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데'카라즈 스웜 >
*
페르난데스는 모닥불을 비벼 잔불을 끄며 기지개를 폈다. 썩 만족스러운 잠자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간밤의 술자리로 긴장이 풀려 제법 쾌적했다.
-쏴아아아···.
근처에, 폭포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벨과 키르하스가 씻고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페르난데스는 잿더미에 흙을 덮어 자리를 치우며 손가락을 가볍게 풀었다.
검지, 엄지, 중지, 무명지, 약지. 다섯 손가락이 빠르게 얽히고 펼쳐지며 순식간에 다섯 번의 수인이 완성되었다. 물론 마력 회로를 깨우고 마법을 자아낸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일종의 준비 운동이다.
“후우···.”
페르난데스는 손가락을 꺾은 채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간단한 기능 점검 시간이다.
-키이잉···.
청동 왕좌가 암녹색 빛을 번쩍이며 손목에서 떨었다. 마력 회로에 자연 마력이 스며들어 가동되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겨 수인을 짚었다.
-화르륵.
그의 머리 뒤에서 검은 헤일로가 타오른다. 치렁하게 내려온 검은 곱슬 머리칼 사이에서 푸른 눈이 반짝이고, 순식간에 세 가지 수인이 허공에 맺혔다.
처음엔 [작성]. 그리고 [봉화]. 마지막으로 [새]. 빠르게 마법이 공중에 궤적을 긋고, 곧 마력으로 만들어진 화살 하나가 그의 손 끝에서 나타났다.
‘1.3초?’
-그래. 반응속도가 조금 빨라졌군.
‘이유가 뭘까?’
-손끝에 망설임이 사라졌어. 아마 카단의 짓이겠지.
‘하하. 페이자쉬. 마법을 맺을 때 우리가 망설였던 적 따윈 없었어.’
제 자식의 목숨을 끊어줄 때 조차도. 그에게 마법은 숨을 쉬는 것과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손에 쥔 화살을 공중에 날렸다. 화살이 긴 궤적을 그으며 사라졌다.
이제, 때가 되었다.
*
정오의 대황야는 놀라울 만큼 뜨거웠다. 이글거리는 열사에 아지랑이가 피어 올라 당장에 지평선조차 어그러지고 있었다.
아벨은 울렁거리는 낙타의 등 위에 어색하게 올라타 수통을 뜯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지도를 보는 페르난데스를 살폈다.
“그, 저 아래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도시가 하나 있지 않더냐?”
“그 도시는 지금 키르자트의 전초기지가 되었소. 여기부터 여기까지. 이 넓은 지역에 전선이 형성되어 있거든.”
페르난데스는 가까이 다가와 그의 얼굴을 살피는 아벨에게,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아포타자르 왕조와 키르자트의 전선이오. 남부 지역을 크게 둘러쳐져 있지. 우리가 그 도시에 들어가 검문을 받게 된다면,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소.”
“어째서?”
“내가 샥시시와 잠시 손을 잡은 것은 기밀이고, 나는 키르자트에 먹힐 만한 대외 신분을 가지고 있지 않거든.”
그가 이단심문청에서 아이언사이드로 파견될 때 받은 위장 신분은 동부 왕국 연합의 기사 신분이었다.
동부 왕국 연합이 레바인테르 제국과 손을 잡고 있는 이상, 그가 키르자트 술탄국의 도시로 대낮에 입성할 명분이 부족했다. 이 치열한 전장에서는 당장 구류되어도 변명할 길이 없었다.
가뜩이나 소모적인 다면전으로 신경이 예민해진 키르자트의 전선이라면 더더욱 피해야 했다.
“그러니, 우리는 호족 연합으로 갈 것이오. 서쪽으로 하루···. 음, 하루 반나절 정도 거리가 되겠군.”
“날아가는 것은 어떠냐? 이 멍청한 짐승의 등보다 넓고 아늑할게다. 지난 번에 한번 타 보지 않았느냐.”
“아벨.”
“윽!”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아벨의 머리를 흩었다. 아벨은 얼굴을 붉히며 움츠러들었다. 이런 취급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페르난데스는 너무 능숙하게 손을 뻗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오.”
“···비겁하구나.”
그 말에 페르난데스는 아무 대답 없이 다시 낙타를 몰아 앞으로 향했다. 타박, 타박. 낙타가 느리게 모래사장을 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르하스는 잠시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는,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곧 고개를 푹 숙이고 페르난데스를 따랐다.
그녀의 손이 안장에 얹어 둔 황금 가면에 스쳤다. 곧, 머릿속에 기묘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를 섬겨라.
‘싫어.’
페르난데스가 이 귀신 들린 유물을 그녀에게 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라도, 그녀의 주군은 결코 의미 없는 행동을 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이건 일종의 시험일 것이다. 그녀가 해낼 수 있는 종류의 시험.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에서부터, 그녀에 이르기까지. 푸른 길이 깔려 너울지고 있었다. 아름답고 따듯한 길. 주군에게로 향하는 길이.
-나를 섬겨라.
‘절대로, 싫어.’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 키르하스는 청록색 눈을 빛내며 페르난데스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
해질녘, 관문 경비병들은 꾸벅거리며 횃대 옆에 서 있었다. 이것을 경비병들의 나태함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대황야 호족 연합의 경계, 평소라면 모르겠으되, 온갖 집단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이 시기에 감히 호족 연합을 선제 공격할 간 큰 이들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
그래서 이것이, 경비병들이 다가오는 무리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까닭이다. 충분히 접근해 이젠 감시대의 조명 아래에 이를 때까지, 경비병들은 번뜩이는 창대를 꼭 붙잡고 졸고 있었다.
“이보게.”
“···음···? 음?!”
망토를 뒤집어 쓴 남루한 청년이 경비병에게 말을 걸고서야, 두 경비병은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났다. 청년,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강이 극도로 무너졌다. 황무지의 아귀다툼 속에서 비교적 안전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지금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강자들이 당장 건드릴 이유도, 필요도 없는 중소 규모의 부족 연합인 탓이다.
이런 이들을 이끌고 어떻게 전쟁을 이어나가야 할까. 부족 연합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음이 분명했다.
“누, 누구냐!”
“파르탁 블랙팽에게 볼일이 있어 온 방랑자일세. 차르스의 호의를, 잠시 몸을 녹이고 갈 게르 하나 양보해주지 않겠나?”
“백국마족(百國馬族) 출신인가? 그런 것 치고는 희끄무레한데?”
“혼혈일세.”
“허어···. 뭐, 마족 놈들이랑 척지면 곤란하긴 하지. 들어오게!”
대황야의 서부 지역은 키르자트의 영역이고, 그보다 남쪽편에 있는 황무지는 호족 연합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면 나오는 거대한 평야 지대. 그 끝이 없는 평야 지대는 마족의 것이다.
이른바 백국마족. 오천 대(大)게르의 주인, 카라드스카르가 지배하는 거대한 유목 민족 국가들. 말을 모는 솜씨가 마치, 말과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듯 하다 하여 이들을 이르기를 마족(馬族)이라.
그들 스스로는 르위웨인야르라 부르는 야만 전사들의 땅이다. 페르난데스는 이들이 저지른 거대한 흉터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후, 이른바 백년 전쟁이 점점 더 격해지는 그 시기에 찾아오는 재앙이다. 마족들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부 대황야의 호족, 키르자트 술탄국, 그리고 심지어 아세아스 고위 의회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흉터를 아로새기며 진군한다.
칠흑의 에리크가 이끌고 남하하는 북부인 대침공에 이어 남부 지대를 모조리 불사르며 북진하는 카라드스카르의 오천 대(大)게르 군세에 문명 사회가 허물어지고.
그 끝에 마침내 다섯 대악마들이 물질 세계로 강림한다. 그것이 예견된 종말이다. 전생의 종말.
“백국마족의 방랑자가 어째서 연합까지 찾아 왔나?”
“내 대부를 찾아 왔네. 파르탁 블랙팽.”
“···자네 혈통이 참 복잡하구만!”
경비병은 껄껄 웃으며 페르난데스의 등을 탁, 쳤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쉽다. 경비병들은 자신의 근무태만을 감추고 싶은 듯 오히려 더 호의적으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경비병이 그의 뒤에 따라오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저 자들은?”
“내 두 부인일세.”
“역시 마족 놈들 답구만. 파르탁 할아범과 만나고 싶으면 피프투스의 군기를 찾아 가게. 피프투스 군장(軍張)에 의탁 중이니.”
“호의 고맙네.”
경비병은 이죽거리며 관문의 목책을 옆으로 밀었다. 페르난데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벨과 키르하스에게 고갯짓하고는 목책 안으로 들어섰다.
*
난립한 군영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호족 연합 주둔지에서, 피프투스의 군기는 비교적 찾기 쉬운 편에 속했다. 중심으로 향할수록 강한 세력을 구가하는 주둔지의 구조 탓이다.
전생에 호족 연합들과 숫하게 격전을 치뤘던 그에게 있어서, 호족의 군기를 식별하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붉은 멧돼지 문장, 자카투스 씨족. 불타는 호랑이 문장, 크리카락 씨족. 그리고 그 두 군영의 옆에 있는 천막. 포효하는 곰의 문장. 그것이 피프투스 씨족의 문장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사이를 걸어 다니며 추억에 잠기는 기분이었다. 예컨대 영웅을 낳은 씨족들을 볼 때 마다 그랬다. 저 부족 출신 전사는 그렇게 죽었지. 또는 저쪽 부족의 용사는 그렇게 죽였지. 이런 식이었다.
“은공.”
“아, 아아. 그래.”
키르하스가 헛기침을 하며 페르난데스의 주의를 끌었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을 경계하며 바라보는 피프투스의 전사들 사이로 낙타를 이끌었다.
그들 사이에, 치렁한 귀걸이를 길게 늘어트린 늙은 수인 한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파르탁.”
“날 아나?”
“파르탁 블랙팽. 피프투스 부족의 군장어른 아니십니까.”
“난 자네를 처음 보는데?”
-탁.
페르난데스는 낙타의 등 위에서 뛰어 착지하며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주변 부족 전사들이 흉흉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이상 접근하지 말게, 이방인. 우리 군장 어르신께선 그쪽을 모른다는군.”
페르난데스는 파르탁을 바라보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그를 노려보던 부족 전사들이 움찔 떨고, 파르탁의 눈이 흥미롭게 반짝였다.
“아, 이제 기억나는 것 같군. 청년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어르신?”
“걱정 말게.”
파르탁은 천천히 자신의 천막을 향해 걸어가며 페르난데스에게 턱짓했다.
*
“어디 출신이지?”
천막에 들어서자마자, 파르탁이 그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따듯한 말투와는 달리 그의 손가락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며 마력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알’페르시트의 제자였습니다. 대주술사님.”
“···흐으음. 그 계집은 잘 지내나?”
“대주술사님의 호의 덕에 감사하게도.”
페르난데스의 말에 파르탁은 천천히 손을 풀며 웃었다. 그는 페르난데스에게 차를 한잔 따라주며 자리를 권했다.
“앉게. 이방인 형제여.”
글로리데인 시의 노예 시장으로 수인 노예들을 밀수출하는 조직이자, 수인 호족 연합 내부에 파고든 가장 비밀스러운 악마 숭배자 집단.
[데’카라즈 스웜]
페르난데스는 파르탁이 건넨 차에서 느껴지는 약초의 향기에 웃었다. 이 녀석들의 수법은 어째 변한 것이 없었다.
찻잎에 막산초를 섞었군. 페르난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막산초는 물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성 자백제 중 하나였지만, 디모니카의 간은 물질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항독소 장기 중 하나였다.
파르탁의 검은 이빨이 활짝 벌어지며, 그가 징그럽게 미소 지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오히려 친근감까지 느꼈다.
세계를 멸망시킨 열다섯 악적 중 하나. 데’카라즈 스웜의 파르탁 블랙팽. 내 오랜 친구.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생각했다. 그는 보통 친구를 살려두지 않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