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대전사 카하레페르 (3) >
*
“쿨럭···!”
혈류를 타고 흐르는 폭발적인 신성으로 인해 상처는 깨끗하게 치유되었지만, 페르난데스의 상태는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었다. 필멸자의 육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성이 과부하 되며 몸 안에 잔류해 날뛰고 있었다.
핏물이 목 안에서 쏟아져 흘렀다.
-스르릉.
페르난데스는 떨리는 손으로 베이타서스의 열쇠검을 허릿춤에 납도했다. 카단의 성역에서 얻은 이래로 처음 사용해보았지만, 두 번 다시 쓰고 싶지는 않았다.
‘카단이 신성을 잃고, 이를 보조하기 위해 사용했던 검···. 과연 필멸자를 위한 무구는 아니다.’
-증발할 뻔 했어.
‘그거 아쉽게 됐군.’
페르난데스의 말에 페이자쉬가 큭 하고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다인 왕의 대검을 바닥에 틀어 박고는 자세를 다스렸다.
-쿵, 쿵, 쿵.
심장이 여전히 거칠게 뛰고 있었다. 혈류의 압력을 견디지 혈관이 터져나가며 실핏줄이 붉게 올라왔다. 페르난데스는 충혈된 눈으로 쓰러져 있는 카하레페르를 내려 보았다.
상체와 하체가 깨끗하게 일도양단 된 대전사는 호흡 대신 몸에 박힌 주술 문자들을 명멸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놈은 뭄토가 아니었군.]
“그래.”
[어째서 필멸자가, 산 자가 놈을 가장했지? 황무지의 세 파라오가 모두 네 목을 노릴 게다. 네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카하레페르는 완전히 무력화되어 있었다. 놈의 몸은 열쇠검의 신성에 절여져 바스라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헐떡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네 왕들이 나를 노리길 바랬다.”
[자살을 희망했나?]
“하, 그럴 리가. 놈들은 머저리들이야. 날 죽이기엔 너무 멍청하지.”
[···이 무례한 녀석.]
대전사는 뜨겁게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경의를 표한다. 마법사의 몸으로 나를 뛰어 넘었군.]
그래. 편법과 기만이 섞인 전투였지만. 승리는 승리지. 페르난데스는 환지통이 느껴지는 목젖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불사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은 패배를 겪었겠는가.
그러나 그에겐 불사가 있다. 잔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건 그에겐 아직 가장 강력한 조커 카드가 쥐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보다 효율적이고, 적확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페르난데스는 기꺼이 자신의 버림말 중 하나로 자신의 육신과 영혼, 그리고 생명을 집어 던질 수 있었다.
“네 이야기를 좀 해보지. 대전사.”
[내 이야기?]
“어차피 사라질 몸 아닌가. 나도 조금은 쉬어야겠고.”
육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 기능성을 회복하기 전까진 휴식이 필요했다. 페르난데스는 쓰러져 있는 카하레페르의 곁에 주저 앉았다.
[흐, 좋군. 결투 끝에 적수와 허심탄회한 자리를 갖는다라···. 내가 살아 있고, 여기에 술이 있다면 완벽했을텐데.]
“이미 운치는 충분히 있지 않나.”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납도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격렬한 전투로 주위가 완전히 초토화되어 꺼진 모닥불에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살아났다.
한숨을 돌리고 보니,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열기 오른 몸을 식혔다. 별무리와 은하수가 밤하늘 가득 펼쳐져 있었다.
카하레페르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그의 곁에서 수통의 마개를 뜯었다.
[목이 타는군.]
“마를 목이 없지 않나?”
[정신적 갈증일세. 우리들의 영혼은 언제나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지. 몇몇 동료들은 그 탓에 이성을 잃기도 했다네. 살점을 씹고 액체를 삼켜도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으니.]
“자네의 이성은 멀쩡한가?”
[이 뒤틀린 세상에 진정코 멀쩡한 이성을 지닌 자들이 얼마나 되겠나? 다들 광기를 예의로 감추고 있을 뿐. 자네라고 다르겠나?]
“···다르지 않지.”
페르난데스는 그의 말을 잠시 곱씹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수통의 물이 반절도 채 남지 않았다. 디모니카의 육신은 물론, 탈수에도 어느 정도의 저항력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복과 갈증은 다만 욕구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속될 경우 즉각적인 기능 저하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수통을 그대로 옆으로 돌려, 카하레페르의 입가에 부었다.
-쪼르륵.
“조롱하려는 의미는 아닐세.”
[알고 있네. 무의미하지만 가치 있는 배려로군. 고맙네. 날 일으켜 주겠나?]
“그러지.”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크게 돌려 바닥에 박았다. 강한 아귀힘에 대검이 단단하게 바닥을 파고 들었다. 그는 카하레페르의 조각난 상반신을 끌어 그 앞에 기대었다.
[고맙네. 좋군. 이제 하늘이 온전히 보여.]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천천히 바스러지고 있었다. 그의 몸에 걸린 수많은 고대 주언들이 그의 육신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닻이었다.
[달과 별은 여전히 그 시절처럼 빛나건만, 이 대지는 비틀리고 타락했다네. 이 마른 흙무덤이 우리가 바라보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기를, 다만 이 땅에 다시 초원이 펼쳐지고, 그 위로 우리의 자손이 뛰어 놀 수 있기를 바랐다네.]
“자네의 왕 또한 그랬나?”
[···적어도 나는 그랬지.]
파라오의 심장엔 야망만이 차올라 있었으니. 카하레페르는 정신적인 쓴웃음을 지었다.
[사랑하는 이가 있나?]
“있었네.”
[내게도 있었다네. 죽은 몸의 싸늘한 광기를 이기어 내지 못한 여인이었지. 내 손으로 장사 지내 주었다네.]
“믿는 신이 있나?”
[라파라타.]
“···샤일드로군.”
고대 만신전의 태양신 라파라타. 지금 선신 만신전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대신격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로사리오를 꺼내 손목에 감고는 그의 눈 앞에 떨어트렸다.
-촤르륵.
“기도하겠나?”
[사제였나?]
“지금은.”
[하하. 자네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흑마법, 사제, 그리고 전사라···.]
그는 턱을 딱딱 부딪치며 웃었다. 그리고 곧,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죽음의 대지에 스러진 그들의 영혼이 그대의 전당에 도달할 수 있기를.]
“만신전이여 가호 하소서.”
[가호 하소서. 그 불쌍한 영혼들이 당신의 품 안에서 풍족하기를.]
“막토 수페를라우도.”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눈을 감고 로사리오를 감았다. 촤륵, 촤륵. 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자네를 보내기 싫군.”
갑작스러운 변덕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이 죽은 망령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사내에게.
서로의 목숨을 겨누던 격렬한 전투는 결국 각자의 이상을 위한 몸부림이었으니. 페르난데스는 음울한 눈으로 망령을 바라 보았다.
“자네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을 걸세.”
[···뭐라고?]
“알지 않나. 이 대황야의 영혼계는 뭄토에게 귀속되어 있네. 아마도 자네 연인의 영혼은 뭄토의 권역에 끌려갔을 걸세. 샤일드가 아무리 뛰어난 대신격이라 할지라도, 이 대지에선 봉문한 선신 만신전의 입구를 넘을 수 없지.”
[감히!!]
-딱!
카하레페르는 턱을 강하게 짓씹었다. 그의 눈이 분노와 충격으로 불타올랐다. 페르난데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내 목적이 무엇이냐 물었지. 내 목적은 뭄토의 죽음일세. 영원한 죽음이지.”
[···?]
“이 대지를 살라먹은 그의 마력을 영구히 박탈하는 것이 나의 목적일세. 카하레페르. 상아시트 제국의 위대한 대전사. 자네는 이 땅에 다시 들꽃이 자라고, 어린 영혼들이 이 대지를 뛰노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나?”
밤공기를 타고 페르난데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가능하다네. 그리고 자네의 도움이 있다면, 보다 수월하게 가능할 것 같군.”
[···뭄토를 죽일 수 있다고?]
“그리고 그에게 사로잡힌 모든 영혼들을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지.”
[어떻게?]
“세 왕, 자네의 파라오의 목숨을 그 제물로 바쳐서. 네크로폴리스로 향하는 문을 열 걸세. 대봉인을 들어내고 그 안으로 직접 향해 놈의 목숨을 취하겠네.”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지?]
“믿지 않는다면, 여기서 죽어 다시 뭄토의 영혼계에 속박 되겠나? 자기 자신을 잃고 그저 꼭두각시로 소모되는 삶을 반복 하겠나?”
[···.]
카하레페르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타들어가는 모닥불의 소리가 침묵 사이를 감돌았다.
곧, 그의 고개가 밤하늘을 향해 돌아갔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자네 파라오의 곁으로 돌아가, 그의 심복으로 지내고 있게. 내가 봉화를 올리기 전까지. 내가 파라오의 앞에 나아가 그의 목을 취할 때까지.”
[위대한 트라이아크의 일원이 간자 노릇을 하게 되다니. 개탄할 일이로군.]
“파라오의 야망은 무의미하네. 자네의 왕은 그저 지배욕을 충족시키고 싶을 뿐이지. 하지만 자네와 나는 그렇지 않지 않나.”
[그래···. 그렇지. 자네 말이 맞네.]
-딱.
카하레페르는 턱을 한 번 부딪치고는 고개를 돌려 페르난데스를 보았다. 그는 천천히 성한 한 쪽 팔을 들어 그에게 뻗었다.
[나는 이제 자네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인가?]
“아니. 친구가 되는 걸세.”
-척.
페르난데스는 카하레페르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 또한, 페르난데스의 팔뚝을 마주 잡았다. 단단하게 움켜쥔 서로의 팔에서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결속이 이어졌다.
-화르륵.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에서 검은 불길이 일렁인다. 페르난데스는 한 손으로 빠르게 수인을 짚었다. 그와 동시에, 카하레페르의 부서진 몸이 천천히 이어 붙기 시작했다.
“나 또한 내 손으로 사랑하는 이를 장사 지냈네. 친구. 무고하고, 순결한 아이였지.”
[자식이 있었나?]
“내 말년의 축복이었네. 그 아이에게 나는 언제나 부족했고.”
[모든 어버이가 그들의 자식에게 그렇지. 자네 또한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 살아가는군.]
“아니. 되돌리고 있는 걸세.”
페르난데스는 몸을 일으켜 카하레페르를 끌어 당겼다. 카하레페르의 부서진 하체가 이어 붙으며 그 또한 천천히 자세를 다잡았다.
그는 페르난데스보다 거의 두 뼘은 더 큰 거인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카하레페르의 온전해 진 몸을 올려 보며 말했다.
“되돌리고 있는 중일세.”
[내 기꺼이 자네와 함께 하겠네. 친구. 자네의 이름은?]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내 이름은 카하레페르 카멧 카슈트일세. 이제 자네의 비수가 되어 주겠네.]
고맙군.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귓가에 페이자쉬가 속삭였다.
-좋은 언변이야. 말로 간자를 구워 삶았군. 일이 수월해지겠어.
‘진심이었어.’
-진심은 악용할 수 있는 수법 중 하나지.
페이자쉬가 킬킬거렸다. 나는 한 번에 하나의 수에 착수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그의 비웃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