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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96화 (97/388)

< 96. 살려주마 >

*

파르탁은 페르난데스가 천천히 차를 비우는 모습을 보며 기름지게 웃었다. 검붉은 찻물이 그의 입술 사이로 스며들 듯 사라지며, 찻잔의 반절이 비었다.

-탁.

페르시트, 그 계집의 세력이 점차 넓어지며 슬슬 거슬리던 찰나에, 페르시트의 슬하에서 파견된 인물이 그에게 왔다는 것은 호재 중 호재였다. 그가 킬킬거리던 차에, 페르난데스의 고개가 살짝 떨어졌다.

‘됐다.’

막산초는 물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성 자백제였다. 그 잎이 저렇게 진하게 녹아 든 찻물을 두 모금 이상 마셨다면 약발이 돌아도 이상할 것 없었다.

‘약이 좀 잘 받는 체질인가?’

파르탁은 목을 풀며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꼬마야. 이 늙은이가 궁금한 게 참 많구나. 크흐흐. 자, 네 이름이 뭐지?”

“페이자쉬.”

파르탁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페이자쉬? 그것은 고대 멜라쿰 제국의 방언이었다. 천상 전쟁 시절 물질 세계에 넘어온 악마들이 만들어낸 제국의.

이제 그 언어에 능통한 인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 뜻은 ‘배신자’. 알고 지은 것이라면 참 공교로웠다.

“멜라쿰 언어?”

“그래. 페이자쉬. 그 외의 이름은 알 필요가 없다. 파르탁 블랙팽.”

-스으윽.

고개를 떨어트려 흘러내린 검은 곱슬머리 사이로, 푸른 눈이 반짝였다. 약물에 취한 흔적 따윈 보이지도 않는 맑고, 곧은 눈이!

“이놈···?”

“이런 개짓거리만 하지 않았어도 며칠은 더 살았을 텐데, 내 친구.”

-드르륵. 탁.

파르탁은 재빨리 몸을 뒤로 빼내며 수인을 짚었다. 어떻게 약물에 중독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미리 대비하고 왔다는 것은 이 놈에게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사전 준비가 완료된 마법사의 공방에 홀로 온 것이 현명해 보였나, 페이자쉬? 응?”

“물론.”

파르탁의 수인이 재빨리 공중에서 춤췄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페르난데스의 손가락이 복잡하게 얽히며 푸른 불똥을 튀었다. 그의 팔목에 걸린 청동 왕좌의 회로에서 격렬한 빛이 뿜어졌다.

-화르륵!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로 치솟는 검은 왕관 모양 헤일로를 보며 파르탁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사! 검을 두 자루나 차고 다녔으면서!”

“난 둘 다 잘해.”

실수다! 하지만, 이 어린 놈이 오랜 시간 마법을 단련한 그보다 뛰어날 리가 없다. 파르탁은 오히려 놈이 마법전을 시도하는 것을 느끼며 내심 미소 지었다.

그의 웃음이 싸늘하게 굳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다섯 수의 수인이 맺히기까지 걸린 시간은 십오 초, 그리고 그 수인을 따라 흐르는 마력이 공중에 그 자취를 남길 때 까지 걸린 시간이 삼십여 초.

그 짧은 시간동안 페르난데스가 성공한 주문 쐐기. 역주문. 스펠 카운팅이 도합 마흔다섯 번!

“말도··· 안된다!”

페르난데스는 대답 없이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속사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거의 육안에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맺힌 수인이 놀랍도록 정교하게 그의 마력 회로를 틀어막고 있었다.

-투두두두!!

파르탁의 회로에 페르난데스가 자아낸 쐐기들이 틀어박히며 흐름이 가닥가닥 끊어졌다. 완패다! 파르탁은 백레시로 피가 흐르는 입술을 비틀며 소리치려 했다.

-스르릉.

그의 목젖 바로 아래에 단검이 들어오기 전까진.

“언제?!”

“지금.”

전생에, 단검의 사용법만큼은 마법보다 먼저, 그리고 오랜 시간 숙달한 기술이었다. 단검을 던지든, 그걸 이용해 상대를 찌르든, 하다못해 장작을 쪼개든 간에 유용한 생존 기술이니까.

디모니카의 반사신경, 그리고 그의 오랜 경험이 만들어낸 앙상블은. 가장 뛰어난 샥시시들이 보일법한 암살 기술을 재현할 수준에 이르렀다!

‘대체 이런 놈이 어디서!!’

파르탁은 고함치려던 입술을 억지로 깨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천막 입구까지 단 일곱 걸음. 그 거리만 돌파하면 그의 부하들이 포진해 있었다.

대외적으로 수인 호족 연합의 장로이자 주술사! 온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외부인에게 암습당했다면 이 놈 또한 살아서 연합의 영토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파르탁의 시선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짙게 웃었다.

“헛짓거리 할 생각이 드는가 보군.”

-콰지직.

그의 머리 뒤에 떠 있던 헤일로가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타올랐다. 곧, 마력이 천막을 얇게 덮었다.

“무풍 지대 축조. 아는 주술이지? 네 특기를 살려 봤는데, 어떤가. 비슷했나?”

“···.”

파르탁이 목젖을 누르고 있는 단검의 촉감에 부르르 떨며 신음했다. 무풍 지대, 파르탁이 자신의 공방에 정적을 초대한 후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주술이자, 그의 성명절기.

말 그대로 바람을 멈추는 기술이다. 어떤 소리도, 기척도 저 얇은 마력 장막 바깥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만드는 일종의 차폐막이었다.

‘내 마법진을 강탈했군···.’

이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꼬마는 자신보다 적어도 다섯 수는 앞선 수준의 마법사였다. 첫 마법전에서 견제를 넣기 전에 이미 그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스펠 카운팅을 넣고, 심지어 이 공방에 심어져 있는 그의 마법진을 강탈해 그 자신이 부릴 정도의 마법사.

“페이자쉬. 너는 알’페르시트의 제자가 아니군.”

“···흐음?”

“그 계집이 자기보다 뛰어난 마법사를 키웠다면 고작 나에게 보내는 암살자로 소비하진 않았겠지. 넌 누군가?”

“머리 굴리는 솜씨는 여전하군. 파르탁.”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단검을 치웠다. 컥, 하고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파르탁은 피가 흐르는 입술을 훔쳤다.

-드륵.

“···?”

페르난데스는 막산초가 섞인 찻잔을 살짝 밀었다. 파르탁이 멍하니 그 찻잔을 바라보고 있자,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살짝 꺾으며 말했다.

“마셔라.”

“···이게 뭔지 알고 있었군.”

“냄새가 나. 막산초. 연금술을 쓸 줄 알면서 왜 잎을 통째로 끓였는 지는 모르겠군.”

“보통 그걸로도 충분했으니.”

“네게도 충분하길 바라지. 마셔. 파르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파르탁이 떨리는 손으로 잔을 쥐었다. 미지근한 찻물이 그의 눈 아래에서 찰랑였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짙게 미소 지었다.

악마처럼. 마른 폐허와 화염의 냄새가 나는 웃음이었다. 그는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아는 것 중,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살려주마.”

며칠 정도는 더. 어쨌건, 이 시기의 정보가 더 필요하던 차였으니까.

*

모닥불 앞에서, 아벨과 키르하스는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천막에 홀로 들어선 지 어느새 한 시간 가까이 흘렀다.

키르하스는 연신 귀를 쫑긋거리며 천막을 살폈다. 그의 주인이 고작 저 안에서 무슨 일을 당하진 않았을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저 얇은 천막 아래에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안하느냐?”

“···아뇨. 아벨. 불안하긴요.”

아벨은 키르하스를 바라보며 따듯하게 웃었다. 키르하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살짝 분해 입술을 삐죽였다.

“이상해서 그래요.”

“이상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대화 소리조차, 아니.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요.”

키르하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 모닥불 근처에 있던 부족 청년 하나가 킥, 하고 웃었다. 그는 곧 번들거리는 눈으로 키르하스를 끈적하게 훑어 보았다.

그 무례한 시선에 키르하스가 발끈 하려는데, 청년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우리 주술사 님이 또 부하 하나를 더 만드려나보지.”

“···뭐?”

“흐흐, 저 안에 들어간 인간의 부인이라 했나?”

청년이 비죽거리며 말하자, 키르하스의 낯이 확 붉어졌다. 청년은 그 모습을 보며 능글맞게 말했다.

“네 남편은 주술사 님에게 사로잡혔을 거야. 오래 걸리는 걸 보니 아주 꼼꼼하게 노예 인장을 각인시키려나 보군. 으흐흐.”

“무슨 개소리를···!”

키르하스가 벌떡 일어나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수인족 청년이 꼬리를 탁, 치며 웃었다.

“앉아, 꼬마야. 아직 어리긴 하지만···. 네 남편을 대신 해줄 순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말을 곱게 쓰는 법을 익혀 두어야···.”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소리 없이 그의 뒤에서 천막이 열렸다. 곧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키르하스가 반갑게 귀를 치켜들자, 청년이 푸흐흐 하고 웃었다.

“그런 자세 아주 좋···.”

“그래. 너도 익혀야 할 자세지.”

“무슨···?! 컥!!”

-콰득!

어느새 청년의 등 뒤에 서 있던 페르난데스가 재빨리 청년의 등을 밟고 짓눌렀다. 청년은 막힌 신음을 내며 무릎을 꿇고 허물어졌다.

나름 주먹 깨나 쓰는 탓에, 주술사의 호위 역할을 맡기까지 했지만. 부족 청년은 페르난데스의 발 아래에서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끄으으윽!! 이거, 이거 놔!!”

“말을 곱게 쓰는 법을 익혀 두어야 할 거야. 수인.”

-콰드득.

청년의 허리가 거의 꺾일 때까지 짓눌렸다. 그는 꼬리로 바닥을 마구 휩쓸며 발버둥쳤다. 무슨 힘이?!

그때, 쓰러져 헐떡이는 그의 눈에 파르탁의 모습이 보였다. 천막 앞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파르탁을 향해 청년이 비명을 내질렀다.

“주, 주술사님! 주술사님 제발, 제발 이 빌어먹을 자식을!!”

파르탁은 아무 말 없이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텅 빈 눈으로 청년을 한 번 내려보고는 페르난데스의 곁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 놈, 필요한 놈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는군. 수인. 내 부인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드나?”

-콰드득!

“끄으으윽!!”

청년은 이제 바닥에 거의 가슴을 붙인 채로 헐떡였다. 대체 왜? 대체 왜 주술사 님께서 나를 버린단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이방인 꼬마에게 저렇게 극진하게 군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살고 보아야 했다. 당장 그의 짓눌린 폐는 한 줌의 공기도 마시지 못했다. 위산이 역류하는 것을 느끼며, 청년이 눈물을 쏟았다.

“제발! 하겠소! 사과 하겠소! 미안하오, 미안!!”

“좋아. 키르하스. 이제 마음이 좀 풀려?”

페르난데스의 말에 키르하스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난데스가 발을 치우자, 청년은 컥, 하고 마른 기침을 뱉으며 자세를 다잡았다.

키르하스가 파르탁을 살짝 노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은공, 저 자는···?”

“아, 인사해. 이쪽은 파르탁 블랙팽.”

“안녕하세요···?”

“아니, 편하게 말해. 새 시종이니까.”

시종···? 바닥에서 흐느적거리던 청년이 기겁하며 파르탁을 올려 보았다. 파르탁의 멍한 눈엔 그 전까지 보였던 간교한 총기가 사라져 있었다.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조아리는 파르탁을 바라보며 충격에 휩싸였다.

파르탁의 입에서, 그가 평생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단어가 나왔다.

“네, 주인님.”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깊게 웃었다. 그는 천천히 파르탁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파르탁이 고개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고요한 군영,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대주술사의 야영지 안에서, 페르난데스가 파르탁의 귓가에 속삭였다.

“군벌 회의를 소집해라. 할 수 있겠느냐?”

“무슨 사유를 들면 좋겠습니까?”

“전쟁.”

물론 전쟁이지. 그의 말에 파르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역사를 조금 더 당겨보자. 페르난데스는 복종을 맹세하는 파르탁을 내려보며 생각했다. 어쨌건 그에게 시간은 대단히 귀한 소비 자원이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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