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내가 돌아왔다. >
*
별똥별이 하늘을 타고 흐른다. 원만한 호선을 그리며, 헤아릴 수 없는 별빛 사이를 가로질러서. 아벨은 푸르게 타오르는 달빛과 무수히 반짝이는 색색의 별들 아래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메말랐지만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올 때 마다 아벨의 밀밭 같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왔느냐.”
“그렇소. 아벨.”
아벨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이 정오의 가을 하늘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장생하는 종족이란, 불멸자란 시간의 흐름 아래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 법이니.
설령 그녀가 불멸성을 잃었다 하더라도, 느긋함은 평생에 걸쳐 이어져온 그녀의 천성이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무엇을 말이오?”
“홀로 떠남을. 페르난데스. 정녕코 후회하지 않겠느냐? 네가 헤매일 때에, 저 깊은 밤 속을 방황할 때에, 네가 홀로 남았음을 후회하지 않겠느냐?”
아벨은 결코 자신을 데려가달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상대를 조용히 설득하는 편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런 그녀의 발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키르하스의 애절함, 그리고 일방적이고 매몰된 사랑처럼. 그를 향한 이런 낯선 호의들은 그의 마음을 따듯하게 달구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후회는 이미 충분히 했소.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 위한 발악 뿐이지.”
“페르난데스.”
“그만.”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젓고는 한 발 더 걸어갔다. 사박, 황무지의 거친 모래가 그의 발치에 흩어졌다.
“우린 각자에게 할 일이 있을 것이오. 아벨.”
“나는 네가 걱정이 된다. 너는 강인하고, 굳건한 사내다. 무너지느니 부러지기를 택하는 종류의 사내지. 나는 네가 강하여서, 오히려 그것이 걱정이야.”
아벨 또한 한 발자국 더 걷는다. 정확히 페르난데스가 그녀에게서 멀어진 만큼. 그들의 거리는 결코 멀어 지지도, 그러나 좁혀 지지도 않았다.
아벨은 서두르지 않는다.
“페르난데스. 더 굳세게, 더 강하게 견디기 위해서 네가 너 스스로를 망치는 길이. 나는 그것이 두렵구나.”
타락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그녀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대단히 고명한 흑마법사임을 알고 있었다. 가이메른 대왕의 수많은 보호 주문이 걸린 기함을 한 수에 박살냈고, 또 그 이후에 이루어진 모든 마법전에서 단 한 순간도 패배한 적이 없었으니.
그녀는 페르난데스에게 걸려있는 제약을 알고 있었다. 힘을 얻는 것엔 더 쉽고 빠른 길이 있다. 페르난데스가 조금만 마음을 달리 먹는다면 언제든 취할 수 있는 힘들이.
지옥 마력과 악마의 힘이.
만일 일이 그르친다면. 지금까지 아슬하게 걸어온 그들의 외나무다리에서 그가 홀로 떠난 순간에 자칫 삐끗하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품 밖에 있어, 그녀가 미처 잡아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페르난데스는 무너지느니 발악할 종류의 인물이었다. 목표를 향해 달리기 위해서라면 육신도, 영혼도 아낌없이 불태우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벌써 제법 오래 전, 아벨과 그가 처음 만났던 때에 했던 말처럼. 불길 같은 사내였다. 불길의 시대, 그리고 전란의 시대에 더 없이 어울리는 사내.
그러니, 페르난데스는 아벨이 지금 무엇을 근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말을, 그는 어쩐지 선하게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타락하지 말거라.’
그리고 페르난데스 또한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아벨이라면, 그녀라면 그 말에 그가 무어라 대답할지 알고 있을 테니까.
‘육신처럼, 타락은 도구에 불과하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곧, 아벨이 한 걸음 다가왔다. 페르난데스가 물러나기 전에. 두 사람의 거리가 한 보 더 가까워졌다.
“네가 떠난 이후에, 나는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
“홀로 여행을 떠나주실 수 있소?”
페르난데스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를 설득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아벨을 피하지 않았다.
한 발자국 더, 오히려 더 가깝게 다가갔다.
“어디로 가면 좋겠느냐?”
“동부 왕국 연합과 십자 구호기사단의 군영으로. 황무지를 그대로 가로질러 가야 할 것이오. 위험한 여정이 될 테지.”
한 발 더.
“용을 위협할 수 있는 여정이 어디에 있겠느냐. 내가 그 인간들을 찾아가 무엇을 하길 바라느냐?”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내가 아직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전해 주시오.”
둘은 연극처럼 말을 주고 받으며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어느새 코 앞이다. 그를 바라보는 아벨의 눈이 작게 떨렸다.
“···그리고?”
“지금 콘클라베는 총 셋이 남았소. 아포타자르는 수인 호족 연합이 상대할 것이고, 투탄 가르텝에겐 내가 가고 있소. 남은 하나를 처치해야 하오.”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어차피 뭄토는 힘을 잃었다. 우리가 자유를 되찾은 파라오들을 적대해야 할 이유가 있더냐?”
네크로폴리스의 콘클라베들은 그저 정복과 군림만을 바랄 뿐, 학살이나 악마 숭배와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정복욕, 지배욕, 그리고 허영심이 그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일반적인 문명 국가의 정복 군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보다.
그들은 합리적인 거래 대상이다. 언데드에 대한 혐오감만 감출 수 있다면. 그리고 아벨 또한 언데드에 가까운 존재로서 그들을 그저 야망 넘치는 문명국으로 보고 있었다.
굳이 먼저 건드려 이로울 것이 없었다. 아벨은 조용히 물었다.
“네가 이 황야에서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페르난데스, 이제 이 황무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여 있다. 전쟁은 일개 필멸자의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야.”
두 국가의 전쟁일 경우, 평화 조약이 채결될 수 있었다. 세력이 셋이라면 상호 견제를, 넷이라면 황야를 양분해 나누어 갖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다섯, 여섯, 일곱이라면. 그 사이에 얽힌 복잡한 은원과 외교, 모략은 한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을 막는 것도, 평화를 되찾는 것도 좋지만. 아벨, 알다시피 나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소.”
그는 전쟁을 막고, 분쟁을 봉합하기보다는. 그 싹을 직접 제거하는 것을 선호했다.
“뭄토의 힘이 약해지고, 콘클라베들은 뭄토의 힘을 갈취해 사용하고 있소. 뭄토의 의지는 지금 대봉인 속에 잠들어 물질 세계에 투사되지 못하고 있지. 지금이 기회요.”
“무슨 기회 말이냐?”
“뭄토의 힘을 품고 있는 콘클라베가 한 사람, 또 한 사람 쓰러질 때 마다. 뭄토는 자신의 힘을 영구히 잃어버릴 것이오. 콘클라베는 놈의 가장 강력한 하수인들이었고, 그들의 힘과 세력이 모두 토사 속으로 쓸려 나간다면···.”
페르난데스의 등 뒤로 별똥별 하나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녹색 잔상을 남기며 황무지 저 너머로. 은하수 아래에, [아벨레사스 자리]의 발 밑으로.
페르난데스의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대악마의 자리를 하나 줄이겠소.”
신을 죽이겠다는 선언과 동일한 말이었다.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말이 품고 있는 음산한 어조에 몸을 떨었다.
“가능한 일이겠느냐?”
“해봐야지.”
“돌아올 수 있겠느냐?”
그것도, 해봐야지. 전생에 그 어떤 영웅들도, 신의 챔피언들마저도. 가장 격렬했던 물질 세계 최후의 대전쟁 당시에도 대악마를 죽이는 것에 성공한 자가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다섯 대악마를 지옥으로 추방하거나, 봉인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기억했다.
대악마와 만신전의 신들 모두 물질 세계에 개입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자신의 신성을 소모하게 된다. 심지어 실체화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뭄토는 달랐다. 최후의 최후에 깨어난 그 대악마는, 물질 세계의 장대한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신성을 획득한 ‘인간’이었다.
즉, 온전히 봉인이 풀리기만 한다면 놈은 대악마의 힘을 온전히 물질 세계에 투사할 수 있었다. 그가 속한 세계가 바로 이곳이었으니.
물질 세계의 투쟁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악마. 반드시 처리해야만 하는 대악마.
그리고, 물질 세계에 속한 이상 죽음 이후에 다시 부활할 수 없는 대악마.
페르난데스가 노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시는 부활할 수 없는 유일한 대악마가 지금 역사상 가장 약해져 있는 순간이 왔다.
다시는 이보다 좋은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적기요. 가장 위험한 적수를 없앨 수 있는 최적의 시기지. 그러나 놈이 적어도 이 세계에서 만큼은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라는 것엔 이견이 없소. 그러니, 그 싸움에 그대와 키르하스를 데려갈 수는 없소.”
“짐이 되기 때문이냐?”
아벨이 슬프게 웃었다. 용의 힘을 모두 잃은 필부와, 어린 수인족 여인이라면 짐이 되겠지.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의 도움이 내 약점이 될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내가 당신을, 당신들을 아끼니까. 적어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끼는 존재일 테니까. 악마는 그런 틈을 파고들 테니까.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대신.
-사륵.
모래를 밟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아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별똥별이 흘러 내렸다. 깊은 밤, 달빛이 그들의 포개어진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서로의 달뜬 숨이 코 끝에 섞였다. 잠시간의 호흡 끝에,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의미를 말하는 것은, 낭만이 없소.”
“···못된 녀석.”
아벨은 그 뒤로 말을 잇지 못했다. 페르난데스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모포를 몸에 둘러 썼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달빛이 아른거리는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살아 돌아오거라. 나는 기다리고 있겠다.”
페르난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벨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페르난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지상으로 스며 내려가고, 동녘 하늘에서 푸른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멜리실두르. 내 친구. 그를 가호해다오.’
*
‘오랜만이군.’
대화할 상대가 자기 자신밖에 없는 순간.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말을 걸 다른 상대를 찾을 수 없는 순간.
완벽한 고요의 순간,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드넓게 펼쳐진 대지만이 그의 벗으로 남은 이 순간이.
전생 이래로, 단 하루도 그는 온전히 홀로 걸어간 적이 없었다. 따라서, 오랜만이었다. 이 감각이. 친근한 고독이.
-그렇군. 오랜만이야.
수많은 실패를 건너 삶을 위해 도주하던 그의 전생을 떠올렸다. 이런 고독은 그의 가장 큰 벗이었다. 광기와 명정한 이지 사이의 어딘가를, 끝없이 묵상하며 홀로 나아가는 순간이.
‘잘 부탁한다. 페이자쉬.’
-그래. 해보자꾸나.
페르난데스는 행장에서 네크로폴리스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영혼을 조각 내는 저주가 깃든 암녹색 검신이 여명 아래에서 반짝였다.
페르난데스는 모포를 깊게 눌러 썼다. 신과 악마들의 눈을 피하고, 그 정체를 감출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다면.
아벨과 키르하스는 그의 이성을 붙잡아 두는 닻과 같았지만, 동시에 그의 가능성에 걸린 가장 큰 금제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그가 정의롭기를 바랐으니까.
우스운 일이다. 그는 애당초 정의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 아니던가.
-스겅.
페르난데스는 왼팔을 얇게 베어냈다. 핏물이 스며나와 단검의 검신 위로 떨어졌다. 그 저릿한 고통에, 페르난데스는 미소 지었다.
검날에 얽힌 저주가 그의 영혼을 부수고 있었다. 깊은 상처가 아니었던 탓에, 아주 느리게. 그의 신성 섞인 혈액이 저주와 길항하고 있었다.
영혼계에 한쪽 발을 걸치고, 천천히 부서지고 재조립되는 영혼을 느끼며. 페르난데스는 짙게 웃었다.
이제 그를 막는 금제 따윈 없었다.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선, 누구보다 악마처럼 행동해야 하는 법.
조각난 영혼 사이에 새로운 영혼이 스며들었다. 신에 의해 억지로 갈라졌던 영혼이, 신성의 빈틈을 찾아 서로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암녹색 안광이 흘렀다.
“내가 돌아왔다.”
와일드캐스트(방랑마법사)가. 더러운 피가. 영웅살해자가.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가.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