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97화 (98/388)

< 97. 군벌 회의 (1) >

*

야영지의 한 가운데,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올라간 거대한 천막은 일종의 내성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목책을 언덕 중심으로 둥글게 말아 치고, 그 위에 짐승의 가죽을 덧댄 건축물을 올려둔 것이다.

호족 연합의 수도. 유목민들이며, 부족 중심 생활을 하는 수인 호족들에게 있어서 ‘수도’라는 개념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이들의 수도는 일종의 외교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수인 연합에 속한 대부분의 부족은 이 황야 전반에 걸쳐 흩어져 있다. 이 연합체의 야영지는 각 부족의 대표격 원로들이 모여 연합간의 분쟁을 최소화하고, 향후 행동 원리를 회의하는 일종의 의사 기관이다.

‘적어도 우리끼리 칼부림하진 말자.’ 라는 느슨한 합의를 위해 만들어진 기관. 특별히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수인 호족들이 자멸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잡아주는 기관이다.

페르난데스는 목책의 입구에서 그에게 창을 겨누는 호족 전사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

지난 밤의 일이다.

“다섯 명입니다.”

“다섯 부족 말인가?”

“아니오, 정말 다섯 명입니다. 주인님.”

페르난데스는 파르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벌 회의에 소집된 각기 다른 부족의 장로 다섯이라면, 곧 그 부족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파르탁은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 부족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부족들의 사정은 각기 다르지요. 제게 복종한 장로가 다섯 명이지만, 그게 곧 다섯 부족 전체를 제 휘하에 복속 시켰다는 뜻은 아닙니다.”

“···뭐?”

페르난데스가 기억하기로, 전생에 파르탁은 대단히 거대한 군벌을 이룬 호족이었다. 전성기 시절엔 지옥 마력과 그 힘을 탐해 그에게 복종한 호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키르하스가 칼리니 씨족을 발호하고, 수인 호족 연합을 통일시켜버리는 과정에서 내전으로 박살나긴 했어도, 이 시기에 키르하스는 그의 수하가 아닌가.

‘다른 부족의 견제 탓인가?’

-그렇다고 봐야겠지만···.

정보가 부족했다. 그의 활동 시기로부터 너무 오래된 과거의, 그리고 너무 먼 지역의 사건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누구지? 누가 널 훼방하고 있느냐?”

“카디호르 부족의 저항이 거셉니다. 지금 연맹의 주류 권력 기반을 쥐고 있기도 하고, 가장 거대한 군벌이기도 하고요.”

파르탁은 자신 없다는 듯 말을 흐렸다.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군.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문제는?”

“놈이 제국계 비둘기파 인사라는 점입니다.”

“제국계? 키르자트와 연맹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호족 연합은 이 전쟁에서 용병업을 하며 먹고 살고 있습니다만···. 딱히 키르자트의 술탄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국측 인사들이 우리 연합의 전선 참전을 대단히 껄끄러워하는지라···.”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제국계 비둘기파. 제국의 뒷돈을 받든, 모종의 밀약을 얻었든. 키르자트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도록 연맹의 여론을 주도하는 녀석들이란 뜻이었다.

‘차라리 종교적 신념 때문이면 모르겠는데, 까다롭게 되었군.’

타락에 대한 종교에 의한 저항이었다면 페르난데스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는 샤일드의 가호를 받은 적 있었고, 기본적으로 이단심문관이며, 동시에 베이타서스의 성자였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파르탁의 타락을 거부하는 이유가 세속의 욕망 때문이라면 방법이 없었다. 세속의 정치는 종교권에 기대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사태가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테이블을 탁 치곤 일어섰다.

“지도를 가져와라. 파르탁.”

“지도를···? 대황야의 전도가 필요하십니까?”

“그래. 그리고 비둘기파 호족의 근거지를 그 위에 그려둬.”

페르난데스는 서둘러 양피지를 꺼내어 펼치는 파르탁을 바라보며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체스 기물들을 판 위에 깔아놓는 감각. 먼 옛날, 옥좌에 앉았던 시절의 감각이었다.

‘역시 저항이 있어야 정복하는 것이 즐겁지. 안 그런가. 페이자쉬?’

-악마 추종자들을 이용해 벌이는 사업이라···. 그래. 옛날 생각 나는군.

수많은 각기 다른 국가가 이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작금의 대황야. 그 안에서 심지어 수인 호족 또한 내분 직전의 상황으로 들끓고 있었다.

혼돈이라. 페르난데스는 황야의 전도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는 이 상황이 못내 즐거웠다.

*

“신분을 밝히시오 인간.”

“퍼프투스 씨족에 의탁 중인 사냥꾼이다. 파르탁 장로의 수발을 들기 위해 입회를 신청했는데?”

“인간이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나는 백국마족 출신이야. 대(大)게르의 규율에 따를 수 있도록.”

그 말에 경비병이 움찔 떨며 창을 물렸다. 백국마족 출신의 사냥꾼이라면 쉽사리 병기를 겨눌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무력이든, 배경이든.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곤 경비병의 사이로 지나쳤다.

“키르하스. 빨리 와.”

“네, 은···. 어, 죄송합니다. 여보!”

키르하스는 중간에 혀를 한번 씹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녀가 이번 계획의 핵심이었다.

‘화려한 신호탄이 되겠군.’

*

대황야의 전도를 그려 넣은 거대하고 세밀한 지도가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장로들은 불퉁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황금 장식물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사냥감의 박제와 짐승의 거대한 어금니가 벽과 탁자를 꾸미고 있었다.

이 화려한 회의실은 지금 불온한 분위기와 소란이 가득했다.

“정숙! 정숙하시오!”

위로 솟은 귀는 반쯤 찢어져 있고, 그를 덮고 있는 털빛이 모두 새하얗게 바랜 늙은 수인이 소리질렀다. 그는 말끔하게 다듬어진 지팡이로 바닥을 거세게 찍었다.

“키르자트 군이 한 번 더 퇴각했소. 북부 지방의 해골 녀석들이 또 승전보를 이루었다고 하오. 이제 키르자트는 끝이오! 술탄은 더 이상 전쟁을 유지할 병력도, 능력도 없소!”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이 기회에 어떻게, 해골 놈들이랑 손이라도 잡으라는 건가?”

“조상 신들께서 분개하실거요!”

“조상 신들? 우리에게 남은 조상 신들이 있소?”

“신성 모독이요!!”

“전쟁은 신이 하는 것이 아니오, 우리의 젊은 전사들이 피로서 쌓아 올리는 거외다!”

노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장내는 순식간에 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각 부족의 장로들은 저마다 괴성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파르탁은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앉아 장로들의 면면을 훑었다. 매파, 매파, 비둘기파, 매파, 비둘기파.

꼬리를 만 개들. 겁먹은 잡견들.

파르탁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회의를 주도하던 원로가 다시 한 번 목청을 높였다.

“그만! 마지막으로 해골 놈들의 군대가 보고된 지역이 어디오?”

“러셀 협곡 인근에서 농성 중이라는 소리를 들었소. 협곡은 키르자트의 가장 깊은 보급로 중 하나요! 우린 그 지역에 원군을 파견해야 하오!”

한 원로가 소리치자, 그의 맞은편에 앉은 원로가 이죽거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 투탄 가르텝, 그 죽은 해골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키르자트를 정면에서 적대한다고? 놈은 제국과 국경을 등지고 있소! 놈들이 움직였다면, 그건 키르자트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포섭하기 위해서일 것이오!”

매파. 파르탁은 지금 발언한 원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포섭되지 않은, 그러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바라는 제 3 세력 중 하나였다.

파르탁은 키르자트 계열 매파였다. 그러나 지금 발언하고 있는 저 원로는 중립적 위치에서 용병 사업을 벌이고 있는 ‘다릭 씨족’의 원로였다.

“우리가 손 놓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키르자트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릴 것이오! 이 각축장에서 고립된 다음에, 우리가 의탁할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소? 친구들. 정신들 차리시오! 우리 부족의 영역을 보호한답시고 웅크리고 있다간 적들에게 포위되어 사멸할 것이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술탄은 우리의 오랜 동맹국이었소!”

“술탄은 현명하고 교활한 자요. 키르자트의 입장에서, 술탄은 대황야의 지배권보다 제국의 몰락과 전쟁 배상금을 받길 원하고 있을 거요! 하지만 투탄 가르텝, 그 해골이 보낸 파발을 잊었소?”

그 말에, 좌중은 침묵했다. 며칠 전 도착했던 파라오의 파발을 떠올리며.

[떠나거나, 복종하라.]

파라오는 단지 대황야의 드넓은 땅덩어리가 필요할 뿐. 그 위에 얹혀 있는 그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가 술탄에게 지원과 무역로를 제공하는 대신, 술탄이 그에게 대황야의 지배권을 이양한다면···.

파르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둘의 연합, 그리고 그들의 승리. 그 끝엔 호족 연합의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린 오히려 제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제국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고 발언하는 거요? 제국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이오?”

“제국의 적은 제국과 대면하고 있지. 그 말은 우리가 그들의 후방을 급습할 수 있다는 뜻이오!”

“지금 키르자트의 뒤를 치자는 거요? 술탄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 연맹은 그대로 박살날 것이오!”

파르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회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원로들의 말엔 모두 근거가 있었다. 지금 상황은 그 전까지, 황제와 술탄의 느슨한 장기전 양상을 크게 벗어난 난상이었다.

이 거대한 혼돈의 도가니에서 늙은 원로들의 생각이 하나로 모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파르탁 블랙팽!”

이 상황을 지긋지긋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원로가 대뜸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는 불만이 가득찬 표정으로 파르탁을 노려보았다.

“그대가 이 회의를 소집했소! 이젠 결의해야 할 때라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어째서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는 거요!”

“그래! 무슨 고견이라도 있었소?”

“고견이라.”

파르탁은 피식 웃었다. 책임을 전가하고 회의를 흐지부지 끝낸 뒤, 각 부족에 말할 변명거리를 찾겠다는 심산이겠지. 늙은 개새끼들. 파르탁은 고위 회의실에서 보이기에 적이 모욕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린 황제와 술탄,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오.”

“무슨 말이오!”

매파. 파르탁은 지금 그를 보며 경악한 인사들을 바라보았다. 사전에 정보를 주지 않았던 탓에, 키르자트 매파 계열 원로들은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반면 미소 짓고 있는 중립 매파 진영, 그리고 아직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반대할 생각부터 하고 있는 제국계 비둘기파 인사들까지.

파르탁은 힘 있는 눈매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노려보며 강하게 끊어 말했다.

“판을 더 넓게 보아야 하오. 황제가 우리의 대족장이 될 수는 없고, 술탄 또한 우리의 대족장이 될 순 없으니.”

“마치 자신이 대족장이 되고 싶다는 뜻으로 들리오?”

“내 설마 그리하겠소? 다른 좋은 인사가 있겠지.”

호족 연합의 대족장은 수십 년간 공석이었다. 정치꾼들의 각축장이 된 이 연합에서, 다른 부족장들의 만장일치를 받고 우두머리로 선출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졌으니까.

그러나, 부족장들의 동의가 없더라도 가능한 방법이 있지. 파르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시를 받았소.”

“하! 계시? 계시라 했소? 어디, 예언자라도 된 것이오?”

“죽은 조상신이 돌아와 우리의 곁을 걷는 계시. 사냥의 계절을 의미하는 계시를 말이오!”

그 전까지 그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또는 경악하거나 분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원로들까지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진득한 비웃음에도 파르탁은 표정을 고치지 않았다.

“악마가 속삭이는 소리를 잘못 들었나 보군. 파르탁 블랙팽! 내 그대가 그 전부터 그 빌어먹을 지옥 놈팡이들과 손을 잡고 있던 것을 알고 있소!”

“다행인 줄 아시오. 그대가 선신 만신전의 재판을 받지 않는 이유는, 수인 연합의 원로 신분이나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까! 지금 자네의 말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노환으로 그 신분마저 놓게 될 수도 있단 것도!”

“물론 그리하겠지. 기꺼이 그러고 싶으시겠지. 내 소개하겠소!”

-저벅, 저벅.

파르탁의 귀가 쫑긋 섰다. 그는 이 회의실 밖, 복도에 울려 퍼지는 둔탁한 금속 장화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몸에 새겨져 있는 복종의 주술이 외치고 있었다. 그의 주인이 지금 당도했노라고! 파르탁은 회의실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촤악.

회의실 천막의 문이 열렸다. 바깥의 빛이 살짝 비쳐 들어오며, 그 역광으로. 회의실 안으로 입장하는 두 인물의 그림자가 길게 내리 쪼였다.

원로들은 잠시 움찔 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압박감. 강렬한 존재감이 그들의 영혼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존재의 격이 필멸자의 업을 넘어선 이들 특유의 압박감이 장내를 압도하고 있었다.

“반갑소. 연합의 원로들.”

-저벅.

젊은 청년이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중저음. 그리고 곧,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원로 하나가 낮게 침묵했다.

“···그건 설마···? 진품··· 진품이오?”

“그렇소.”

-탁.

청년이 찬란한 황금빛을 반사하는 자칼 가면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 순간, 이 자리의 모든 원로들의 귓가에 자칼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를 섬겨라···.]

“사냥의 신. 카단의 세례를 받은 이. 몰락한 칼라니 씨족의 마지막 후예이며, 동시에 베이타서스의 후견을 받은 대영웅. 소개 하겠소. 키르하스 하트테이커요.”

곧 청년의 등 뒤에 서 있던 여인이 청록색 눈을 빛내며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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