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와일드캐스트 (4) >
*
온 황야의 강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 이후, 거점을 찾아 숨는다면 그건 오히려 자가당착적이다.
페르난데스는 투탄 가르텝의 도시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자취를 남겼다.
-콰지지직.
사전 준비 없이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은, 그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너댓 가지 정도가 한계였다.
청동 왕좌는 천천히 기능을 복구해가고 있었지만, 망가진 회로는 이제 겨우 초년생 마법사 수준에 불과했다.
그 반면, 페르난데스가 사용하는 마법은 가장 간단한 주문이라 하더라도 그 수준을 아득히 뛰어 넘었다.
따라서 그는 단 한 번의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아주 섬세하게 청동 왕좌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여 나가야 했다.
-우드드득!!
황무지의 드넓은 벌판, 길조차 없는 외딴 대지에 기괴한 구조물이 솟아 오른다.
바싹 마른 흙바닥을 뚫고 뒤틀린 해골과 나뭇가지, 녹슨 고철 따위의 잡동사니가 얽힌 토템이 나타났다.
[악의 숭배 우상]. 심력이 약한 자들에게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는 간단한 저주가 걸린 토템이다.
들짐승이나 곤충 따위의 미물들을 쫓는 효과도 있고, 마력의 흔적이 확연하게 남아 누군가가 지나갔음을 짐작할 수도 있게 해준다.
따라서 길바닥에 노숙하는 페르난데스에겐 아주 유용한 주문 중 하나였다. 적의 추적을 유도하고, 귀찮은 짐승을 쫓아내는 주문이었다. 어쨌건 대황야엔 사나운 들짐승이 많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쉴 텐가?
‘쉰다는 표현이 좀 웃긴데.’
디모니카의 육신은 사흘간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그 기능을 유지한다. 이틀밤 이후부턴 수면욕이 괴롭히고, 피로감이 누적되지만. 최소한의 활동성을 유지할 수준은 되었다.
육신이 호소하는 과로는 시간으로 치유할 수 있는 허상이다. 페르난데스는 피로가 검게 눌러 붙은 눈을 감고 토템의 곁에 가부좌를 틀었다.
-스르릉.
그는 눈을 감은 채 품에서 네크로폴리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대로 팔을 저며 내었다. 저릿한 고통이 팔뚝을 타고 흘렀다.
-스르르륵···.
핏물이 단검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단검의 저주가 상처를 통해 주입되며 영혼이 천천히 조각나는 것이 느껴졌다. 사라진 영혼 만큼, 그의 정신이 점차 영혼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잘 부탁한다.’
-뭘, 낯 부끄럽게.
왼팔이 그의 제어에서 벗어나며, 페이자쉬의 영혼이 그를 감싸 안았다. 왼팔이 매끄럽게 수인을 짚고, 쇠사슬이 그 팔에 감겨 든다.
그가 명상에 빠진 시간 동안, 페이자쉬가 그의 몸을 지키며, 지배의 사슬을 조작할 것이다. 네페르카와 파르탁에게 얽힌 지배의 사슬을 통해 그들의 행동을 감시할 수 있었다.
“후우···.”
페르난데스의 오른팔이 만트라를 짚고, 천천히. 천천히 정신의 아득한 깊은 곳 어딘가로 침잠한다.
과거의 기억이 필요한 순간이다.
*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강한 전사가 누구일까? 그는 얼마 전까지 다인 왕이리라 생각했다.
그의 영혼이 그의 몸 속에 녹아 있으므로, 다인 왕의 업과 한, 그리고 광기를 이어 받는 과정에서 그의 경험과 감각마저 몸 속에 녹여 냈으므로.
다인 왕의 검술은 아직 체득하지 못했을 뿐, 이미 그의 안에 내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숫한 사선을 건너고, 실제로 죽고 되살아나는 과정에서도 그의 검술은 그저 편린만 남아 두 손 안에서 흘러 내릴 뿐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냉정하게 자기 자신의 상태를 짚었다. 전성기의 마법을 복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목숨을 담보로 수많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간신히 몇 가지 마법을 되살릴 수 있었다.
검술에 있어서도, 그는 결코 영웅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재능과 재주는 전략과 전술, 심계와 모략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의 검술은 그저 기계적으로 습득한 것을 반복해 숙달하는 것에 그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페르난데스는 스승을 모시기로 했다. 영웅들이 으레 그렇듯 번뜩이는 재치와 영감, 그리고 재능으로 깨달음을 얻고 벽을 허물지 못할 바에야. 그 영웅들의 기술을 따라 숙달하기로.
마법도 충분치 않고, 검술에 있어서도 부족한 지금. 그에게 넘쳐나는 것은 신성과 수명 뿐이었으니까. 영성을 아낌없이 깎아 투자하는 방식의 명상으로, 스승을 모시기로 했다.
다인 왕이 아니다. 그의 검술은 본능과 재능의 영역에 있었다. 검술이라기보단 숫제 기적이나 마법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보고 익힌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전생에 이미 무술의 극의에 도달한 전사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숙적으로.
그가 겪은 최강의 전사.
전성기의 다리안 쉬라이크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다.
*
-스르륵.
마력 섞인 바람이 그의 귓가에 스쳤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공간이다.
진홍 마탑, 그의 전당이자 아세아스 고위 의회를 제외한다면 물질 세계 최고의 마탑 반열에 속하는 곳이다.
“오랜 만이군. 자수정 전당.”
자수정 전당, 수십 가지 주문이 환각과 혼란을 자아내고 그 사이사이에 영체로 녹아 있는 악마들이 침입자를 노리는 곳.
페이자쉬 시절, 그는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영웅이나 암살자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이 그들의 사지가 되길 바랐다.
멍청한 마법사들은 자신의 던전을 차례대로 강해지는 함정과 하수인으로 꾸린다. 그러나 진정한 현자들은 그 입구부터 그들이 가진 최강의 수를 던진다.
이를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이들은 어차피 그를 죽일 수 있고, 이를 뚫지 못하는 이들에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으니까.
따라서 진홍 마탑의 방비는 언제나 만전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페이자쉬가 직접 크리스탈 홀로 나아가 침입자를 막아 내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
다리안 쉬라이크와 그의 아홉 제자들이 그의 목숨을 노렸던 때였다.
페르난데스는 화려한 로브 자락을 끌며 수정 전당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그의 하수인들이 벽을 가득 채운 거울 속에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너희가 필요하지 않다. 페르난데스는 그르렁 거리는 악마들을 무시하며, 수정 전당의 한복판에서 방문자를 기다렸다.
-위이잉! 위이잉! 위이잉!
곧, 마탑에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아, 그날도 꼭 이랬지. 트라우마가 자극되는 감각에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이제 녀석이 문을 박살내겠지.
-콰아아앙!
태양이 쏟아져 떨어지는 것처럼 강렬한 빛이 터져나가며 수정 전당의 대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파편이 허공에 비산하고, 악마와 희생양이 부조된 화려한 황동 대문이 전당의 홀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페이자쉬!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오늘! 정의를 바로 세우겠노라!!”
“뻔한 녀석.”
걸걸한 목소리가 전당을 쩌렁 울리고, 녀석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성큼성큼 걸어오는 거구의 노년 전사를 보며 반가운 마음에 웃었다.
“어서 오게, 형제여.”
“···뭐?”
“우린 의제를 맺지 않았나. 하하.”
“이번엔 무슨 헛수작이냐!!”
페르난데스의 말에 다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창을 한 바퀴 크게 돌렸다. 샤일드의 성물, 태양창이 파사의 힘으로 수정 전당에 걸린 주문들을 으스러트렸다.
강렬한 빛이 전당에 난반사되며 화려한 색체로 물들었다. 악마들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며 페르난데스는 혀를 찼다.
“쓸모 없는 것들. 모두 비켜라.”
그의 말에 악마들이 물러났다. 페르난데스는 지팡이를 탁, 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조금만 더 다가가면 다리안의 거리에 들어간다. 다리안 또한 그것을 깨닫고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수천 모략의 페이자쉬가 이렇게 무방비하게 다가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겠지.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말했다.
“손님 접대가 형편 없어 미안하군. 기별 없이 찾아와 내 시간이 넉넉치 않았네. 이해해 주게나.”
“너와 내가 서로 방문 예정도 약속하고 만날 사이는 아닐텐데?”
“그건 그렇지. 하하.”
다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생각이 손에 잡힐 듯 읽혔다.
함정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일단 선제 공격을 넣어 보자는 것이겠지. 페르난데스는 지팡이를 툭, 내려놓았다.
“마법은 쓰지 않을 생각이네.”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의 의미지.”
-콰지지지직!!
그의 손에서 불똥이 튀었다. 가장 익숙한 검을 생각하며 만들었더니, 다인 왕의 대검이 손에 잡혔다. 그 검에 얽힌 신비까지 복제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완성도였다.
검을 살짝 겨누며, 페르난데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검을 나누어 보지. 형제.”
한평생 가장 자주 싸웠던 전사가 하필이면 물질 세계 최강자 중 하나였던 것이 얼마나 한스러웠던가.
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의 호적수가 태양창 다리안 쉬라이크라는 것이 못내 기뻤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그의 모든 움직임과 전술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부딪쳤던 전사가 다리안이라는 것에.
비록 명상 속, 그의 기억 속의 환각이라 하더라도. 다리안은 그 당시 그가 했을 움직임을 구현해낼 것이다.
그 당시, 마법사였던 그는 이해하지 못했을 움직임을. 그리고 검사로서의 페르난데스는 이해할 수 있을 움직임을.
“새로운 자살법이냐?”
다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검을 치켜든 그를 바라보았다.
*
“커흑···!”
“···뭐야. 진짜 죽었어?”
처음은 세 번. 그 검격을 세 번 나누기 전에 심장이 꿰뚫렸다. 앞선 두 번의 공세는 다리안의 조심스러운 견제에 불과했으니, 제대로 된 공세는 단 한 번이었다고 여겨도 좋았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던 창의 궤적을 망막 속에 새기며 핏물을 삼켰다.
“한번 더 해보지.”
의식이 침잠한다.
*
창날이 뱀처럼 그의 대검을 파고들어, 힘의 격류를 끊고 대검을 튕겨낸다. 페르난데스의 악력에도 불구하고, 칼날이 치켜 올라가는 것을 막아낼 수 없었다.
힘과 길항과 그 틈을 정확히 끊어내는 극도로 정밀한 일격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다리안의 움직임을 지켜 보았다.
창날이 멈춤 없이 질러와 정확히 그의 가슴팍 안에 박혀 들어온다. 그 충격에 심장이 박살나며 내부가 진탕이 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른쪽 아래로 반 바퀴 돌려 힘의 방향을 역으로 틀었군.’
저 기술은 오랜 경험과 감각의 산물이다. 당장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의 기술이 아니었다.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카운터였으니.
“커흑···!”
“···뭐야. 진짜 죽었어?”
다리안의 넋 나간 목소리를 들으며, 페르난데스는 핏물을 흘리며 충혈된 눈으로 속삭였다.
“한번 더 해보지.”
몇 번이라도 좋으니, 내게 가르침을 주게나.
시야가 어두워지며, 의식이 침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