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하나 찾았다. >
*
수인 연합의 야영지는 극단적으로 즐길 거리가 부족했다. 각 부족에서 차출해오는 보급품과 무역 중계를 통해 얻는 물자들을 제외하면 먹을 것도 충분치 않았다.
혈기왕성한 젊은 전사들이 모여 있는 야영지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대련, 대련을 빙자한 결투, 결투를 빙자한 살인, 또는 독주 뿐이었다.
이때, 키르하스가 받은 임무는 단 하나였다. 도전해오는 놈들을 닥치는 대로 이겨라. 그날, 연합의 원로들이 대거 이탈한 날부터. 야영지를 감싸고 있는 이 불온한 분위기를 쇄신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들에겐 ‘아이콘’이 필요했다.
-키이잉!
키르하스의 장검이 충격으로 얇게 떨렸다. 데인 왕국의 질 좋은 강철로 벼려진 장검은, 호족들의 투박한 병장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콰득!
“제길!”
수인족 전사 하나가 크로스가드 바로 위에서 끊어져버린 장검을 바라보며 씩씩거렸다. 강철의 질도 그랬지만, 그녀는 기술과 센스로도 이 전사들 대부분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군이 내린 명령은 단 하나. 패배하지 말라는 것 뿐. 그리고 키르하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차라리 머리를 쓰라거나 이들의 마음을 얻어내라는 둥의 애매한 명령보다 훨씬 쉽고 편했다.
“하하! 다음!”
“진짜 귀신 같네.”
수인 전사는 투덜거리며 부러진 칼조각들을 줍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곧 상의를 벗어 던지며 잘 발달된 근육을 움찔거리는 청년 하나가 곤봉을 들고 들어섰다.
“자레스 씨족의 투사, 에낙스! 귀공에게 가르침을 청하오!”
“말이 길다, 에낙스! 하하, 그냥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싶다고 말해!”
“으하하하! 맞고 울지나 마라!”
청년은 호쾌하게 웃으며 곤봉을 붕붕 휘둘렀다. 그 움직임에서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 키르하스는 칼을 한 바퀴 돌려 자세를 도사리며 사납게 웃었다.
익숙한 타입의 적수다. 디모니카와 대련할 때면 이런 느낌이었으니까.
그리고 저 녀석은 분명히, 디모니카보다 약하다.
*
스물일곱 번째 승리 이후부터, 키르하스의 체력이 점차 한계에 치닫고 있었다. 그녀는 단숨을 내쉬며 경탄하는 주위의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자, 더 남았어?”
“여기서 더 싸울 수 있다고?”
“기왕이면 한번에 덤벼도 좋은데!”
키르하스가 깔깔거리며 웃자, 부족 전사들이 따라 웃으며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그들은 뛰어난 전사와 사냥꾼들을 숭상했다.
-휙.
“목이나 축이슈.”
“고마워!”
수통이 날아와 그녀의 손에 감겼다. 키르하스는 수통을 뜯으며 미지근한 물을 들이켰다. 그녀의 주위에 전사들이 몰려들었다.
“대단한 무위요.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무술은 어디에서 배웠소?”
“오며가며?”
이단심문청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까. 키르하스는 입술을 닦으며 웃었다. 전사들은 어느새 그녀에게 매료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 호쾌한 성미, 그리고 뛰어난 무력까지.
“혹시 그 소문이 사실이오?”
“응? 무슨 소문?”
“당신이 대족장이 될 거라는 소문.”
“···으음.”
키르하스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에게 그저 싸워서 이기라고만 말했고, 연합 회의실에서의 연설은 사실 구심점을 만들라는 페르난데스의 대본을 조금 변용한 것에 불과했다.
어쩌다보니 야망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게 되었지만, 그녀에겐 수인 연합에 나타난 수십년 만의 대족장 같은 대단한 야망이 없었다.
‘뭐, 계획은 은공께서 짜 두시겠지.’
“지금 대답하긴 좀 곤란하네!”
키르하스가 웃으며 대답하자 전사들은 눈빛을 빛냈다. 그들은 젊고 혈기왕성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이 부족이 아니라, 이 야영지로 차출되었다는 건 사실상 부족에서 버려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부족장이 아끼는, 그리고 부족장에게 충실한 전사들은 부족의 근거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수인 호족 의회의 야영지로 보내어진 전사들은 부족장이나, 부족장의 후계자에게 도전할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 야영지는 부족 사회의 정치에서 도태된 이인자들의 귀향지 같은 곳이었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이끌어줄 새로운 바람, 또는 타고 오를 끈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비슷비슷한 수준의 전사들이 모인 곳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는 매력적인 외지인. 그리고 신의 계시를 내려 받은 대전사라는 타이틀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페르난데스가 바라던 대로.
*
페르난데스는 작은 촛불이 밝히고 있는 어두운 막사 안에 앉아 있었다. 며칠간의 준비 끝에, 이 야영지 전체를 온전히 그의 마력 제어권 아래에 둘 수 있었다.
-화르륵.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짚었다. 검은 헤일로가 타오르며 그의 머릿속에 야영지 내부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동선, 위치, 그리고 대화들이 그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파르탁은 침을 삼켰다. 그는 부족 최고의 주술사였으며, 어쩌면 수인 연합 전체를 아울러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고명한 주술사였다.
그 탓에, 파르탁은 지금 페르난데스가 펼치는 마법을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로서는 시도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고차원적인 주문과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한 주문이었다.
‘대체 정신력이 얼마나···.’
페르난데스는 지금 이 드넓은 야영지 전체에 감각기관을 펼쳐 둔 상태였다. 크게는 사람들의 움직임, 작게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이면서 마법의 제어를 잃지 않고, 동시에 이성을 붙잡고 있을 수준의 정신력이라니.
“누군가 오는군.”
“···어느 방향입니까?”
“북쪽에서.”
“북쪽이라면···.”
파르탁은 지도를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라카르, 벤투스, 펠수안, 타찰리 씨족이 북쪽 방향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국계는?”
“저들 중엔 없습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나아가 봐야 키르자트 세력권이니까요.”
“그렇다면 손님이겠군.”
페르난데스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이 시기의 손님이라면 환대해야 했다. 내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적을 더 만들어낼 필요는 없으니.
-톡.
페르난데스는 테이블을 작게 두드렸다. 천막 바깥에서 웃고 떠드는 키르하스의 모습이 선하게 보였다. 그녀는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즐거이 땀 흘려, 부족민들의 민심을 얻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따듯하게 미소 지었다.
‘장하구나.’
그녀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과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재능이 개화하고 있었다.
이단심문청의 헤레티카들에게 직접 사사한 무예는 인퍼머르를 거치며 점점 더 발전했고, 이제와 그녀는 수인 전사들 사이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군요.”
그의 미소를 보며 파르탁은 킬킬거렸다. 그는 키르하스를 불쌍한 꼭두각시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가 준비한 대외적인 가면이었다.
키르하스가 일구어낸 대부족의 배후에서, 페르난데스가 군림할 것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런 파르탁을 보며 혀를 찼다.
‘어리석은 놈.’
-저게 정상이다.
‘주술사는 심계를 숨길 줄 알아야 해.’
-지배의 사슬이 얽혀 있는 입장에서, 심계를 숨기는 주술사는 우리한테 죽지. 저건 놈의 처세술이야. 굳이 심계를 숨기지 않는 것. 그것이 오히려 현명하지.
파르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페르난데스에게 깊게 허리를 굽혔다.
“주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페르난데스는 막사를 떠나가는 파르탁을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
바트라스는 수인 연합의 야영지에 도착한 직후부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으음···.”
그의 원로들이 낮게 신음하며 연합 야영지를 바라보았다. 막사의 수가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있었고, 쓰레기가 거리를 굴러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부족 전사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한껏 예민해진 눈으로 초조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습격이라도 당한 것인가?”
“부족장. 뭔가 이상합니다.”
“일단 막사를 펴라. 그리고 부상자들을 수습해. 나는 의회에 가보겠다.”
“예.”
부족 전사들은 연속된 격전과 오랜 행군으로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투탄 가르텝의 군대를 피해 도주할 수는 있었지만, 부족 전체가 겪은 피해가 적지 않았다.
바트라스는 자신의 곁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피엘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따르겠습니다.”
“무엇이 보였느냐?”
“네. 확실히.”
피엘은 벌꿀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페르난데스는 막사에 깔아둔 융단 위에 정좌하고 앉아 가만히 만트라를 짚고 있었다. 그의 머리 뒤에 불길한 헤일로가 연신 이글거렸다.
그의 발치에 놓인 촛불이 일렁거리며 춤추고 있었다. 그 빛에 따라 그림자가 너울지며 페르난데스의 얼굴에 기묘한 음영을 남겼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의회에 들어간 바트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탄 가르텝이 선전포고를 했소. 우리는 놈들과의 교전 끝에 병력을 수습하고 퇴각하던 참이오.”
“어째서? 놈들은 키르자트와 분쟁 중이던 것 아니었소?”
“우리에게 보낸 사절을 암살했거든.”
“···뭐?”
바트라스는 잠시 침묵한 후, 당황한 원로들을 바라보았다. 키르자트계 매파와 중립 매파 원로들이었다. 이들 중 제국계 비둘기파 원로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제국에서 파견된 요원이 놈을 암살했소. 우리 부족 야영지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투탄 가르텝이 곧장 무력 시위를 시작했소.”
“빌어먹을 인간 놈들!”
제국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원로들은 일제히 이를 갈았다. 바트라스는 잠시 뜸을 들이곤 황야의 북부를 짚었다.
“키르자트 국경선 근처에서 여기까지, 놈들은 수인 부족들을 향해 진군하고 있소. 다른 원로들은 어디에 있소? 지금은 정치를 할 때가 아니오. 사태가 시급하단 말이오.”
“으음···.”
“그 겁쟁이들은 떠났소.”
“뭐?”
“우리가 대족장을 선출하기로 했거든.”
“···뭐라고? 대족장?”
호족 연합의 전통에 따라, 의결권을 가진 원로회 의원의 만장일치가 있다면 대족장이 선출될 수 있다. 이 말은, 대족장 선출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원로회는 결코 만장일치가 날 수 없으니까.
바트라스는 대족장 선출이라는 말에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이 놈들, 설마 비둘기파 의원들을 모조리 암살한 건가?
그는 천천히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설마 평화 규율을 어겼소?”
“그럴리가! 놈들은 겁을 먹고 떠난 것이오!”
“···누구한테?”
바트라스는 다소 안심했다. 아무리 막나가는 놈들이라 해도 설마 의원을 암살하진 않았겠지. 그러나 의원들이 의결권을 포기하며 연합 의회를 떠났다는 것은 여전히 대단히 미심쩍었다.
“신에게.”
“···신? 그게 지금 무슨 개소리요?”
바트라스가 당황한 것을 보며 의원들은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그 사이에서 파르탁이 킥, 하고 웃었다. 바트라스는 날선 눈으로 파르탁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오?”
“부족장 님.”
그의 곁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피엘이 퍼뜩 그의 팔을 잡았다. 바트라스는 파르탁을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다가, 피엘을 내려보았다.
“무슨 일이냐?”
“저들의 말은 사실입니다. 신성이 느껴집니다.”
피엘의 눈이 천장 어딘가를 향했다. 그녀의 벌꿀색 눈동자가 천장, 지붕, 그리고 그 너머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력 흐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흐름의 끝에서, 마력을 제어하던 페르난데스의 손이 문득 멈췄다.
거리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데스와 피엘의 시선이 마주쳤다. 피엘은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페르난데스의 시선을 느끼고,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 있었군. 대천사.”
잊기 어려운 외모긴 하지. 지혜와 진리의 피에라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