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용, 호. 상박. >
*
“라비라타의 군단이 북진하고 있소!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굴복과 퇴각 둘 중 하나 뿐이오!”
“말도 안되는 소리! 라비라타에게 굴종하면 주변국들이 우리를 좌시하리라 보는가? 당장 대립 족장의 떨거지들이 우릴 물어 뜯을 거요!”
“후일이 두려워 지금 죽겠다는 뜻이오? 아니면 퇴각을 선택하겠다는 뜻이오?”
“퇴각은 안 된다! 후미를 잡히면 잡아 먹힐 뿐이야!”
촛불이 일렁인다. 막사의 회의실은 혼란과 고함, 그리고 흥분으로 가득했다.
“하아···.”
키르하스는 피로한 눈가를 쓰다듬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원로들이 제각각 소리 높여 테이블을 치거나 혀를 차고, 또는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떠난 지 벌써 한 달. 그가 내린 임무는 ‘패배하지 말라.’라는 것 뿐.
처음엔 수월해 보였다. 결투와 격투에 있어서 키르하스를 능가하는 전사가 수인족 중 찾기 어려웠을 뿐더러, 수인 호족 연합의 전사들은 카단의 사도라는 직책을 존중했으니까.
그러나 전쟁이라면, 전혀 다른 영역에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암수도, 전략도, 전술도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대뜸 대족장 직위를 내린다고, 그녀가 단번에 전설적인 책략가로 변모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
좌중을 휘어잡는 날카롭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테이블의 끝단. 키르하스의 반대 편에 앉은 원로가 조용히 팔을 들어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 톡.
그의 손목에 감긴 수많은 장신구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악마적인 문신과 기괴하게 비틀린 손가락이 시선을 잡는다. 자색 로브 자락이 움직임에 따라 춤췄다. 파르탁. 파르탁 블랙팽.
공식석상에서, 대족장의 대척점에 있는 원로. 원로들 사이를 흑마법과 주술, 그리고 계략으로 온전히 지배하고 있는 사내다.
그리고, 페르난데스의 수족 중 하나다. 키르하스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억누르며 그를 노려 보았다.
“그만들 하시오. 자, 대족장의 의견을 먼저 들어 보지.”
파르탁의 검은 이가 촛불에 번뜩였다. 그는 키르하스에게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와 그의 역할 분담이 이런 것이었다. 파르탁은 자칫 절대적인 권위를 등에 업을 수 있는 키르하스를 적극적으로 견제했고, 이를 통해 반 키르하스 파벌 인사들을 부족에 상관 없이 자신의 휘하로 끌어와 장악했다.
반면 키르하스는 기존 원로들의 탁상회의에 신물이 난 호전적인 부족 원로들과 부족 연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사들을 권위와 매력, 그리고 무력으로 장악했다.
키르하스와 파르탁이 페르난데스라는 구심점으로 손을 잡은 이상, 수인 호족 연합은 온전히 그들의 영향력 안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키르하스는 이런 정황을 이해하고, 페르난데스의 계책에 감탄했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역할 분담은 아니었다.
“퇴각한다.”
“어디까지 말이오?”
“카르가리 부족의 영역까지.”
“놈들은 대립 족장의 편에 선 호족이오. 사지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소?”
대립 족장. 갑작스레 나타난 떠돌이 출신 수인족 처녀에게 대족장 직위를 이양하는 것에 반대한 부족들이 모여 만들어낸 임시 대족장 의회였다.
키르하스와 파르탁이 수인 호족 연합의 적통을 주장하고 있었고, 아직까지 호족 전사 사회에서 주류에 속하고 있기는 했지만. 대립 족장 의회의 규모 또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만일 그녀가 파라오와의 전쟁에서 실책을 범하거나, 자칫 크게 패퇴하기라도 한다면 정통성에 반드시 타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녀의 호족 연합은 결코 패배해선 안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치보단 무력이다. 키르하스는 그렇게 믿었다.
“대립 족장 의회의 군영은 아직 거리가 제법 멀어. 카르가리 부족을 무력으로 복속시키고 그 지역에서 군단을 추스른다.”
“···뭐. 좋소. 그럼 철수 작전 도중 후미는 누가 맡을 거요?”
남부의 라비라타. 그 강대한 파라오의 군단이 그녀의 지척까지 추격하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피로한 눈으로 작전 지도를 내려 보고 있었다.
다른 파라오들과는 달리 라비라타는 지리적 이점이 확실했다. 대황야 최남단이라는 뜻은 그 아래로 정글과, 그 옆으로 백국마족의 평야만이 존재했다.
즉, 인접한 적국이 없다는 뜻이었다. 놈들은 아무런 견제 없이 군세를 확장했고, 지금 이 황무지에서 가장 강대한 군벌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놈들은 한 전장에 온전히 자신의 모든 전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키르하스와는 달리.
놈들의 군단이 퇴각하는 호족 연합의 후미를 씹어 삼키기 전에, 안전한 지역으로 퇴각해야 했다. 그 시간을 누가 벌 것인가.
좌중의 시선이 그녀에게 못박혔다. 자살에 한없이 가까운 작전이었다. 어떤 부족을 화살받이로 던지더라도, 원로들은 대족장에게 적극적으로 반발할 것이 분명했다.
놈들은 이리와 자칼,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자들이었다. 먼저 물어뜯지 않지만, 약점을 드러낸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다. 대족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그러나 그 권위를 이용하고 싶어하는 모략꾼들.
그들 사이에서, 키르하스는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은공, 저는 은공이 필요합니다.’
곧, 그녀의 눈이 뜨였다. 청록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타올랐다.
“내가 맡겠다.”
그녀의 말에 파르탁이 순간 당황을 숨기지 못하며 입을 벌렸다. 그는 곧 표정을 관리하며 빠르게 말했다.
“죽을 수도 있소. 대족장, 그대가 전사하면 이 연합은 끝이오.”
“전쟁이란 누구에게나 죽을 수도 있는 자리지.”
“그게 그대가 되어선 안된다는 뜻이오. 무슨 짓이오?”
-모든 일을 허사로 만들겠다는 뜻이오?
파르탁은 입만 뻥긋거리며 의사를 전달했다. 키르하스는 크게 당황한 그의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
“파라오는 패배를 전혀 예상하고 있지도 않아. 놈들은 승리를 과신하고 있지. 그런 놈들이라면, 적어도 시간을 벌고 몸을 빼낼 자신이 있다.”
“승리를 과신하고 있는 것은 그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소만.”
“내 경우엔 과신이 아니야. 확신이지.”
-탁.
키르하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황금 가면을 손에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면이 손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섬겨라.]
키르하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가면을 허릿춤에 찼다.
“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전쟁은 신이 아니라 우리들의 피로 성립되오.”
“우리? 아니. 아니야.”
-드르륵.
키르하스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의자를 시끄럽게 뒤로 밀었다. 그녀는 큰 걸음으로 막사를 가로질렀다. 회의실의 천막을 거칠게 걷고, 한 발 더—
-···.
원로 회의실의 막사는 군영의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불안과 피로에 찌들어 있는 연합의 시민과 전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회의가 끝나길, 그리고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며 긴장된 표정으로 막사를 올려보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그들의 눈 아래 짙게 깔린 불안감을 보았다. 파르탁은 원로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절그럭.
황금 가면을 들어 올렸다. 카단의 영혼이 담긴 이 가면은 이제 호족 연합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신성함과 권위, 그리고 지배력의 상징이었다.
죽은 신이 수인들에게 돌아왔다. 신에게 버림받은 방랑 민족. 문명 세계의 모두에게 소외 받는 하층민들. 전사들의 심장엔 자부심과 열등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들기 위해선, 아이콘이 필요했다. 이 황무지를 상징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시대의 아이콘이.
키르하스는 천천히, 이 자리의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가면을 들어 얼굴 위에 덮었다. 가면은 반쪽이 나 있었지만, 그 크기 탓에 그녀의 얼굴 전체가 온전히 가려졌다.
곧, 그녀의 시종이 다가와 그녀에게 부드러운 모피로 장식된 망토를 둘렀다. 그녀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피가 아니다. 신께서 바라신다. 적들의 피로!”
-죽음을!!
군중이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소리 높여 외쳤다.
“적들의 뼈로, 적들의 시체와 그 사이에 타오르는 영광으로!”
-승리를!!
군중의 눈 안에 희망과 열정이 감돈다. 파르탁은 의회를 장악했지만, 키르하스라고 그 사이에 편히 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밤낮 없이 전사들과 시민들을 둘러 보며 치안을 점검하고, 불의를 재판하고, 성사를 집행했다. 전시엔 가장 앞서 뛰었고, 휴식을 취할 땐 전사들 한 가운데에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그들을 치하했다.
원로들은 이제 더 이상 호족 연합의 존경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받는 존경과 존중은 키르하스에게 이양된 후였다. 파르탁은 원로를, 그리고 키르하스는 백성들을 장악했다.
-스르릉···.
키르하스가 장검을 뽑아 들었다.
“사냥의 시간이 다가온다. 제군들! 늑대와 갈가마귀, 그리고 사자의 시간이!”
-하트테이커! 하트테이커! 하트테이커!!
헛된 희망이라 할지라도, 그녀에겐 의무가 있었다. 그녀를 따르는 이 부족민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펴 놓는 것.
그녀가 가진 선천적인 재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군중의 사랑을 받고, 전사들을 아우르는 매력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인 전쟁 군주이자 야전사령관이었다.
‘전략은 은공께서 준비하신 대로. 그리고 나는···.’
내 역할에 최선을 다 하자. 키르하스는 가면 아래에서 피로에 찌든 청록색 눈동자를 빛냈다.
*
“왜 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겁니까!”
제국 사절이 인상을 찌푸리며 협상 테이블을 거칠게 찍었다. 그 무례에 파프나르메어의 미간이 흔들렸다.
원탁 의회에 올라 ‘바위의 기사’라는 이름을 받은 이 답게, 파프나르메어의 표정은 내면의 분노에도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의자에 몸을 깊게 묻으며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군영에 준비가 충분하지 않네.”
“대체 그 준비라는 것은 언제쯤 충분해진다는 말입니까?!”
“글쎄.”
제국 사절은 한창 씨근덕거리다가, 벌떡 일어섰다.
“황제 폐하께선 이 일을 반드시 기억하실 겁니다. 공작.”
“안부 전해주게. 핀리, 배웅해 드려라.”
“예.”
기립해 있던 기사가 다가와 사절의 한쪽 어깨를 강하게 잡고, 그대로 막사 밖으로 벗어났다. 막사 안에, 팔짱을 끼고 웃고 있던 사내가 파프나르메어를 바라보며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사령관. 정녕코 후환이 두렵지 않소?”
“후환이라?”
“나는 제법 두려운 편이오. 아시다시피 본국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거든.”
사내는 껄껄 웃었다. 파프나르메어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페이른 왕실의 사내와 웃고 떠들 정도로, 그는 속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페이른 왕실이 데인 왕국에 하려 했던 짓들을 알고 있는 입장에선. 파프나르메이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자, 사내는 낄낄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원. 사령관, 그리 노려보기만 하면···.”
사내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결투를 신청하는 것으로 보이오. 아국의 문화에 따르면 그건 결투 신청 신호거든. 사내들의.”
“원한다면.”
페이른 로얄 그리핀 나이츠의 기사단장. 루트비히 폰 볼프스탈. 페이른 왕실의 최강자. 화려한 의상과 경박한 행동과는 정반대로, 그의 명성은 전설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원탁 기사가 그에게 밀려 겁에 질릴 필요는 없었다. 하물며 루트비히는 동부 왕국 연합의 객장에 불과했다. 페이른의 국력이 워커 사태 이후로 크게 위축되어 적극적으로 파병하지 못한 탓이다.
파프나르메어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자, 루트비히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애들 보기 부끄럽긴 하겠군. 전쟁 중에 내분이라도 일면 말이지. 아,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건 왜 묻소?”
“아름다운 꽃이 있으면 보듬고 싶은 것이 우리나라의 미덕이거든.”
그의 말에 파프나르메어의 입가에 처음 표정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가소롭다는 미소가.
“할 테면 해보시오.”
“뭐야. 이미 임자가 있소?”
“영웅이 있지.”
건국왕의 검을 이어 받고, 타락한 흑마법사들을 일도양단하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샤일드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영웅이.
데인 왕국이 병력을 급파한 이유가 그의 실종 때문이었으며, 병력을 급파하고도 전장에 나서지 않는 이유가 제국을 향한 일종의 항의 차원이었으니.
“뭐, 좋소. 그나저나, 그녀는 대체 누구기에 그 젊은 나이에 그런 대접을 받는 거요? 왕족?”
“아니, 우리의 어버이요.”
그 말에, 루트비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
“다시 해보거라.”
“영광입니드아아!!”
가벼운 갬비슨 차림의 기사가 헐떡이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는 목검을 고쳐 쥐며 땀이 흐르는 표정으로 눈 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흙먼지 한 점 묻지 않은 깨끗하고 검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격렬한 대련이었지만, 그녀에게 유효한 공격이 단 한 번도 이어지지 않은 탓이다.
기사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대검을 휘둘렀다. 강한 힘에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휘이익!
금발이 햇볕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여인의 목검이 가볍게 기사의 손목을 톡, 치고는 다시 이어져—
-타다닥.
어깨, 머리, 그리고 허리. 한 번씩 가볍게 두드리고는 몸을 반 바퀴 돌아 기사의 공세 밖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기사는 허공을 치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힘이 과하다. 아이야.”
기사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벨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우오오오오!!!”
“역시!!”
“너무 아름다우십니드아아!!!”
그녀의 주위에서 멍하니 결투를 바라보고 있었던 기사들이 환희에 찬 표정으로 괴성을 내질렀다. 그녀가 이 군영에 찾아온 지 이제 한 달. 데인 왕국의 왕실 기사들은 모두 그녀의 열정적인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건국왕의 스승이자 왕국의 수호룡. 그녀의 정체를 아는 데인 왕국의 기사들은 그녀가 찾아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