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작별 행렬 >
*
페르난데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행장을 정리했다. 혼자 떠나는 것은 오랜만이지만, 그는 본디 혼자 일하는 것이 더욱 편안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최근 한 해 동안의 여정이 그에게 더 낯선 경험이었다. 누군가의 신뢰를 얻고, 누군가의 동료가 되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지키는 일이.
그의 천성은 계략, 모략, 파괴와 함정에 더욱 치우쳐져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썩 즐겁지 않게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투둑.
행장을 두른 노끈 하나가 끊어졌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손을 멈추고 끈을 잡았다. 마음의 빈틈만큼, 대비가 부족했구나. 반성해야만 한다.
우리의 상대는 인간이나, 하찮은 악마들이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신이다. 또는, 그 신조차 이기어내고 마침내 물질 세계를 무너트린 대군주들이다.
지옥의 대악마들. 너무도 강대한 힘을 지닌 탓에, 신성마저 얻어낸 존재들.
필멸자나 영적 존재들이 ‘신성’이라 부르는 것을 얻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가설이 있지만, 페르난데스는 ‘힘의 중력’설을 지지했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한 존재에게 집약된 힘의 밀도가 극한에 치달았을 때, 그 존재의 내부에 휘몰아치는 힘이 구조를 무너트리며 붕괴하고, 그 용광로 안에서 신성이 자리 잡는다.
따라서, 많은 이들의 상상과는 달리 신성은 지옥 마력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아주 순도 높은 어떤 종류의 ‘힘’일 뿐이다.
-촤락.
페르난데스는 능숙하게 매듭을 묶고는 어깨 위로 행장을 둘렀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행장이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신성을 얻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를 이기기 위해선, 안주해선 안된다.’
편안함, 안락함, 자비심, 이타심, 공명심과 자존심. 그런 모든 나약한 요인들은 최후에 있을 전투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호흡을 뱉고는 각오를 다졌다.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는 막사의 천막을 들추며 별이 쏟아질 듯 너울거리는 밤하늘 앞으로 나섰다.
새삼스러운 일이다.
한 평생, 각오 없이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천막 앞에서, 파르탁이 보라색 모포를 손에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페르난데스를 잠시 훑어보고는 작게 감탄했다.
“누가 봐도 대황야의 방랑자 같습니다. 주군.”
“어쩐 일이지?”
“주군께서 먼 길을 홀로 떠나시는 바, 신하 된 도리로 어찌 마중이 없겠습니까.”
파르탁은 킬킬거리며 그에게 모포를 건넸다. 두꺼운 모직물로 직조된 거친 모포였다. 페르난데스가 그것을 받아 들자, 파르탁이 속삭였다.
“신과 악마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귀물입니다. 이제 저보다는 주군께 더 필요할 것 같군요.”
“고맙게 받지. 돌려 주겠다.”
“형편 좋게 쓰시고, 필요치 않으실 때 아무데나 버리시길.”
파르탁은 킬킬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할은 기억하나?”
“분열과 조언. 알고 있습니다.”
“내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니, 나를 배신하지 말거라.”
“큭큭, 주군. 제 심장에 사슬을 걸어 두시고는 배신을 말씀 하시다니요.”
파르탁은 여전히 그의 심장에 걸린 주박을 느낄 수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짧은 손짓 한 번이면 그의 길었던 삶은 그대로 끝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것이 즐거웠다. 그것은 아직 페르난데스가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뜻이며, 동시에 페르난데스가 신의 사도나 영웅 따위가 아닌, 그와 동류라는 뜻이었으니까.
강대하고 매력적인, 그리고 그 능력에 끝을 알 수 없는 존재.
파르탁은 내심 그가 대악마나, 혹은 그에 준하는 악마 대공이리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페르난데스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그의 목표와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키르하스를 잘 부탁한다.”
“그 멍청한 계집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만 지낼 것입니다.”
페르난데스가 파르탁에게 지시했던 것은 분열과 갈등, 그리고 조언이었다. 아직 키르하스에겐 그녀의 편을 들어줄 유능한 참모진도, 그녀를 보좌할 정치적 기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파르탁이 대신할 수 있었다. 그는 매파 원로들에게 마약을 중독 시키고 마력 주박을 걸어 배후에서 암약하던 대주술사였으며, 이 수인 호족 연맹에서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오랜 시간 활동한 정치가였으니.
그러나 그에게 약점이 있다면 전사들 사이의 지지가 최악이었다는 점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오히려 그 점을 통해 키르하스를 도우라 지시했었다.
-악역을 맡으라.
-기꺼이.
대외적으로 키르하스와 대립하면 할수록, 파르탁에 반하는 세력들은 키르하스에게 영입될 것이다. 그리고 키르하스의 반대 파벌 또한 마찬가지로, 파르탁의 휘하에 들어오겠지.
수인 호족 연합이 그렇게 안정화 된다면. 키르하스의 파벌도, 그리고 그 반대 파벌도. 모두 페르난데스의 손 안에 들어온다.
“어딜 먼저 칠 예정이냐?”
“저희는 동부 비둘기파 부족들을 정벌하겠습니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대립 대족장이라는 녀석이 나타났다 하더군요. 큭큭, 어리석은 것들.”
“제국은?”
“그 어린 창잡이가 떠났습니다. 제국은 적어도 당분간은 우리 부족 연합을 적대하지 않을 겁니다. 주군.”
“그 정도면 훌륭하다. 동부를 먼저 치기로 했다면, 아포가르텝 왕조를 그 다음 수에 두어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겁니다.”
파르탁이 깊게 절하며 물러섰다. 페르난데스는 파르탁이 건넨 모포를 몸에 두른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황무지의 저 너머로 걸어 나갔다.
*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야영지를 벗어나는 것은 그에겐 대단히 간단한 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지난 며칠간 이 야영지의 가장 사소한 골목이라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고, 야영지의 모든 인물들을 행동 반경과 활동 시간 별로 정리할 자신마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야영지의 쪽문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실루엣을 보고 멈춰 섰다.
“키르하스.”
“은공.”
어둠 속에서,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카단의 황금 가면을 손에 넣은 이후, 그녀에게 무엇이 달라졌는지 정확히 묘사하긴 어려웠지만. 그녀의 내면은 점점 더 야수처럼 변하고 있었다.
마치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날카롭게, 그리고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키르하스는 가만히 페르난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깊었습니다. 산책을 나서기엔.”
“너는 여기에 속해 있다. 키르하스. 이들에겐 네가 필요해. 그리고 너에게도 이들이 필요하고.”
“아닙니다. 은공.”
-스륵.
키르하스는 야영지 입구에서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횃불의 빛 아래에 선 그녀는 먼 여정을 위한 채비를 모두 마친 모습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혀를 찼다.
“따라오지 마라.”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뭐?”
“그날, 그 날 새벽을 기억하십니까. 은공? 우리에겐 이유보다 목적이 더 중요하다고요. 제가 여기에 남아있길 바라신다면, 제게 그래야 할 이유 말고, 제가 여기에서 해야 할 목적을 주십시오.”
“너는 어린애가 아니야. 키르하스. 네 스스로 행동할 때가 되었다.”
“후.”
키르하스는 고개를 떨궜다. 검은 머리칼이 비단처럼 흩어지며 그녀의 머리 앞을 가렸다. 깊은 한숨, 그리고 그 끝에—
그녀의 머리칼 사이에서, 맹수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스스로 행동하겠습니다. 은공. 저는 은공을 보내지 않을 겁니다.”
“나에게 대적하겠다?”
“필요하다면.”
키르하스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잠시 움찔 떨었다. 가면처럼 무표정했던 얼굴에 실금이 그어지듯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훌륭하다. 키르하스.”
그는 웃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품을 벗어나는 영웅의 씨앗을 바라보며. 그는 짜릿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무릇, 영웅이란 저래야지. 서부 대황야의 방패, 불패자 키르하스는 누군가의 그림자 아래에 갇혀 있어선 안 되었다.
“무기를 들어라. 얼마나 늘었는지 보고 가야겠다.”
“···은공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스르릉.
키르하스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며, 날카로운 데인 왕국제 장검이 달빛을 반사했다.
*
-콰드드득!
키르하스의 검이 공중을 거칠게 긁어 내었다. 페르난데스가 검을 빗겨 막으며 공세를 흘릴 때, 키르하스의 눈이 빛나며 손목이 빠르게 교차했다.
-키이잉!!
크로스가드에 맞물린 장검이 대검의 검날을 유연하게 타고 흐르며 그 틈을 파고 들었다. 빠르고, 정밀한 카운터였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고개를 틀어 검날을 피했다.
-키잉!
페르난데스의 대검이 큰 원형을 그리며 키르하스의 공세를 흘렸다. 짧게 모아 잡은 칼자루를 튕겨, 거대한 원을 그리며 그 앞으로!
-카앙!
키르하스는 거의 크로스가드에 다 닿을 정도로 바싹 당겨 페르난데스의 검을 튕겼다.
‘격검?!’
평소 키르하스의 공격 패턴을 생각한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격 방식이었다. 게다가 무기의 차이까지 있음에도, 격검을 시도하다니?
힘과 질량, 그리고 무기의 차이에서 오는 충격으로 키르하스는 세 발자국 뒤로 튕겨나가 자세를 도사렸다. 여력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어쨰서?”
“후···.”
어째서 힘 싸움을 시도했느냐? 페르난데스는 이어 물으려다가, 키르하스가 천천히 칼날을 납도하는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익숙한 검세였다.
인간의 검술, 기사들의 검술, 낭인들의 검술,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체의 정중선을 최대한 지면에 닿도록 낮게 잡고, 반호흡 내뱉으며 납도한 칼자루를 바싹 끌어당겨 잡은 저 자세는···.
‘엘프의 검술···!’
엘프의 거합 검술이었다!
‘역시 천재란···.’
엘프 검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마도, 엘프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의 검술을 자연스럽게 익혀 체득한 것이겠지.
지금까지 그녀의 성장이 더뎌 그 검예에 닿지 못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키르하스의 몸놀림, 그리고 그녀의 재치와 순발력은 이미 더 없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엘프 검술의 기수식을 따라 잡으며 조용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공격 직전의 사자가 몸을 움츠리는 것처럼. 대단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훌륭하구나 키르하스. 나는 이제 마음이 놓인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느슨하게 잡고, 천천히 칼을 들어 올렸다.
“오거라.”
그는 흉포하게 타오르는 키르하스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
페르난데스는 얇게 베인 목덜미를 더듬으며 웃었다. 그녀가 가진 망설임이 끝내 검을 멈춰 세웠다. 키르하스의 공격은 페르난데스의 몸에 먼저 닿았지만, 그 끝에서 더 깊게 들어오진 못했다.
그것은 페르난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신으로 키르하스의 어깨를 가볍게 타격해 무장을 떨어트리고는 다시 칼을 집어 넣었다.
-스르릉.
키르하스는 아무 말 없이 떨어진 자신의 검을 내려 보았다.
“실전이었으면 제가 이겼습니다. 은공.”
“실전이었으면 이렇게 싸우지 않았다. 키르하스.”
“···변명이에요.”
“피차 마찬가지 아니냐.”
페르난데스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키르하스의 귀가 낮게 눕혀지며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제가 짐이 됩니까?”
“아니.”
“그럼 어째서 홀로 떠나십니까. 은공.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제게 이들이 필요하다고요? 제게···.”
-덥썩.
키르하스는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덮고 있는 페르난데스의 소매를 잡았다. 그녀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제게 이유 말고, 목적을 주십시오. 은공. 제가 살아있는, 제가 여기에 있는, 제가 여기까지 올라와 닿은 목적은 당신이었습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눈을 맞췄다. 울먹이는 그녀를 향한 페르난데스의 눈은 따듯하게 웃고 있었다.
“은공이 틀렸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속해있지 않습니다. 저는, 저는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이단심문청도, 만신전도 아니라. 당신에게요.”
“고맙다.”
-스륵.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머리를 한 차례, 강하게 쓰다듬고는 팔을 빼냈다. 자신의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팔을 느끼며, 키르하스는 아, 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네가 이들의 목적이 되길 바란다. 키르하스. 내가 너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그리 말하지 말거라.”
그는 키르하스의 이마에 살짝, 자신의 이마를 붙였다 뗐다. 그는 물기 어린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을 바라보며 짧고 강하게 끊어 말했다.
“우리가 영영 작별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키르하스는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영 작별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
-화려하게도 인사 하는군 페르난데스.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이제 미련은 끝났나?
‘거의.’
허술한 마음을 가진 채 걷기엔, 이제부터 펼쳐질 일들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앞으로는그가 끊어낼 수 있는 마음은 최대한 끊은 채, 홀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아직 난관이 하나 더 남았다.
야영지 밖, 드넓게 펼쳐진 황야. 작은 협로를 따라 저 앞에. 황무지를 바라보고 있는 외딴 망루의 곁에, 그 아래에 타오르는 모닥불 근처에.
아벨이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하나씩 나타나는군 그래.
‘아마 말을 맞춰 두었겠지. 아벨은 그런 여자니까.’
키르하스와 그의 작별에 끼어들지 않을 정도로 사려 깊은 여인이며, 동시에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니 저것은, 그의 여정을 방해하기 위한 기다림이 아니라. 축복하기 위한 기다림일 것이다.
아벨은 걸어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왔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