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99화 (100/388)

< 99. 전운이 감돌다. >

*

키르자트계 매파 원로들. 원로회 의석의 거대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통적인 파벌이며, 또한 ‘매파’, 즉 주전파라는 이름에 걸맞게도 강대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부족을 등에 지고 있었다.

이들의 부족은 머릿수로 승부하지 않는다. 숫한 전쟁을 통해 소모된 탓에 이들은 극도로 정예화된 소수의 인원들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전체의 무력이 평화주의자 비둘기파들의 전체를 상회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반면 비둘기파. 제국 국경 근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이 파벌의 부족들은 비교적 비옥한 토지와, 친제국적 평화 노선을 통해 대단히 거대한 세력권을 구가하고 있었다. 부족의 전사나 사냥꾼의 비중이 높진 않지만, 그럼에도 그 머릿수는 분명 강력한 무기다.

페르난데스는 전도에 빼곡하게 그려진 수인 호족들의 근거지들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 수염이 자라진 않았지만, 깊은 생각에 잠길 때 으레 하곤 했던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펄럭.

그가 기거하는 막사의 문이 열렸다. 수인 시종 하나가 고개를 조아리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페르난데스가 힐끔 쳐다보자, 시종은 움찔 떨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무엇이냐?”

“주술사님께서 찾으십니다.”

“내 곧 가마.”

그가 기억하는 시기의 대황야는 이미 키르하스에 의해 오랜 내전이 정리된 이후였다. 황제와 술탄의 전쟁이 외세의 침략으로 느슨해지고, 그 틈을 타 세력권을 확장한 수인 호족들 간의 각축전.

그 끝 무렵에 나타난 키르하스 하트테이커가 호족 연합을 규합하고 대족장에 오르며, 마침내 치고 올라오는 카라드스카르의 군세를 막아내는 장구한 서사시. 페르난데스는 오직 그 일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정보가 부족하다.’

이 시기의 대황야는, 거기에 더불어 심지어 전생에 비해 과도하게 복잡해진 이 시기의 대황야는 그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

파르탁의 막사엔 키르자트계 매파의 원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분개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파르탁은 군장 회의를 소집하고는 같은 파벌에 속해 있던 그들에게 어떤 정보도 흘리지 않은 채 폭탄을 터트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것은 정치적 기습에 해당했다. 당장 암살자가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종류의 기습.

그러나 파르탁은 매파 원로들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으며, 군장 회의에 참가하는 매파 원로들은 모두들 파르탁에게 ‘특수한’ 빚을 지고 있었다. 파르탁이 그들을 소집했을 때 거절할 수 없는 종류의.

“파르탁. 이제 다 모였소. 대체 무얼 기다리고 있는 게요?”

“오늘 원로회의 일에 대해 잘 설명해야 할 거요. 블랙팽. 그대의 정치적 생명을 잠시나마 연명하고자 한다면.”

“또는 그 비루한 생명을 연명하고 싶다면 말이지.”

원로들은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는 파르탁을 향해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 흉험한 기세에도 파르탁은 시종이 나간 자리를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기랄. 말을 좀 해보시오!”

“차 한잔들 하시겠소?”

-쪼르륵.

파르탁은 느긋하게 잔을 꺼내어 맑은 찻물을 따랐다. 원로들의 안색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주술사가 내어주는 찻물을 마실 수는 없지. 파르탁.”

“뭘 꾸미고 있는 것이냐?”

원로들의 말이 점차 거칠어졌다. 찻잔을 건넨다는 것, 특히 이런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찻물을 내어준다는 것은 대단히 공격적인 제안이었다.

전통적으로, 수인 호족들 간에 분쟁에서. 술은 화평을, 찻물은 음독을 의미했다. 원로들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기색을 내비쳤다.

그때, 막사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촤락.

“앉지.”

그 사이에서 나타난 이는 카단의 선지자, 키르하스를 보필하던 인간이었다. 수인들은 움찔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감히 비루한 떠돌이가 참여할 곳이 아니다. 어린 인간!”

“점입가경이로군. 파르탁 블랙팽. 이 일은 부족에 알릴 것이오. 그대의 배신은 이제 지긋지긋하군. 저 인간과 소꿉놀이가 그리도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원로들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파르탁을 모욕했다. 막사 안에서 침을 뱉는다는 것은,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전통적인 제스처였다. 그런 노골적인 위협에도 파르탁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화르륵.

그때, 청년의 머리 뒤에서 검은 불길이 넘실거렸다. 수인 원로들은 당황하며 무기를 잡았다. 마법사?

“가, 감히 호족 연합 한복판에서 원로회 의원을 위협하려 들다니?!”

원로가 어금니를 드러내며 맹렬하게 으르렁거렸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앉아. 위협은 무슨. 그냥 소리를 차단한 거야.”

“무례하군. 우리가 어째서 네놈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

“여기에 너흴 부른 것이 나였으니까. 내가 뭘 꾸미고 있는지 궁금해서 모인 것 아니었나?”

원로들은 눈을 가늘게 뜨며 파르탁과 페르난데스를 훑었다. 음모의 냄새가 났다. 저 음산하고 귀족적인 청년과 늙은 주술사 사이에서, 그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사이에서.

한 원로가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가며 눈을 부라렸다.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파르탁?”

“그에게 너무 무어라 하지 말길 바란다. 이제 내 가신이니까. 과가 있다면 내게 말해라.”

“···가신?”

어린 청년의 말에 늙은 주술사는 검은 이빨을 드러내며 킬킬 웃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원로들은 이제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주술사가 악마와 손을 잡았고, 기꺼이 그의 잔을 들어 마시며 악마에게 영혼을 판 원로가 총 다섯.”

“···네 이놈!”

“불멸을 원했나? 죽음이 두려웠나? 비루한 목숨을 잠시나마 연명하고 싶었나? 늙은 짐승들. 삶이 그리도 달콤했나?”

페르난데스의 음울한 푸른 눈이 이글거렸다. 어쩐지, 그의 몸이 점점 크게 보였다. 이 막사를 밝히는 모닥불 속에서, 그 빛에 너울지는 그림자들 사이에서 악마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성직자들이 말하기를, 모든 그림자 속에 악마들이 비명 지르는 시대니까. 페르난데스의 지배력이 이 막사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페르난데스는 낮게 기어가는 뱀처럼 말했다.

“악마는 선량한 이웃이나, 친절한 자원봉사자들이 아니지. 원로 여러분. 언젠간 반드시 너희가 진 그 부채를 갚아야 할 날이 올거야. 그리고 그 과정은 아주···. 아주 끔찍하겠지.”

-화르륵.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에서 이글거리는 검은 헤일로가 발작하듯 거대하게 타올랐다. 그들의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듯이. 원로들은 그 순간 저마다 다른, 그러나 같은 결말의 환시를 목도했다.

[지옥이 너희의 눈 앞에 닥쳤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 가장 아끼는 친지들이 장대에 매달려 불타오르며 고통에 헐떡이고, 악마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광기에 젖은 웃음을 터트리는 환시가 원로들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흐···흐윽···.”

페르난데스의 손이 허공을 헤엄쳤다. 파르탁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놀랍도록 정밀하고 깔끔한 환각 마법이었다. 저들은 저 스스로가 마법에 걸렸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페르난데스에게 압도될 것이었다.

심지어 이 자리의 모두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악마의 힘을 받고, 그 자신의 수명을 연장시킬 때부터, 그 결말이 온건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들의 불안감을 뱀처럼 파고들었다. 원로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릴 때, 페르난데스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자, 이제 이야기를 하지.”

“···바라는 것이 뭔가···?”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며, 원로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의 꼬리는 이미 처음의 흉험한 기색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드르륵.

페르난데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갑게 식은 찻잔을 그들에게 밀었다. 원로들은 멍하니 잔을 바라보았다.

수인 호족들에게 있어서, 회의에 차를 건네는 것은 음독을 의미했다. 또는, 그 목숨을 바치라는 의미를.

원로들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그 진득한 함의에 떨며.

“마셔라.”

“맹세 해다오. 악마에게서 우릴 구원할 수 있다고.”

“너희가 충분히 쓸모 있다면.”

원로들이 천천히 찻물을 들이키는 것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는 킥, 하고 웃었다.

-썩 깔끔한 방식은 아니야. 적어도 성자가 하기엔 말이야.

‘베이타서스는 우리의 수단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야. 놈과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엄밀히 말하자면···.’

-그래. 동업자지.

불평등 조약에 날인했다 하더라도, 신과 그는 상하 관계에 있지 않았다. 베이타서스가 그의 권역으로 그를 불러냈던 그 순간부터, 그것은 자신을 동격으로 보며 동업을 제안하는 일종의 협력 요청에 가까웠다.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선. 영웅을 하나 만들지.”

“···영웅?”

페르난데스는 음울하게 웃었다. 내 진창에 발을 디디고 오물을 양손에 한 아름 안고 가게 된다 하더라도.

‘약속을 지키마 키르하스. 널 영웅으로 만들어 주겠다.’

협박, 유혹, 타락, 암살, 흉계, 책략. 본디 온건하고 정의로운 방식은 그에게 걸맞는 옷이 아니었다. 그는 보다 더 어둡고, 끈적한 계략을 선호했다.

*

호족 연합의 야영지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비둘기파 원로들이 병력을 이끌고 하나 둘 이탈하기 시작하며, 이들 사이엔 기묘한 소문이 흘렀다.

-내전이 임박했다.

수인 호족들 간의 신경전, 또는 사소한 분쟁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코 서로를 향해 칼부리를 겨누는 것은 금기에 해당했다.

그러나 지금 야영지의 수인들은 모두 전쟁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제까지 술잔을 나누어 마셨던 옆 부족의 수인들과, 사소한 언쟁으로 서로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것은 이젠 일상에 가까웠다.

마지막 비둘기파 원로가 병력을 이끌고 부족으로 떠나며, 야영지는 호전적인 매파 수인들만 남아 마치 용광로처럼 이글거렸다.

이들의 불안함, 그리고 투지, 그 사나움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야영지가 내려보이는 언덕에 앉아 지평선 너머로 떠나는 병력을 바라보았다.

“기이한 소문이 돌더구나.”

“아벨.”

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밀밭처럼 빛나는 황금색 머리칼이 흩어졌다. 아벨은 바람을 등지고 서서 페르난데스를 내려 보았다.

“악마를 부린다는 소문이 있는 원로들이 집결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이가 인간 청년이라는 소문 말이다.”

“곧 다른 소문이 퍼질 것이오. 악마들의 손에서 놀아나던 원로들이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신의 계시를 받은 한 수인 영웅이 그들을 영광의 길로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소문이.”

프로파간다는 극적일수록, 그리고 그 안에 진실성이 내포될수록 효과적이니까.

“악역을 도맡겠다는 뜻이냐?”

“원래 선역이었던 적은 없소.”

“어디까지 진실이더냐?”

아벨의 눈에 슬픔이 흘렀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애통함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핏줄에 흐르는 데인 왕의 파편이 격동하고 있었다.

이 감정은 환각에 불과해. 페르난데스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가로되,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불씨를 내리러 왔노라.”

페르난데스의 말에 아벨이 크게 눈을 떴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길의 시대라. 정말 그렇지 않소. 아벨. 타오를 이들은 타올라야지.”

“그 끝에 무엇이 남겠느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물었잖소, 아벨.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 있고, 난 그들을 이용할 것이오. 그럴 계획도 있고, 그 계획을 실행할 능력도 충분하니까. 저들은 자신을 저당 잡고 있는 악마들 대신, 나를 선택한 것이오. 내가 그렇게 만들었고.”

페르난데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저 멀리에, 수인들이 서로 칼을 뽑아 겨누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에서 장검을 뽑아 들고 고함치는 키르하스의 모습도.

“저 아이는 밝은 것을 보며, 누구보다 화려하게 타오를 것이오. 삿된 것들을 불사르는 태양처럼, 강렬하게. 그렇게 되기 위해 땔감이 필요하다면, 내겐 던져 줄 것들이 많소.”

“그들을 속였구나.”

“악마에게 속았던 이들을 내가 다시 속이는 것에 무슨 가책이 있겠소?”

“그러지 말거라. 페르난데스. 나는 네가 걱정이 된다.”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거친 손 위로 차가운 손가락을 겹쳤다. 페르난데스는 그 청량한, 섬세한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며 몸을 굳혔다.

잠시 후, 메마른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렀다.

“전생에, 키르하스의 문장은 불사조였소. 키르하스의 불사 군단. 대황야의 빛나는 방패. 사냥의 여군주.”

페르난데스의 말을 들으며 아벨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둘의 시선이 같은 위치에 놓였을 때, 페르난데스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불길의 끝에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했소. 아벨? 불사조는 잿더미 속에서 태어나는 법이오.”

“너는 너 자신까지 태울 생각을 하고 있구나.”

“내 육신은 소모품에 불과하오.”

그리 말하며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돌렸다. 키르하스가 싸움을 막아내고 그들을 무릎 꿇리는 모습이 보였다.

역사대로라면 영웅이 되어야 했을 여인이었다. 그녀는 그 대신,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죄책감인지, 책임감인지 알 수 없었다.

페이자쉬의 말대로, 자기기만이나 자기위로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또는, 그저 목적을 위해 그녀의 직위를 이용하려는 계략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겐 자격이 있었다. 그에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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