘적어도 천 년은 넘게 살아남은 영혼이야. 당연히 어딘가 일그러져 있겠지.’
시련에서 간간히 들렸던 카단의 목소리는 그가 생전에 걸었던 저주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진짜 카단의 영혼은 이 가면에 잠들어 있었다.
‘대황야의 방패, 키르하스가 이 장소에서 얻었던 유물이 분명히 이게 맞아.’
그는 전생에 키르하스 하트테이커가 그렸던 삶의 궤적을 떠올려 보았다. 서부 대황야의 방패, 카라드스카르를 막아낸 인류의 대영웅 키르하스를.
그녀의 삶은 격렬한 투쟁과 생존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명백히 영웅의 반열에 들기 시작했던 기점은 칼라니 씨족의 비밀 거점에서 카단의 신앙을 부활시킨 이후부터였다.
사냥의 카단은 서부 수인 호족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수인족 신이었으니까. 그 상징성이 남달랐다.
“은공!!”
“아, 키르하스.”
마침 잘 되었군. 페르난데스가 피식 웃으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키르하스는 길게 드리워진 꼬리를 천천히 흔들고 있었지만, 아벨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섰다.
“···왜 그러시오?”
“복잡한 냄새가 나는구나.”
아벨은 천천히 다가와 페르난데스의 등에 매달린 장검과 그가 들고 있는 가면을 바라 보았다.
“신성의 냄새가 난다. 하나가 아니구나. 보여줄 수 있겠느냐?”
“아, 그렇지 않아도.”
페르난데스는 황금 가면을 들어 올렸다. 자칼의 형상을 화려하게 그려 넣은 황금 가면이 그의 손에서 흔들렸다.
사람의 두개골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탓에 착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절한 조치가 있다면 머리에 얹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큰 방호를 기대하긴 어려워도, 투구처럼 쓸 수는 있어 보였다.
“카단의 유물이구나.”
“그렇소. 그리고 심지어, 아직 살아 있는 유물이기도 하지.”
“살아 있다고? 카단이?”
“멜리실두르도 살아 있지 않았소? 한번 신성을 담았던 영혼은 쉽게 스러지지 않지.”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쉽게 스러지지 않는 탓에 그 오랜 세월의 광기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지만, 어쨌건 그 강대한 영혼이 이 가면 아래에 숨쉬고 있었다.
-나를 섬겨라···.
페르난데스는 낮게 속삭이는 가면의 말을 무시하며, 키르하스에게 건넸다. 키르하스는 가면을 받아 들더니 갑자기 꼬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엑?”
귀가 꼿꼿하게 솟아 오르고, 그녀는 혼란에 휩싸인 표정으로 가면을 이리저리 뜯어 보았다. 곧 그녀는 도리질 치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어, 은공. 이거 귀신 들렸는데요? 말을 걸어요!”
“뭐라고 하고 있어?”
전생의 주인에게 돌아가면 무언가 다른 말을 꺼낼까? 페르난데스는 그런 기대를 가지며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키르하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가면을 몇 차례 흔들었다.
“계속 같은 말만 해요. 나를 섬겨라···. 으, 소름 끼쳐요.”
“뭔가 달라진 건 없고? 기운이 난다거나 힘이 솟는다거나.”
“아뇨. 그냥 좀 무서운데요···.”
착용해야 효과가 발동하는 종류의 유물인가? 하긴, 페르난데스도 저 유물을 쥐고 있을 때 소리를 제외하면 특별히 다른 효과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귀찮게 되었군. 페르난데스는 가면을 지긋이 노려보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저걸 써보라고 하면 쓸까···? 그리고 저걸 써도 정신에 문제가 없을까?
‘쉽게 시도할 수는 없겠군.’
-어째서? 한번 시험 삼아 해보는 것이 좋을텐데.
‘키르하스는 우리와 달라. 저 아이의 정신은 소모품이 아니야.’
페이자쉬는 못마땅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고는 곧 사라졌다. 뭐, 어쨌든 이제 한 고비 넘겼으니까.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일단 나가서 잠시 야영이라도 준비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꾸나. 어디, 몸은 정말 괜찮은게냐?”
“걱정 고맙소만, 정말 괜찮소.”
아벨은 잠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타닥, 탁.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다. 키르하스는 황금 가면을 가지고 놀다가 잠들었고, 아벨은 언제나처럼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글과 폭포, 사막 한 가운데에 있기에 과히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사막의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정글은 오히려 신선하기까지 했으니까.
“네 말이 맞구나. 페르난데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던 아벨이 문득 말을 걸었다. 열쇠검을 바라보며 그 검신의 문양을 해석하던 페르난데스가 아벨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말이오?”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아쉬웠을 게다.”
그날, 인퍼머르의 밤바다에서 페르난데스는 죽어가는 그녀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사막의 밤, 그곳에서 바라보는 별들은 붉고, 파랗고, 노랗게 반짝인다고.
그러니 부디, 이 세상에 미련을 가져 달라고. 아벨은 모닥불에 비쳐 붉게 일렁이는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보았다.
“고맙구나.”
그녀의 푸른 눈이 불길을 담아 일렁거렸다. 정글 사이를 타고 흐르는 바람이 그녀의 긴 황금색 머리칼을 흐트러트려, 차양처럼 흩날렸다.
별과 바람, 그리고 달빛 아래에서. 아벨은 여신처럼 빛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부드러운, 따듯한 푸른 눈에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제기랄. 데인···.’
데인 왕의 영혼 탓일까? 아니, 정말 그럴까?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그 탓인지, 아니면 지금 이 젊은 육신에 흐르는 치기 어린 정열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아벨이 말했다.
“그래서, 그 꽃은 무엇이냐?”
“무슨 꽃 말이오?”
“네 몸에서 나던 향기 말이다. 꽃 향기. 네가 향수를 뿌렸을 리는 없고, 그 제단에 꽃이 피어났을 턱이 없으니.”
“아, 프레지아. 그 향이 그렇게 오래 남는 줄은 몰랐소만.”
페르난데스는 칼을 납도하곤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찔렀다. 화륵, 불꽃이 더 크게 일어났다. 그는 밤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나가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프레지아. 아리아. 나의 회한, 내 업. 나의 죄악. 그 꽃은 페르난데스의 모든 과거를 상징하는 죄악의 화관이었다.
‘페이자쉬.’
-왜 그러나.
‘이대로 우리가 세상을 구하고, 시간이 흘러 아리아가 태어난다면. 그런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
페이자쉬는 아무 말 없이 불꽃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아직 그럴 자격이 남아 있을까? 그녀의 곁을 지킬 자격이?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페이자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페이자쉬의 말을 들으며, 페르난데스는 모닥불에서 시선을 뗐다. 이제 각오를 다져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호의는 명백히 이성에게 향할 법한 것이었으니.
‘이쯤에서 선을 그어 두어야겠지.’
그녀의 마음이 더 큰 호의로 발전하고, 데인 왕의 영혼이 더 깊게 파고들고, 그의 젊은 육신이 뜨거운 체온을 그리워하기 전에.
잠시만 눈을 돌리면 물론 행복한 순간들이겠으나 그럴 순 없었다. 마음 편한 육욕과 애욕에 함몰될 수는 없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가 세운 그의 삶의 척도이자 대명제였다. 향상심이나 구도자의 고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마음가짐이었다.
“그 꽃은 아내의 것이었소.”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아벨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전혀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술 한잔 하겠느냐?”
“···술, 말이오? 그걸 어디서···?”
“이 순간에 그걸 먼저 확인하는 것은 멋이 없지 않겠느냐?”
아벨은 요염하게 웃으며 행장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퐁,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독한 알코올 향기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