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군벌 회의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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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종말의 턱 끝까지 올려 붙인 가장 유력한 사람을 꼽아 보라면, 전성기의 페이자쉬를 제외하고도 그 정도의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다섯 명은 족히 되었다.
그 중, 대전쟁의 효시를 올린 인물이 있었으니. 수만 필의 기수들을 이끌고 저 멀리 동남부 머나먼 평야에서 달려온 강대한 정복자, 바로 카라드스카르다.
카라드스카르. 오천 대(大)게르의 카간. 백국마족의 마왕(馬王). 세계의 흉터. 불사르는 자. 수레바퀴의 학살자.
진군 방향을 지도 위에 올곧게 직선으로 긋는다면 그 궤적을 따라 살아남은 부락, 도시, 왕국이 없었다. 모조리 불태우고, 짓밟고, 약탈하며, 그 몸집이 수레바퀴보다 큰 인물은 사지를 잘라 죽이고, 작은 인물은 포대에 넣어 말발굽에 으깨어 죽였으니까.
그가 원한 것은 단 하나, 세상의 흉터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겠다는 광기 어린 욕망 뿐이었다. 그는 정복하고, 약탈하고, 그의 형제들에게 그 몫을 아낌 없이 돌렸다.
그런 그의 진군이 멈춘 곳이 바로 이곳 서부 대황야이며. 그 진군을 멈춘 인물이 바로 그녀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는 키르하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서부 대황야의 방패.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불패자 카라드스카르에게 패배를 알려준 대영웅. 반파된 키르자트의 병력, 사분오열된 수인 호족의 병력, 그리고 그 과정에 파괴된 문명 약소국들의 피난 대열을 모조리 규합해 카라드스카르와의 회전에서 승리를 따낸 천부적인 전술가이자 전사!
그런 그녀가 수인 호족 연합의 전폭적인 지지와 충성을 받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총 세 가지로 꼽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일신상의 강력한 무력. 악마 대공을 맞상대해 무찌를 수 있을 정도의 완성된 무력과 이를 바탕으로 그녀가 벌여 나간 수많은 영웅적 업적이 바로 그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그녀가 가진 배경. 부족이 멸망하고 노예로 팔려나간 후, 자신을 구매한 악마 숭배자들을 무찌르고 탈출해 빈손으로 황무지에서 자신의 세력을 천천히 쌓아 나간 그 과정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리니 씨족의 비처에서 그녀가 받은 시련. 수인족의 죽은 조상신 중 하나. ‘사냥의 신 카단’을 부활시켰으며, 부활한 신에게 직접 세례 받아 성자로 시성 되고, 사라진 수인족 조상신 신앙을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무력은 아직 미완성이고, 배경은 오히려 부족하지.’
그녀의 무력은 동년 수인족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다수의 전투 경험과 체계적인 수련, 그리고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 덕에 이제 막 개화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나 ‘이제 막 개화하기 시작’한 정도로는 이 깐깐한 수인 연합의 원로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무력을 증명할 만한 업적도 부족했고.
또한, 그녀의 배경. 노예상에게 ‘구원 받고’, 선신 만신전에 귀의해 이단심문관의 업무를 수발 들고 있다는 것은 수인들에게 호감을 살 만한 배경이 아니었다. 그들은 만신전의 권위는 인정해도, 만신전에 복종하지 않으니.
그렇다면.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테이블 위의 황금 가면에 손을 올리는 원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카단의 자칼 가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콰지지직!
“으흐허어억!!”
원로의 손끝에서 번갯불이 튀며 그의 오른손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원로는 비명을 내지르며 가면을 던지고는 뒤로 물러서 헐떡거렸다.
“무, 무슨 일이오?”
“저주라도 받은 게요?!”
“아니오, 아니오!”
원로는 경외감 섞인 눈으로 가면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그의 타들어간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자격이 없소! 아마 우리 모두가 그럴 것이오. 오오, 맙소사. 우리 시대에, 정말로 돌아왔단 말이오. 사냥의 신이 돌아왔단 말이외다!”
“키르하스.”
페르난데스가 조용히 키르하스를 불렀다. 그녀는 페르난데스를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곧, 그녀의 고운 손이 가면의 테두리를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오, 오오.”
원로들이 일제히 탄식을 터트렸다. 정치적 식견과 호불호를 떠나서, 사라진 신앙의 부활을 목도하고 있는 그 신성함이 장내에 가득했다.
단순한 고대 유물이나, 고대 신전의 상징물이 아니었다. 이 압박감. 이 신성함. 수인 원로들은 본능적으로 저 가면 아래에 잠들어 있는 강대한 영혼을 느끼고 있었다.
조상 신의 부활이다. 더 나은 증거가 있기 전부터, 그들은 이미 저 가면이 카단의 영혼을 담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나를 섬겨라···.]
‘싫어.’
[나를 섬겨라···.]
키르하스는 자신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자칼 신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신앙은 신이 아니라, 그녀의 주군에게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잠깐만 조용히 해.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너도 신도가 필요하면 쟤들이랑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
[격이 부족하다.]
‘나는?’
[나를 섬겨라···.]
키르하스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숫제 신이 아니라 무슨 정박아를 다루는 것 같았다. 매번 같은 말만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고장 난 태엽 장치 같았다.
그녀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당당한 표정을 짓고 회의실을 응시했다. 원로들은 그녀의 손에 들린 황금빛 가면을 보며 압박감에 침을 삼키고 있었다.
“제 이름은 키르하스, 칼리니 씨족의 키르하스 하트테이커입니다. 반갑습니다. 원로원 여러분. 칼리니 씨족의 대표로, 또는 카단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제게 자격이 충분합니까?”
그녀의 말에 원로가 잠시 신음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원로원에 입회하기 위한 조건은 부족의 장로일 것, 또는 부족의 대주술사나 대예언가일 것. 이 두 가지 경우에 한합니다. 키르하스. 그대는 어떤 목적으로 입회를 신청하십니까?”
원로는 기가 죽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신의 압박감을 분연히 떨치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는 그 원로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라면 모르겠으되, 수인족의 일원으로서 카단의 지배력에 저항하는 것은 대단한 기백이 필요한 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회의실의 한 귀퉁이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파르탁을 바라보았다.
‘비둘기파 인사입니다.’
파르탁이 짧게 고개를 저으며 의사를 보냈다. 제국계 비둘기파라. 갑작스러운 키르하스의 등장을 가장 원치 않을 파벌이었다.
키르하스는 청록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원로에게 말했다.
“씨족의 대표 자격으로. 제 안건은 복수 입니다. 불타 사라진 칼라니 씨족에 대한 복수를!”
원로는 침음했다. 원칙적으로 호족 연합에 속한 씨족이 외부 세력에 공격을 받았다면, 저 아무리 약소 부족이라 할지라도 연합체의 모든 부족에겐 복수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벌써 몇 해 전에, 그것도 노예 사냥꾼들의 손에 의해 불탄 부족을 무슨 수로 복수한단 말인가. 복수의 대상 자체가 희미했다. 원로는 파르탁을 곁눈질했다.
‘목적이 뭐지?’
저 늙은이가 황제와 술탄, 그 둘을 선택하지 않고 자립하자 말한 목적. 갑작스레 죽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수인 소녀를 데려온 목적. 저 예상외의 와일드카드를 뽑아든 목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모든 원로들은 정치적 목적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다. 원로는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누구에 대한 복수입니까?”
“세계에 대한!”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동자가 밝게 불타 올랐다. 그녀는 카단의 황금 가면을 거칠게 테이블 위로 내리 찍으며 외쳤다.
“존경하는 원로원 여러분. 저는 세계에 대한 복수를 원합니다. 저는 칼라니 씨족의 몰락 이후, 노예로 팔려 인간들의 도시를 전전했습니다. 그 와중에 제가 목도한 것은, 박해와 차별, 그리고 혐오 뿐이었습니다!”
키르하스의 팔이 지도로 향했다. 대황야의 전도엔 수 많은 부족들의 위치와 국경선이 어지러이 그어져 있었다.
“위대한 호족 연합에 영광을! 우리는 사냥감으로 전락해 노예 사냥꾼들을 피해 도망치고, 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웅크린 채 그저 살아남기만을 바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등을 맞대고, 적어도 우리 서로를 향해 칼부리를 돌리지 말자고 맹세했건만. 실상은 어떠합니까?”
-쾅!
키르하스의 올려진 팔이 다시 테이블을 찍었다. 원로들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국과의 화평, 그것은 패자의 구걸입니다. 술탄의 호의에 기대는 것 또한! 우리를 야만족이라 멸칭하는 저 문명 국가들은 그저 우리를, 노예가 되거나 용병이 되기만을 바랍니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들의 처지가 이러했습니까? 언제부터 우리가 사냥감으로 전락했습니까?”
원로원들 전원이 그녀의 웅변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열정 담긴 웅변으로 흔들기엔, 그들은 이미 충분히 노련한 정치가들이었다. 그러나, 신의 권위가 그들에게 침묵을 명하고 있었다.
하여 키르하스는 다행히도 아무런 저지 없이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저 드넓은 황야가 우리의 집이었고, 저 높은 하늘이 우리의 천장이었습니다. 우리에겐 국경선이 없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터전이기 때문에! 그러나 원로원 여러분. 수인 호족의 위상은 지금 그 어떤 순간보다 저열합니다. 수많은 영웅들이 일구어낸 우리의 자존감은 이제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 사이에 소모되는 전쟁 물자로 취급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원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열정적인 연설이었지만, 이것으로는 파르탁의 심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황제와 술탄을 모두 적대하자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아니. 파르탁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의 군주, 하나의 부족, 그리고 하나의 목적을! 그리하여 하나 된 호족 연합의 힘으로 공고히 다진 우리의 터전을 바랍니다. 그리하여 복수를! 세계에 대한 복수를!”
키르하스의 말에 원로들의 눈살이 움찔거렸다. 위험한 발언이다! 지금 저 여인은 수인 연합의 대족장을 선출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 원로 여러분. 사냥의 계절이 돌아왔음을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키르하스는 카단의 황금 가면을 테이블 위에 두고 의자에 앉았다. 회의실엔 침묵이 감돌았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등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훌륭하군.’
-어제 써줬던 대본보다 오히려 나은데?
‘카리스마, 그리고 리더십. 이 두 가지 자질에서 당년 키르하스를 뛰어넘는 인물이 없었지. 이 시기부터 개화하기 시작하나 보군.’
지난밤 페르난데스와 파르탁이 계획한 시나리오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까다로울 수 있는 역할이 바로 지금 키르하스가 보여준 연설이었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가 준비한 대본을 모조리 외운 것을 넘어서, 오히려 더 나은 웅변을 해냈다. 그녀가 노예 신분으로 전락해 실제로 그 끔찍한 노예 시장을 전전한 경력이 있었기에 진실성의 무게가 남달랐다.
“미쳤군!”
원로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키르하스의 타오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시 위압된 원로는, 그럼에도 곧 발작적인 기침을 터트리며 외쳤다.
“대족장이라니! 그대에게 그럴 자격이 있소? 그대는 그저 노예 출신의 수인, 그저 그 뿐이오!”
“지금 그녀의 자격을 의심하는건가, 카디호르의 자스?”
파르탁이 조용히 말하자, 원로는 움찔 떨었다.
“사냥의 신이 자신의 대리인을 통해 사냥의 계절을 선언했거늘. 어찌 일개 필멸자에 불과한 우리가 그에게 자격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은 우리를 대신해 피를 흘려주지 않네!”
원로가 외쳤다. 그는 이방인 수인 소녀에 불과한 키르하스에게 복종이나 충성을 맹세할 생각이 없었다. 하물며, 천여 년간 사라졌던 그들의 신에게는 더욱.
“피를 흘리는 것은 언제나 우리 부족의 젊은이들이었어. 출혈을 감수하라고? 우리의 자존감을 위해서? 그건 이상론일세! 그리고 우리가 이상에 심취해 부족의 안위를 도외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직무유기일세.”
“이상이라. 그래. 그렇다면 실리는 무엇인가?”
“난 자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네. 파르탁. 연합을 위하는 척 하지 말게. 카단의 선지자여, 그대는 속고 있소!”
원로는 파르탁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저 자는 복수도, 사냥도, 또는 우리 연맹을 위한 이상도 꿈꾸지 않소. 저 자의 머릿속엔 더 많은 권력과 더 강한 힘 뿐이지. 그대는 지금 열정과 복수심이란 미끼로 저 자에게 놀아나고 있을 뿐이오!”
“그만!”
다른 원로가 소리질렀다. 비둘기파. 파르탁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폐회를 선언하오! 이 안건은 우리의 의결권한을 초월한 바. 각 원로들은 부족의 족장들에게 이 안건에 대해 전달하길 바라오!”
“동의하오!”
키르하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원로들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와 그녀의 손에 쥐어진 신에게서 도망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아직까지 자리에 남은 원로들은 일곱 명에 불과했다.
“암살, 또는 전쟁을 대비해야 할 것이오. 파르탁 블랙팽.”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자리에 남은 원로가 입을 열었다. 파르탁은 이 자리에 남은 원로들의 면면을 훑어 보았다.
제 3 세력. 중립계 매파 원로들이었다. 독립적인 권위를 주장하며 중간 이익을 보길 바라는 원로들. 신의 권위를 등지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파르탁은 이 간교한 자들에게 미소 짓고는, 아무 말 없이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던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는군요. 주인님.”
원로들의 표정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주인님?’ 자리에 남은 원로들의 고개가 꺾일 정도로 빠르게 구석에 앉아 있는 인간을 향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젊은 인간 청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
암살과 전쟁이라. 다행히도, 그 둘 모두 그의 전문 영역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차갑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원로들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악마 추종자, 그리고 키르자트 매파의 일원이었던 파르탁이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카단의 선지자라는 여인을 데려올 수 있었는지.
카단의 선지자의 배후에 파르탁이 있었다고? 아니었다. 저 여인은 카단이나, 또는 파르탁의 꼭두각시가 아니었고, 저 청년은 그저 그녀의 수행원이 아니었다.
원로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신음했다. 떠나간 원로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르탁이 권력을 잡기 위해 카단의 선지자를 내세웠다고 생각하겠지. 그녀를 이용해 배후에서 대족장의 권위를 남용하고자 한다고!
오히려, 파르탁이 저들의 꼭두각시였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팔을 풀고 지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수인 호족 연합의 부족들이 표기된 거대한 지도를 향해서.
“사냥의 계절이 도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