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폭풍의 핵 >
*
페르난데스로서는 영 기분 좋은 말은 아니겠지만, 호족 전사들 사이에서 ‘두 영웅의 쟁패’라 일컬어지는 격전이 마무리 되고. 두 사람은 수많은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거의 환희에 가까운 소란을 들으며 술잔을 나누었다.
대황야의 밤은 서늘하고, 맑은 하늘이 높았다. 화톳불이나 모닥불 정도의 광해(光害)로는 가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저 밤하늘 너머에 너울져 있었다.
맑고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고기 기름 끓는 냄새와 알코올 향이 함께 떠도는 시끌벅적한 밤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독한 과실주를 입에 머금고 굴렸다.
알싸한 향이 예민한 후각을 마비시켰다. 그러던 중, 다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다리안은 전사들 사이에 파묻혀 껄껄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잠깐 나 좀 볼까?
그러지, 페르난데스는 술로 혀를 씻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사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파르탁은 킬킬거리고 웃었다.
*
“흐어, 죽겠군.”
“취하지 않았을 텐데?”
“물론 마력을 돌리면 취기 따윈 아무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래서야 운치가 없지 않나. 친구.”
“우리가 벌써 친구가 되었나?”
“아무렴.”
다리안은 악의 없이 웃었다. 그들은 어두컴컴한 막사 안에 들어와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찻물을 내어주며 협탁에 앉았다.
“마시게. 독은 없으니.”
“있어도 무슨 상관인가.”
다리안은 호쾌하게 웃고는 단번에 차를 들이켰다. 탁, 빈 찻잔을 과시하듯 협탁 위에 내려 놓으며, 다리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자네의 이름을 알려주게.”
“날 이기면 말해주겠다 하지 않았나.”
“그럼 반대로, 내가 자네 이름을 맞춘다면 내가 이긴 것으로 쳐 주겠나?”
“바라는 게 뭔가?”
“내 의제(義弟)가 되게.”
“···뭐?”
다리안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페르난데스를 바라 보았다.
“내가 추측하는 것이 맞다면, 자네는 나보다 어릴 테니. 자네가 내 형이 될 수는 없지 않겠나.”
“그 뜻이 아닌데, 호형호제라도 하자는 건가?”
“바로 그걸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막사 안의 공기는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다리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의 눈을 파고들고 있었다.
“훌륭하군. 이유를 알 수 있겠나?”
“대황야엔 뜬소문과 헛소문, 그리고 허황된 전설이 돌아다니지. 야만적인 곳일세. 자네는 알겠지. 나는 황제 폐하의 눈일세. 내가 이 황야에 온 이유는 방랑이나 편력 여행이 아니야.”
“설마 날 찾아 왔나?”
“목적은 아니되, 이유는 되겠지.”
다리안은 자신의 잔에 주전자를 기울여 찻물을 따랐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검붉은 찻물이 잔 안에서 찰랑였다.
“처음엔,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네. 우리 제국이 심혈을 기울여 정교하게 만들어내던 판도가 어그러지기 시작했지. 페이른 왕국 전역에 워커 사태가 터져 왕실의 존립이 위험하단 이야길 들었네.”
“그리고?”
“워커 사태를 간신히 진정시키는가 싶더니, 이번엔 엘프 해상 왕국이 항구도시를 포기하고 해상 지배권을 포기했다고 하더군. 신이 나타나고, 용이 나타나고. 이런 허황된 소문과 함께 말일세.”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다리안을 바라보았다. 다리안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웅의 눈. 아니, 황제의 눈. 황제의 단죄자이자 가장 날카로운 창이 가질 법한 위압감 있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아직 어리다. 페르난데스는 저 눈을 가진 사내를 수십 년간 적대하고도 살아남았고, 지금 시점의 다리안은 아직 여물지 않은 청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러나 영웅은 영웅이던가.
“본 제국은 촉각을 기울였네. 동부 왕국 연맹이 무너지기 직전이었거든. 당장 술탄과의 전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연맹의 지원이 없다면 전황이 크게 불리해질 판이었네. 페이른은 당장이라도 데인 왕실에 선전포고를 하기 직전이었지.”
자네도 알겠지만. 다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찻잔에 찻물을 부었다. 찰랑, 잔의 끝까지 차오른 물이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그러나, 다리안은 페르난데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데인 왕실은 허술하기 이를 데 없었네. 왕위 계승권자들의 분쟁, 그리고 통치를 거의 도외시한 노왕까지. 페이른에게 적당한 명분만 주어진다면 당장 무너질 나라였지. 한 사람, 갑작스럽게 등장해 원탁 기사까지 오른 젊은 기사가 없었다면 말일세.”
“···.”
“누구였겠나? 예상이 되나? 이런 난국에서, 동부 왕국 연맹을 유지시킨 위업을 세운 사내가 있다면. 그게 누구였겠나?”
“데인 왕국의 왕, 기사왕 비센테가 아니겠나.”
“그 시절 비센테는 당장 축출당해도 이상할 것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네.”
-주르륵.
찻물이 잔을 넘어 협탁으로 흘러내렸다.
“본 제국의 모든 정보기관이 급파되었지. 사태를 파악해야 했네.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지. 연고도, 근본도 알 수 없는 젊은 기사에 대한 소문이 온 거리에 돌고 있었네. 샤일드의 선택을 받은 기사. 건국왕의 재림, 되살아난 거인을 일도양단하고 용과 어깨를 나란히 한 위대한 기사. 그리고, 연기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네.”
잠시 뜸을 들이고는.
“연기처럼. 우리는 이것이 고도의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닐까 생각했네. 정치적 입지가 부족한 비센테 왕이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한 소문이 아닐까?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네. 샤일드 교회가 베이타서스 교회에 항의 서한을 보냈고, 그 전까지 샤일드를 국교로 삼던 데인 왕실에 베이타서스 교회의 입지가 급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했지.”
형편 좋게도, 협탁 위엔 양피지 지도가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온갖 낙서를 하며 전략을 구상하던 지도였다. 다리안은 협탁에 흐른 찻물을 찍어 지도 위에 발랐다.
동부 왕국 연맹의 군영에, 쿡. 하고.
“우리의 정보부 나리들께선 도발적인 가설을 세웠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베르토’가 베이타서스 교회의 인물이라면?”
그리고.
“정체를 숨기고 암약하는 베이타서스의 칼날. 이단심문청의 코드네임이라면? 정보에 따르면 그 기사는 대단히 젊다 하더군. 젊은, 그리고 압도적인 무위를 지닌 인물. 베이타서스 교회에서 애지중지하는 인물. 데인 왕국과 연고가 있는 인물. 정치적 상황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이를테면 귀족 출신의 인물.”
페르난데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1년 하고도 반년 전, 베이타서스의 성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었지. 데인 왕국의 한 산간 지방에서. 너무 먼 지방의, 순식간에 사라진 소문이라 정보부에서 온전히 파악하기도 어려웠네. 간신히 자네 이름을 알게 되었네. 친구.”
“···훌륭하군.”
페르난데스는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다리안의 굳은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맞네.”
“좋아. 동생. 그럼 이제 그 다음 이야기도 궁금하지 않나?”
“다음 이야기?”
“자네의 정체를 파악한 다음, 우리 정보부 나리들이 만든 계획 말일세.”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다리안을 바라보았다. 다리안은 빙글거리며 지도에 찻물을 찍었다. [십자 구호 기사단]의 군영이었다.
“믿기 어렵지만, 적어도 페이른 사태 이후부터 데인 왕실의 왕위 이양까지 그 사건의 중심부에 ‘그 사내’가 있다고 가정을 해 보았네. 아니면 이 사건들의 연결고리에 최소한의 역할을 했다고 보세. 우리 정보부는 그때 가설을 하나 세웠다네. ‘기획된 성자다.’ 즉, 업적을 몰아주어 표면에 부상시켜 물질 세계의 정치와 종교권의 불가분 원칙을 흐리게 만들기 위한 베이타서스 교회의 노림수다.”
“과감한 추측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억측이지. 하지만, 사실이라면? 동부 왕국 연맹 전체를 아우르는 존재감을 가진 단 하나의 상징으로 부상한다면? 동부 왕국 연맹이 온전히 규합된다면, 제국의 아성을 넘보는 신정일치 신생 왕국의 탄생이 될 수 있다네.”
“그래서, 그 자를 암살하려 했나?”
“내부에선 반발이 있었지. 녀석을 죽이면, 그것이 들통이라도 난다면, 그 반발은? 우리의 내부 입장은 ‘보류’였다네. 정보부 팀장 하나가 폭주하기 전까지.”
“···앙헬라···.”
“맞아.”
앙헬라. 코드네임 앙헬라. 셀리나 카셀호프. 다리안은 대황야의 한 귀퉁이를 쿡, 찍었다. 모사트 시였다.
“모사트 시의 봉화 사건은 우리의 예상 밖의 일이었네.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셀리나가 원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세. 그녀는 아마도 그 아래 잠든 파라오를 깨우고 싶었겠지. 덤으로 자네도 처리하고. 파라오의 권세로 키르자트의 후방을 찔러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당연히 승진감일세. 성공했다면 말이지.”
“그래. 성공했다면.”
“자네가 그 아래에서 파라오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파라오는 죽었고, 계획은 실패했으며, 오히려 자극 받은 키르자트에 의해 제국 국경선이 크게 위축되었네.”
“그리고 그 계집이 모든 파라오를 깨워 혼돈을 야기했다고 말하는 건가?”
“바로 그걸세. 키르자트에 승리를 쥐어 주느니 차라리 대황야를 모조리 불태우겠다는 뜻이었겠지.”
그 여파로, 다리안은 지도 탁, 하고 쳤다. 협탁이 작게 흔들리며 잔이 떨렸다.
“보게, 이 상황을. 십자 구호기사단은 베이타서스 교회의 정중한 항의 서한일세. 녀석들은 피아 구별 없이 이단 정황이 있는 모든 구역을 불태우며 전진하고 있어. 제국 시민들에게도 마찬가지. 그리고 동부 왕국 연맹의 파견군에 누가 있는지 아나?”
“원탁 기사라도 왔나?”
“정확하네. 원탁 기사, 파프나르메어. 알트하이스의 신흥 대영주. 그 자가 이끌고 온 기사단이 곧장 모사트 시를 향해 진격하며 그 사이의 모든 장애물을 박살내고 있다네. 더 없는 혼란이지.”
그리고 마침내, 다리안의 눈이 페르난데스를 직시했다.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들은 어떤지 아나? 그들은 이단심문이라는 미명 하에 이 대황야를 이 잡듯 뒤집으며 날뛰고 있어. 제국군이 진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세. 동부 왕국, 십자 구호기사단, 이단심문청. 이들이 지금 가장 바라는 바가 단 하나일세.”
성자의 생존.
“자네가 폭풍의 핵일세.”
“정리 고맙네. 정보가 필요하던 차였지.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의형제 같은 소꿉놀이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테고.”
“거래하지.”
“거래라?”
페르난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리안은 막사 밖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내 부하는 유능한 마법사일세. 그녀가 자네를 보고 놀라며 말하더군. 엄청난 수준의 흑마법사라고. 놀랍지 않나? 베이타서스의 성자이자 원탁 기사가 동시에 고위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그걸 파악하고 이 군영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나?”
페르난데스는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충분히 묵직한, 위협적인 협박이었다. 다리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동생. 자네에게 의형제를 청한 것은, 자네의 호의에 기대어 말하는 걸세. 내 패를 모두 보였고 자네 패는 모두 파악하고 있지. 내 정보력, 내 능력, 그리고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내 권위. 어떤가. 형제로 삼아 나쁠 것 없지 않겠나?”
“조건을 마저 들어 보지.”
“전쟁을 막아 주게. 동부 왕국의 폭주, 교회의 폭주, 이단심문청의 폭주를.”
다리안의 눈이 호쾌하게 빛났다. 미워할 수 없는 사내였다. 당장 페르난데스의 목줄을 옥죌 수 있는 패를 지니고 있음에도. 이를 숨기고 돌아가면 어마어마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조커 카드를 쥐고 있음에도.
다리안은 ‘호의’를 얻고자 그 패를 모두 내려 놓았다. 거래라고 했으나 이것은 거래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페르난데스의 호의에 기대어 하는 부탁이었다.
자신의 이점을 내려놓고 올곧게 하는 부탁. 그 저의는 분명, 페르난데스와 친해지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이겠지. 그러니 미워할 수 없었다. 심지어, 페르난데스는 지금 욕심이 났다.
‘물질 세계 최강자가 예정된 영웅과 의형제가 된다라···.’
-이건, 좋은데?
심지어 페이자쉬 마저, 이 올곧은 사내의 가능성을 보며 침을 삼켰다. 페르난데스는 애써 미소를 감추며 말했다.
“그래서 이 ‘아우’가 얻는 것이 뭐지?”
“복수와 정의, 그리고 평화. 자네에게 앙헬라. 그 배신자. 셀리나 카셀호프의 목을 가져다주지.”
“산채로 가져온다 약속하게.”
페르난데스는 손을 내미는 다리안을 잠시 바라보고,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 한 영웅과의 약속이 아니었다. 제국과의 암실 밀약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페르난데스는 지도를 살폈다. 대황야의 판도가 보다 단순하게 그려졌다. 그 사이에 난 작은 균열까지도.
수인 호족 연합이 나아갈 길. 사냥의 계절. 대족장 키르하스. 서부 황야에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콘.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그리고 깊게 미소 지었다. 좋다. 그 판에 어울려주지. 하지만, 그는 한번에 한가지 수에 착수하지 않는다.
이보다 큰 체스판 위에서 장고 할 때에도, 그는 단 하나의 수에 착수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를 멸망시킨 열다섯 악적 중 하나였으니.
그 악적의 손을 잡은 영웅은, 호쾌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