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와일드캐스트 (2) >
*
-쿠르르릉···!
[이건···?]
협곡의 이상을 가장 먼저 깨달은 자는 군단의 유일한 매장 사제였다. 임마트는 창공을 가로지르는 마력 흐름을 바라보며 황급히 영혼계로 침잠했다.
상아시트의 망령들에게 있어서, 물질 세계의 이면 세계. 영혼계로 발을 내딛는 일은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이었다. 자신을 죽이고, 일으켜세우고, 지배한 대악마의 영역을 거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뭄토에게서 죽음의 마력을 빌려 쓰고 있는 매장 사제들과 상아시트의 귀족들에겐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후우우웅.
뼈 밖에 남지 않은 그의 몸에 살가죽과 근육이 생기기 시작했다. 황무지에서 색조가 사라지고, 하늘 위엔 거대한 쇠사슬과 눈, 그리고 마력의 소용돌이가 드리워졌다.
회백색 바람이 황무지를 맴돌았다. 그의 눈 앞에, 생전의 모습을 간직한 상아시트의 군단이 사리오 협곡으로 진군하는 모습이 보였다.
“후우···.”
뭄토의 시선이 끈적하게 그를 훑었다. 탐욕과 증오가 맺힌 시선이다. 대봉인 아래에서, 자신의 하수인들에 대한 지배력조차 잃어버릴 정도로 약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어떤 필멸자보다 강대한 마력을 다루는 존재.
모든 죽은 자들은 뭄토를 두려워한다. 살아서 신이 된 존재이며, 자신을 거역한 이들은 신마저 죽였던 존재이니까. 그는 전설이었다. 상아시트의 파멸을 불러 일으킨 종말의 전설.
그는 위대한 초원과 비옥한 대지, 그리고 드넓은 영토를 구가하던 물질 세계 최강의 대국을 단 한 순간에 황무지와 무덤으로 만들어버린 존재였다.
“나는 네가 두렵지 않다. 뭄토.”
암마트는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가 영혼계에 접속한 이유는 뭄토의 시선을 느끼기 위함이 아니었으니. 임마트는 협곡 끄트머리에서 일렁거리는 거대한 마력을 바라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마력의 소용돌이, 그리고 협곡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마력석들이 일제히 공명하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그로서는 낯선 마력의 조율과 주문들이 스치듯 흘렀다.
임마트는 천천히 수인을 짚었다. 그는 검지와 중지가 꼬이며 나온 틈 사이를 눈에 가져다 댔다. 그 틈새에 마력이 맺히고, 곧 협곡이 확대 되어 보였다.
“···인간?”
영혼계에선 모든 존재가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마련, 망령에 불과한 그조차도 이곳에선 의복을 정갈하게 갖춘 사제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저 협곡의 절벽 위에 서 있는 사내는···.
인간이 맞나? 그 자리에서 임마트는 세 쌍의 손으로 각기 다른 수인을 짚어내며 마력을 조율하는 존재를 볼 수 있었다.
*
-후우웅···.
마력이 손목을 휘감는다. 영혼계의 날카롭고 차디찬 마력이. 페이자쉬는 킬킬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콰득!
손목이 뒤틀리며 혈관이 맥동했다. 신성이 격렬하게 영혼계의 타락한 마력을 거부하고 있었다. 핏물에 담긴 신성이 그의 전신에서 작은 유리조각처럼 굴러다니며 끔찍한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페이자쉬는 오히려 그 고통이 달콤했다.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고통이란 말인가. 정신적 고통 말고, 육체적 고통이.
그에겐 그 모든 자극들이 그립기만 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혈액, 가슴팍 한켠에서 미친듯이 맥박 치는 심장과, 불에 데인 듯 달아올라 아찔한 머리까지···.
‘쓸모 없는 짓이다. 베이타서스.’
그의 혈액 속 신성이 그의 영혼을 거부하고 있었다. 괴리감과 이물감이 격렬하게 그를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몸에서 유리될 것 같은 아슬함을 곡예 하듯 빗겨 지나며—
-콰드드득!!
비틀어 부서진 손목을 억지로 돌린다. 힘이나 근육이 아니라, 근섬유와 신경, 인대와 혈맥을 직접 마력으로 조종하는 섬세한 마력 제어로!
-촤르르르륵!
천공에 매달린 영혼계의 쇠사슬이 그의 몸을 감싸며 내려온다. 뭄토의 마력을 쓰는 이들은 모두 그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 마련. 그러나, 그러나.
‘나는 타이반의 마력을 쓸 때에도 그의 노예 따위가 아니었다. 뭄토.’
-챙!
천공의 사슬이 끊어진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발 아래로 굽어 보는 듯한 전능감이 그의 몸을 감싸고 흘렀다. 진홍 첨탑의 탑주이자 세계의 종언이라 불리던 그 시절의.
그리운 전능감이.
-후우웅···.
그의 손목을 타고 흐르는 마력을 섬세하게 조율한다. 대지의 지맥에 깔린 마력석들이 그의 의지에 따라 그에게 마력을 전달하고 있었다. 영혼계에 한 발 걸친 상태, 반쯤 갈려나간 영혼, 그의 의지를 반하는 육신.
단 한 수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이다지도 많은 제약을 갖추고 있었다. 세상에 쉬운 일 따윈 없구나. 페이자쉬는 끈적하게 웃었다.
쉬운 일이 없기에 이 세상이 즐거운 법.
마력을 실처럼 뽑아 그의 온몸에 걸었다. 그의 등 뒤에 튀어나온 팔들이 각자 다른 모양의 만트라를 짚고, 그 사이로 실이 걸린다.
마치 꼭두각시처럼, 그의 육신이 그 사이에 걸렸다. 거미줄에 놓인 먹잇감처럼. 그래.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가련하게.
페이자쉬는 그 어감이 좋았다. 마력의 실이 그의 저항하는 육신을 동여매고 강제로 조율을 시작했다. 마력을 저항하는 그의 몸 속 신성이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작성]. 너덜거리는 왼손이 마력에 의해 억지로 펴지며 만트라를 짚는다.
다시, [속박]. 오른손이 하늘을 짚고 그대로 내려 긋는다. 고도의 집중력, 그리고 극도의 정교함으로. 완벽한 각도와 타이밍에!
-촥!
등 뒤로 늘어선 손들이 일제히 만트라를 바꾼다. 각 손의 뒤로 희미한 불길이 피어 올랐다.
-촥! 촥!
만트라의 모양이 변하며, 네 가지 수인이 동시에 맺힌다. [희생], [고통], [추방], [역십자]. 그리고, 손을 감싼 검은 불길이 선연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페이자쉬의 머리 뒤에 떠 있던 헤일로가 가시 돋친 왕관의 모양을 띄기 시작했다. 맴돌던 마력이 일순, 그의 양 손 안으로 모이고—
-스륵.
페이자쉬의 눈이 감긴다. 고개를 늘어트리며, 검은 머리칼이 그의 눈 아래를 덮었다. 모인 양손 아래로 꿈틀거리는 강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등 뒤에 돋아난 여섯 개의 손이 이 거대한 마력을 억누르고, 압박했다.
전성기의 마법. 네 명의 대천사를 막아내기 위해 준비했던 그의 다섯 가지 마법 중 하나.
마법의 삼요소는 주문, 의식, 그리고 제물이다. 그리고 페이자쉬에겐 쓸모 있는 수많은 제물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협곡 아래로, 물질 세계에서 죽어가는 부족 전사들의 피와 살점이 영혼계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파라오의 매장 사제들이 그들의 영육을 취하기 위해 의식을 준비 중이었지만, 놈들은 이미 늦었다.
한참 늦었지.
-스르륵.
페이자쉬의 눈이 뜨였다. 스으으, 네크로폴리스의 저주에 갈려나간 영혼의 조각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와 하늘 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죽음이 가깝다. 그 어느 순간보다 더. 그의 등허리에서 베이타서스의 성흔이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그의 영혼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을 잇는 생명선이었다.
페이자쉬는 그것이 우스웠다. 베이타서스가 아무리 그를 증오해도, 놈은 결코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페이자쉬의, 다섯 왕좌의 손아귀.”
-후우웅···.
동시대, 그리고 그 이전 시대를 아울러. 그 누구도 닿지 못한 마학의 정수. 네크로맨시 학파를 개파 했던 뭄토 이래로 가장 강대한 마법사.
엔소서리 학파의 개파조사이자, 흑마법의 종사. 그의 전성기 시절 신의 챔피언을 죽이기 위해 만들었던 주문 중 하나.
끝내 그가 죽던 그 순간까지 단 세 번 사용했던 그 주문이, 그의 손 끝에서 온전히 완성되었다.
*
-후우웅···.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가장 처음 이변을 발견한 것은 네페르카였다. 그에게 걸린 수많은 보호부들이 동시에, 유리 조각처럼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촤르륵!
[이게···무슨···?]
네페르카는 턱을 고인 자세에서 딱딱하게 굳어 자신의 목 아래로 흘러 내리는 보호부들을 바라보았다. 절그럭, 보호부를 연결하고 있던 주언과 황동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에 쏟아진 보석 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보호 주문들이 복잡하게 얽힌 그의 장신구들이 일제히 힘을 잃고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파삭···.
그의 시종이 한 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의 몸을 이루고 있던 것은 네페르카의 주문, 그리고 그의 매장 사제들의 주문이었다. 네페르카는 흩어지는 시종의 몸을 잠시 바라보다가, 섬칫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그의 주문이 시들었다면, 그렇다면···.
[이, 이런?!]
그의 군단이 뼛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군단의 병력들은 일제히 몸부림치며, 천천히 흩어져가고 있었다. 열풍이 불어 날린 뼛가루로 마치 모래 폭풍이 이는 듯 시야가 가려지기 시작했다. 네페르카는 그 사이에서 벼락처럼 내달리는 마력과, 비명 지르는 영혼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냐?!]
네페르카는 벌떡 일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직, 마법으로 일으켜 세워진 것이 아닌 하수인들은, 그러니까 생전의 이성을 지니고 있던 매장 사제들과 고위 귀족들의 영혼이 그의 근처에 있었다. 네페르카는 황급히 그들을 찾았다.
[누구든 이리로 오라!]
“그러지.”
군단의 뼛가루가 휘날려 만들어진 짙은 모래 폭풍 사이로, 기이할 정도로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네페르카는 본능적으로 그의 칼을 쥐었다. 그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칼을 내질렀다.
-콰드드득!
모래 안을 찔러 들어가던 칼이 거친 힘에 의해 튕겨 올려갔다. 네페르카가 몸을 튕겨 거리를 벌리자, 곧 폭풍이 반으로 갈라지며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저벅.
음울한 푸른 눈이 번뜩이는, 살아 있는 인간 청년이었다. 네페르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붉은 안광을 흘렸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아마포 아래에서, 그의 진노가 샛파랗게 타올랐다.
[네 놈은 누구냐!]
“그건 중요하지 않다.”
-후우웅! 콰득!
네페르카의 칼날이 검은 검신의 대검에 막혀 허공에 붙들렸다. 콰득, 낡은 칼날이 물려 들어가며 대검의 크로스가드에 비틀려 끼워졌다.
네페르카는 칼날을 빼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검을 가로막은 청년을 노려 보았다.
“내가 누군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그런 사소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지. 망령. 네가 내게 무엇이 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
[무슨 헛소리를···!]
-콰드드득!
대검의 검신이 네페르카의 칼날을 으스러트리며 그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네페르카는 반쯤 남은 칼날로 황급히 검날을 막아 내었다. 칼자루 거의 끝까지 먹혀 들어간 칼날이, 그의 이마 바로 위에서 멈췄다.
청년이 칼을 짧게 고쳐 잡고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피로에 찌든 푸른 눈이 그의 앞에서 일렁거렸다.
“네가 아는 것 중,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살려주마.”
청년, 페르난데스는 칼날을 비틀어 손목을 튕겼다. 네페르카의 칼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군. 손목을 끊어 놓으려 했건만.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근육이 덜덜 떨리고, 전신의 혈관에 자갈이 굴러다니는 감각이었다.
빌어먹을 페이자쉬. 페르난데스는 저릿한 손가락을 움직여 칼자루를 꽉 틀어쥐었다. 공포와 수치에 절은 네페르카를 내려보며 페르난데스는 그의 등 뒤에 팔짱을 끼고 있는 페이자쉬에게 투덜거렸다.
-거래는 거래지. 페르난데스. 이 며칠, 간만에 재미를 좀 봤다.
‘그딴 건 아무 상관 없어. 몇 번이나 남았지?’
-글쎄. 그렇게 여유 있진 않을 것 같군.
페르난데스의 검은 머리칼에 흰머리가 눈에 띄게 섞여 있었다. 그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을까? 페이자쉬의 말대로 여유롭게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투자였다. 페르난데스는 네페르카를 내려보며 생각했다. 그의 생명과 육신은 소모품에 불과하므로.
“네 왕에게 나의 존재를 알려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죽음은 내게 좋은 협박이 아닐 텐데.]
“하게 될 테니까.”
-촤르륵.
페르난데스의 손목에서 사슬이 뱀처럼 달려들어 네페르카의 목을 휘감았다. 네페르카는 컥, 하는 신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