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별이 아름다운 밤 (2) >
*
잔이 기운다. 달도, 별도, 구름들도 기울고 있었다. 디모니카의 간은 물질 세계의 거의 모든 독소에 대해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고, 알코올 정도로는 취하게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아벨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혼과 마력으로 자아 올린 육신이 고작 알코올에 취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이 선선한 밤바람과 모닥불, 그리고 저 멀리 하늘의 은하수가 그들을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별똥별 한 무리가 하늘 위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아벨은 안주 삼아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옛 시절 사람들은 별똥별이 질 때 영웅이 죽었다고 여겼다.”
“경험상 그렇진 않던데.”
“후후, 그렇지.”
아벨은 사려 깊게도, 굳이 페르난데스에게 영웅을 죽여 보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가리켰다.
“또한, 저 은하수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한 여신의 모유가 흘러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지. 자, 저 별과 저 별. 그리고 저 파랗게 빛나는 별이 보이느냐?”
솔직히, 밤 하늘은 별로 가득 차 아벨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벨레사스 자리다. 천상 전쟁 시절엔 난다 긴다 하던 녀석들은 저마다 별자리를 가지고 있었지. 내 별자리 또한 있느니라.”
“음···. 저 별에서 무슨 특별한 가호나 힘 같은 것을 받기도 하시오?”
“이런 낭만 없는 녀석.”
아벨은 한숨을 내쉬고는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페르난데스의 나무잔에 맑은 술을 다시 채워주며, 그녀는 달큰한 소리를 냈다.
“그 시절에도 너와 같은 인물은 흔치 않았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신비와 신성, 별과 달이 물질 세계의 현상에 귀속된 이 시대에 너는 비견되기 어려운 강자라는 뜻이다.”
“그건 내가 이 삶을 다시 살고 있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다.”
아벨은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타닥, 탁. 불꽃에 나뭇결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박자감 있게 흘렀다.
“단순하게 힘을, 단순하게 마법을, 또는 권능을 의미하자면. 신들이 노니던 시절에 인간의 힘으로 어디까지 닿을 수 있겠느냐? 힘, 마법, 권능. 그런 것들은 바람과 같아 쉬이 흩어진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면, 그렇다면. 그건 의지다.”
“의지?”
“삶에 대한 의지. 목적에 대한 의지. 필멸자들에겐 힘에 한계가 뚜렷하고, 불멸자들에겐 목적성이 흐릿하지. 그 시절 천상 전쟁이 어째서 일어났는지 아느냐? 후후,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난 이유가, 전쟁이 있었기 때문이라. 인과 관계가 뒤틀린 문장이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어쩐지 수긍할 수 있었다. 신은 관념적인 존재다.
신은 관념의 상징이다. ‘전쟁’의 관념. 베이타서스. ‘광명’의 관념. 샤일드. ‘세계수의 여명’ 멜리실두르.
그런 형이상학적인 존재들이 신화 시대에 대전을 벌였다면, 그것은 필히 대단히 관념적인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물질 세계, 관념에 목적성과 주관성이 생기는 그 세상을 가지고 싶다는 존재 증명의 욕망 탓이겠지.
페르난데스는 아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벨은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높낮이가 달콤하게 흐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시절에 신들이 가장 질투하던 존재가 바로 너와 같은 이들이었다.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이들. 불꽃을 향해 뛰어드는 나비와 같은 이들. 날개를 불태우며 자신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이들. 모든 필멸자들이 그러하진 못했지만, 그런 삶을 살았던 이들 모두 자신의 별자리를 남겼다.”
“나를 그 시절 영웅들과 동격으로 두고 싶다는 이야기시오?”
“네가 한 일들을 보거라. 페르난데스.”
엘프 왕을 죽이고 물질 세계에 그들의 신을 되찾아 주었으며, 죽은 용을 부활시키고, 고대의 망령들을 무찔렀고, 먼 옛날의 영웅에게 인정 받아 그 후계자로 공인 받았던 이.
엘프 왕의 대결계를 한 순간에 해주할 수 있는 마법사. 거인을 일격에 베어낸 기사. 샤일드의 가호를 받은 용사. 그리고 베이타서스의 성자.
아벨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속삭였다. 어쩐지 머쓱해져 페르난데스는 잠자코 술잔을 바라 보았다.
아벨은 그의 술잔에 자신의 술병을 톡, 치고는 웃었다.
“자, 적어도 내가 아는 인간 중 이런 존재는 거의, 거의 없었다. 먼 옛시절에도 이 정도의 업적을 열일곱 살에 이루어낸 존재는 없었지.”
“나는 열일곱이 아니오. 아벨.”
“알고 있다. 네가 전생의 기억을 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을 불태우며 나아가진 못한다. 페르난데스. 기억 하느냐?”
이 시대를, 불길의 시대라고. 아벨은 모닥불을 부지깽이로 콕, 찔렀다. 불꽃이 한 순간 반짝이는 불똥을 튀어 냈다.
“그러니 나아가거라. 더 붉게, 더 밝게, 더 강렬하게. 네 그 길의 끝에서, 내가 널 위한 별자리를 내 곁에 준비해 두고 싶구나.”
“아벨, 나는.”
페르난데스는 한결 더 가까워진 아벨의 눈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애욕, 그리고 열정, 열망. 그런 종류의 것들이 그의 핏줄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을 한 것이다. 고결하고 자존심 강한 용. 그녀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진심을 비추고 있는 이 순간에, 그는 거짓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크게 한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려는 그 순간.
-화륵.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도. 바람이 정글의 나뭇잎들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도.
그리고 기묘하게도, 시간이 멈췄다. 그의 크게 뜨인 눈에선 아벨의 금발이 쏟아질 듯 너울지는 것만 보였다.
푸른 눈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부드럽게 휘어지며 감겼다. 곧,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달콤한 술 냄새, 그리고 숨결이 그의 후각을 강하게 찔렀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따사로운 봄날 낮, 들판의 향기가 났다.
“하아···.”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가까스로 마른 입을 열려는 순간, 차가운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눌렀다.
“쉿.”
아벨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한낮 들녘의 하늘처럼.
“그 이상 말하면, 낭만이 없다.”
그러니 이 날 밤은, 페르난데스는 잠시 밤하늘을 바라 보았다. 별들이 만개한 거대한 장막이 펼쳐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날의 밤은, 별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래, 잠시만이라면. 페르난데스는 아벨을 바라보았다. 침착함을 되찾고 다시 보니, 그녀는 어쩐지 초조하고 긴장한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움찔, 하고 떨며 눈을 감는 그녀가 못내 아름다웠다.
“밤이 깊었소.”
“···어?”
“이만 주무시오. 내일 일을 준비해야 하오.”
“···너···.”
페르난데스는 큭, 하고 웃으며 모포 안으로 파고들어 누웠다. 아벨은 한참 씨근거리며 그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그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쉽지 않구나.”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고는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
바트라스는 남은 병력을 헤아리며 괴성을 내지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는 그의 눈 앞에서 실실 웃고 있는 인간 청년을 노려 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 아니오?”
“네 놈이 가만히 입 닥치고 있었으면, 적어도 그냥 혼자 빠졌다면 이 정도의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게다! 이 빌어 처먹을 자식.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아느냐!”
바트라스의 부족 전사들 중 반수 이상이 그날의 교전 중에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그의 부족은 이제 거의 회생 불가의 타격을 입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이 점거하고 있던 오아시스 인근 지역은 파라오의 군대에 의해 초토화 되었고, 그들은 이제 이 거대한 황무지를 방랑하는 유랑 부족으로 전락했다.
당장 내일 먹고 마실 식수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대뜸 사절을 암살하지만 않았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는 꿈틀거리는 손을 애써 억눌렀다. 저 놈을 죽일 수는 없었다. 지금 그가 기댈 수 있는 뒷배는 결국 제국 뿐이었으니까.
“너희 제국 놈들의 짓거리엔 신물이 난다. 빌어먹을!”
“잘 생각해 보시오. 그때 협상이 온건히 끝났더라도, 결국 다가올 종말을 유예한 것에 지나지 않소. 저 해골 놈들이 정말 그쪽을 살려둘 것이라 기대했소?”
“적어도 대비할 시간을 가질 수야 있었겠지!”
“극약처방이었다고 생각하시오.”
청년은 쾌활하게 웃었다. 달려드는 해골들을 모조리 분쇄하며 적 장수와 사절, 그리고 사제를 연이어 으스러트린 강자라곤 믿을 수 없는 경쾌한 웃음이었다.
“족장님. 피엘이 족장님을 찾습니다.”
“···그 아이가?”
부족장의 눈에서 분노가 잠시 사그라들었다. 피엘은 전투 중에 눈먼 화살을 맞고 전사한 부족 예언가의 유일한 딸이었다. 불쌍한 녀석. 부족 내에서 입지를 모두 잃고, 힘 없는 여인의 몸인 이상 그녀의 미래도 썩 밝지는 않을 것이었다.
“들라 하거라.”
“네.”
바트라스가 미소 짓고 있는 청년을 거의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 때, 청년이 지도를 툭 치며 말했다.
“이대로 동쪽으로 쭉 직진하다가, 북쪽으로 틀면 제국 제 2 전진기지와 만날 거요. 내 그 쪽에 끈이 있으니 걱정 마시오.”
“···빌어먹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투탄 가르텝과 전쟁을 벌인 이상 살기 위해서라면 제국에 붙어야 했다. 수인 호족 연합은 꼬리를 달고 온 그를 반기지 않을 것이고, 술탄국은 지금 다면전으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바트라스가 입술을 씹으며 지도를 노려보고 있을 때, 곧 천막의 휘장이 걷히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갈색 피부,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검은 긴 머리칼. 복잡하게 얽힌 장신구들.
부족 예언자의 딸 피엘이었다. 바트라스는 나날이 피어오르는 그녀의 미모에 한탄했다. 차라리 그녀의 외모가 추했다면, 또는 자신이 좀 더 젊었다면.
그랬던 저 아이의 미래를 책임지거나 구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였던 예언자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부족 내의 치기 어린 청년들이나, 지금 이제 접촉할 제국의 거친 병사들이 저 아이를 본다면, 분명 다른 마음을 먹을 것이 분명했다.
그 전까지야 자신과 예언자의 권위로 그녀를 비호하고 있었지만. 바트라스에게 피엘은 자신의 조카와 같아, 그것이 아쉬웠다.
“그래, 피엘. 어쩐 일이냐?”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뭐?”
생전에 예언자가 말하길, 자신의 딸에겐 예언 능력이 유전되지 않았다 했었는데···? 바트라스는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벌꿀색 눈동자가 담담하게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언 말이냐?”
“아니오. 계시 입니다. 부족장님. 계시를 받았습니다.”
“···개화했느냐?”
예언 능력이 개화해 부족 예언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면, 그녀의 미래에 깔려 있는 암운을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바트라스는 희망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부족장님.”
“···뭐?”
“저는 원래 보였습니다. 아버지께선 항상 제 눈을 믿지 말라 말씀하셨지만···.”
“하!”
바트라스는 그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언자의 삶은 고독하다. 그 천형을 자신의 딸에게 이어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겠지! 그러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한 지금,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수가 부족 예언자의 자리 뿐이었다.
‘생각보다 영악해졌군. 피엘.’
바트라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피엘이 멍청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기꺼웠다. 그래, 자신의 살 길은 자신이 찾아야 하는 법이지.
“말해 보거라. 네가 본 것을.”
“사냥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냥의 시간이라?”
“그러니, 저희는 남쪽으로 향해야 합니다.”
피엘의 눈이 흔들림 없이 지도를 내려보았다. 저 대황야, 호족 연합이 서 있는 그 중심부로.
“남쪽이라···.”
바트라스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리자, 잠자코 듣고 있던 청년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지금 저 꼬마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요?”
“적어도 이방인, 그것도 우리 부족의 반을 아작낸 이방인의 말보다는 믿을만 하지. 이 아이는 거짓을 말할 녀석이 아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청년이 피식 웃자, 피엘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냥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신께서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젊은 기사님.”
“내 종교에서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이단이라 말하지만, 뭐 좋다. 나는 이단심문관이 아니니.”
청년, 다리안 쉬라이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천막의 휘장을 걷었다.
“내 직접 네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