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와일드캐스트 (1) >
*
대황야는 먼 옛날부터 뜬소문과 미신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었다. 어딘가에선,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뱀이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 어딘가에선 도시를 삼키는 구덩이가 만들어진다고도.
심지어는 이따금씩, 푸른 하늘 위로 거대한 섬이 부유한다는 소문도.
황야를 오랜 시간 걷다 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신기루처럼. 형체 없이 떠다니는 소문들이 이 대황야에 맴돌았다.
그러나 모사트 시의 봉화, 세 왕조의 부활, 키르자트의 퇴각, 동부 왕국 연맹의 진격, 십자 구호기사단의 참전....
그로부터 언 3개월 후. 지금 이 황무지엔 그 어떤 순간보다 격렬하게, 그리고 그 어떤 시절보다 구체적인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내가 돌아왔다.
그리 말하는 사내가 있다고. 늦은 밤에, 깊은 새벽에, 모두가 잠든 그 순간에. 오아시스 도시의 권력자들부터 저 마약굴의 거렁뱅이의 귓가에까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내가 돌아왔다.
누군가는 그 소문의 주인공이 황제의 대승정이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술탄의 칼리프라고도. 어쩌면 대황야에 오랜 세월 맴돌았던, 아시트 시절의 악령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물론 상아시트 제국 시대의 파라오들이 무덤에서 깨어난 입장에서, 그런 소문들은 오히려 우스운 편이었다. 그러나 소문과 소문이 겹쳐지고 뒤틀리는 가운데, 대황야의 국경선, 그리고 전선 근방에 사는 모든 주민들은, 그 누구도 이 소문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 누군가가 있는 것이 확실하니까.
*
두 자루의 대검을 등에 이고, 낡은 흑단목 지팡이를 쥔 노인이 황야를 가로지르고 있다. 자줏빛 로브는 풍파에 시들어 너울거리고, 깊은 밤 화려한 별빛에 물든 하늘엔 녹색 달이 반짝이고 있었다.
-톡.
바싹 마른 손가락이 지팡이를 두드렸다. 흥얼거리듯, 노인은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낮은 허밍을 했다. 그리고, 그의 곁을 따르는 근육질 수인이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노사. 이미 너무 멀리 나왔습니다. 여기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쉬, 쉬—. 조용히.”
노인은 지팡이를 모래 사이에 깊게 박아 넣었다. 안저 밑에서 암녹색 안광이 새어 나오는, 광기 젖은 눈동자로. 노인은 하늘을 바라 보았다.
점성학은 그가 익힌 기초 학문 중 하나였다. 별빛과 그 흐름을 읽는 것은, 이제 와선 그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에 불과했다.
그는 별을 바라보며, 천문 너머의 그림을 읽고 있었다. 별무리 사이에 낀 마력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놈들이 우리를 우습게 생각하도록 놔두거라.”
“노사? 하지만 이대로 퇴각만 반복하는 것은 너무나 소모적인 일입니다. 방향도 잘못 되었구요! 연맹의 영토는 여기보다 남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부족 전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전사는 차마 ‘부족 전사들이 노사의 목을 따고 싶어합니다.’라고 이야기하진 못했다. 실제로 그것을 시도했던 전사들 중에 성공한 이가 없었을 뿐더러. 이 노인은 그의 부족을 구해준 마법사였다.
노인은 그의 말에 내포된 짙은 함의를 깨닫고 킬킬 웃었다.
“내가 칼을 들어도 놈들 전부를 감당할 수 있을진데, 감히?”
“이대로 서쪽으로 나아가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죽음이.”
노인은 키득거렸다. 황무지는 모든 방향에 울타리가 없는 거대한 평야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깊은 계곡도, 깎아지른 절벽도, 그리고 거대한 산맥과 갑작스러운 정글을 품고 있는 기상천외한 곳이었다.
애초에, 이곳이 황무지가 된 이유도 고대의 마법 탓이었다. 자연스러운 사막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 뜻이다.
노인은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탁.
지팡이가 마른 바닥에서 뽑혀 나왔다.
“죽음의 죽음이 있지.”
-화르륵.
노인의 지팡이 끝에서 녹색 불꽃이 퍼져 나갔다. 전사는 움찔 떨었다. 암녹색 불꽃 안에는 비명 지르는 해골과 망령들의 모습이 뭉쳐 있었다. 그 빛을 받아 일렁이는 노인의 얼굴은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놈들이 의기양양해 이대로 우리를 추격하게 두고, 너희 전사들 몇몇 중 쓸모 없는 녀석들을 가려 뽑아 놈들에게 먹이로 던져 주어라.”
“노사···.”
전사의 눈에 불만이 일렁거렸다. 아무리 자신의 부족을 구원한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그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흘이 걸릴 것이다. 너희 부족들의 도주가 효과적일 때 까진. 그 이후론 싸울래야 싸울 수도 없는 약골들만 남겠지. 꼬리 말린 개들 말이야.”
노인은 한참 큭큭 거리며 웃더니, 곧 이어 말했다.
“그리고 우리를 추격하는 놈들도 그걸 알게 해라. 우리가 나약해졌다는 것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
[귀찮은 짐승들···.]
네페르카 왕자는 불만스럽게 두개골을 딱딱 울렸다. 부유하는 황금 가마에 탄 채로. 그들은 벌써 수십일 간 놈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소규모 부족에 불과했지만, 파라오의 지엄한 명령에 따라 불평분자들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이었다.
그의 군단은 눈 앞에 걸리적거리는, 그리고 방해되는 모든 수인 부족들을 일소했다. 그들이 제국이 위대하던 시절엔 감히 파라오의 군대에 대적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미개한 짐승 토인들에 불과하던 놈들이다.
위대한 투탄 가르텝의 정예병들은 비록 그 근육이 바싹 마르고 해골이 바스라지는 와중에도 그들 하나하나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따라서 네페르카는 이 추격을 전투라기보단 사냥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냥은 귀족의 여흥이다. 네페르카는 황금 컵을 내밀었다. 곧 그의 시종이 썩은 포도주를 컵 안에 가득 부었다. 생전의 습관대로, 그는 우아하게 컵을 한 바퀴 돌려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고는 입 안에 머금었다.
-촤르륵···.
텅 빈 설하골 아래로 포도주가 흘러내려 그의 갈비뼈를 적시고 가마에 떨어졌다. 시종들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낡은 아마포를 꺼내어 흐른 술을 닦아 내었다.
[왕자 전하. 이대로 진격하면 사리오 협곡에 도달합니다. 매복에 유리한 지형이니 정찰대를 파견하시지요.]
[어리석은 소리 말라. 임마트. 매복을 하려거든 최소한 병력이 있어야 한다. 지난 사흘간 내리 도망만 치던 놈들이 매복을 준비했겠느냐?]
네페르카는 그의 수행 사제에게 킬킬거렸다. 이것은 오만함이 아니었다. 당연함에 가까웠다. 그들의 추격은 지난 며칠간 거의 잡힐 듯 말듯한 거리를 유지하며 이루어졌다.
그 아슬아슬한 추격전이 그나마도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위급한 순간마다 뛰쳐나와 어금니를 드러내던 젊은 수인 전사들의 목숨 값이었다.
네페르카의 군단이 도망치는 수인 부족 피난민을 따라잡을 때 마다 그들 중 일부가 돌출되어 목숨을 걸고 군단을 막아 내었다. 놀라운 분전이지만, 네페르카는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놈들의 규모를 볼 때, 이제 더 이상 소모할 병력이 없었다. 여기서 더 병력을 소모한다는 것은, 부족이 부족으로써 기능할 최소한의 인구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네페르카는 이들의 무능한 족장을 비웃었다. 토인 다운 본능적인 도주였다. 꼬리에 불이 붙어 그저 전진 만을 반복하는.
-부우우우···.
[보라. 놈들이 어딜 더 도망치겠느냐.]
[저곳이 사리오 협곡입니다. 전하. 사제들이 휴지 없이 군단을 유지하느라 충분히 지쳤습니다. 병력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납골함을 열어 힘을 취하라.]
[그건 최후의 수단입니다. 전하.]
[대체 무엇이 그리 두렵단 말이냐? 저 짐승 놈들의 목을 취하면 새로운 뼛가루를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네페르카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그 말에, 임마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렸다.
[메렌레 왕자 전하의 군단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메렌레 왕자 전하 또한 신(神) 파라오의 명으로 근처 짐승들을 추적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그 능글맞은 놈은 사냥을 성공하고 이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고 있겠지. 놈의 성격상 한 달이고 축하연만 열어도 모자람이 없다.]
[천문관들의 예언이 불길합니다. 이 시기에 무리한 진군을 현명하지 않습니다.]
[네가 감히, 내게 현명함을 논하느냐?]
네페르카가 진노하자, 임마트는 곧장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 깊게 절했다. 그때, 전령이 다가와 절하며 말했다.
[위대하신 네페르카 왕자 전하 만세. 짐승들이 협곡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보아라. 임마트. 놈들은 그저 두려움에 젖어 아무렇게나 도망치고 있을 뿐이야. 여봐라! 진군을 명하라! 놈들이 협곡을 모두 빠져나가기 전에! 놈들이 이대로 흩어지기 전에 말이다.]
잘 되지 않았느냐. 사방이 뚫려 버러지들처럼 온 황야로 도망치느니, 적어도 앞과 뒤만 뚫린 협곡으로 굴러 들어가니 말이다. 네페르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포도주를 들이켰다.
*
“노사. 놈들이 전차병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대로 따라 잡히면 모두 죽습니다. 제기랄. 방법이 있다고 말해 주시오!”
“우습지 않느냐?”
“뭐···라 하셨소?”
전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노인을 바라 보았다. 노인은 협곡의 절벽 끝에 꼿꼿하게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평선 끝에서 뽀얀 먼지가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대군이었다.
반면, 아직 부족민들은 협곡의 절반도 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 협곡이 그들의 무덤이 될 테지.
노인은 미소 지었다.
“애초에 신중함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망령들이지만, 놈들이 정녕코 이젠 최소한의 방비도 생각하지 않는구나.”
“당연하지! 우리 부족 전사들은 저들을 막을 힘이 없소. 공격하긴커녕 방어도 불가할 정도인데, 어찌?”
“우리가 지친 만큼. 놈들도 지쳤다.”
“해골과 망령들이 어찌 지친단 말이오!!”
“어찌 지치지 않는단 말이냐? 저 어리석은 것들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마력이거늘. 놈들의 마력이 무한하겠느냐?”
노인은 키득거렸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 협곡의 바위를 강하게 내리 찍었다.
-콰드드득!
노인의 아귓심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강한 힘이었다. 바위가 부서지며 그 안에서 푸른 빛이 흐르는 돌 조각이 나뒹굴었다. 마력석이었다.
“이 황무지의 지반 아래엔 마력석들이 매장되어 있단다. 어린 수인아. 그리고 저 놈들의 군단을 유지하는 사제들은 이 며칠간 우리 만큼 쉬지 못하고 뛰어왔지. 제 놈들의 장수가 몸이 달아오른 만큼 말이다.”
“···.”
“너희 부족 전사들이 잘해 주었다. 잡힐 듯 말 듯. 마치 제 살을 깎아 내어주며. 아주 꼬리를 잘 흔들었어.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처럼 말이지. 그 덕에 놈들이 제 연한 살을 마음 놓고 드러내지 않느냐.”
전사는 노인의 말을 들으며 점점 몸을 움츠렸다. 노인의 머리 뒤로, 검은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달그락. 달그락.
협곡을 이룬 돌조각들이 덜덜 떨렸다. 지진인가? 아니, 지진이라기보단···.
이 협곡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투둑. 툭.
“무, 무슨···?”
전사의 눈이 공포와 충격에 크게 뜨였다. 노인의 얼굴을 덮고 있던, 주름 가득하고 생기 없던 피부가 조각나 갈라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노인의 얼굴 조각 아래로, 뽀얗고 활력 넘치는 살이 비쳐 보였다. 그 아래에 있는 음울한 푸른 눈까지···.
‘마법을 쓰며 수명을 다해 늙어 죽은 마법사의 이야기는 들어 보았건만, 젊어지다니···?’
노인의 소매에서 녹색 빛이 번뜩이는 단검이 나타났다. 노인은 천천히 자신의 팔을 그었다. 핏물이 울컥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노인의 손가락이 순식간에 수인을 짚어 내기 시작했다. 마력이 그를 감싸고 솟아 오르며, 검은 헤일로 형상의 불길이 그의 머리 뒤에서 형형하게 불타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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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혈액, 완벽한 순간에 완벽한 각도로 잡힌 만트라,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러운 청동 왕좌의 마력 회로. 그리고 이 협곡의 지반을 뚫고 올라온 마력석 광맥까지.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망령의 군대를 달아 오르게 하기 위해 던져준 수인 전사들의 핏물까지도.
노인의 가면 아래에서, 젊은 청년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네크로폴리스의 단검이 가진 저주는 [영혼의 파괴]. 성자의 영혼을 파괴하여 강제로 틈을 비틀어 만들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영을 덧씌워 교묘히 신성의 저항을 피하며.
이제 그는 한쪽 발을 영혼의 세계에 담고 있었다. 저 멀리, 작게. 뭄토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 대황야의 영혼계는 뭄토에게 속해 있었다.
봉인 아래에서 모든 힘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뭄토는 바깥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 보고 있어라. 내가 네게 다가가는 과정을.
페이자쉬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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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전사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비쩍 마른 팔이 날개처럼 그의 등 뒤에서 돋아나고 있었다. 하얗게 샌 반투명한 팔이 꿈틀거리며 일어나, 허공에 기괴한 각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총 여섯. 세 쌍의 팔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수인을 짚으며···.
-쿠르르릉!!
협곡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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