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영혼계의 문, 프타하 >
*
신은 반쯤 관념적인 존재다. 태양, 전쟁, 바다, 행운, 상업···. 선신 만신전의 신들은 자신만의 관념을 담당하며, 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마찬가지로, 대악마들 또한 반쯤 관념적인 존재다. 분노, 오염, 악몽, 저주, 타락. 그들은 자신만의 관념을 담당하진 않으나, 그들의 행동 양식에 그 관념을 더한다.
‘그러니. 영혼계로 향하는 문은 관념적이다.’
관문이라 불리는 것에 물질적인 형상의 문이 존재할 턱이 없다. 페르난데스는 진군하는 망령들의 군단을 굽어보며 팔을 뻗었다.
‘물질은 허상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선. 마력포의 파괴는 차원의 틈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지금 이 순간, 이 도시는 다른 어떤 지역들보다 차원 간의 균형에 불안정했다.
‘원한다면 만신전의 전당에도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선신 만신전, 저 지하의 지옥까지. 차원과 차원 사이에 물질 세계라는 파이가 끼어 있다면. 지금 이 공간은 구멍 뚫린 스펀지와 같았다. 다른 차원들의 관념과 영향력을 마구잡이로 빨아들이는 스펀지.
‘그러니···.’
-후우···.
페르난데스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육체의 고통, 정신적 고문에 대해 어지간히 닳고 닳은 그라고 하더라도, 영혼의 뿌리까지 갈라지며 재조립되는 그 끔찍한 감각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겠지. 페르난데스는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강철이 손에 잡혔다.
-스르릉···.
공기를 베어낼 듯 예리한 칼날이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네크로폴리스의 단검. 이 시대 그 어떤 물질보다 신성한 피에 오래 노출된 무구.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영혼을 조각내기 위해? 보다 편안하고 부작용이 덜한 방법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이 단검을 통해 영혼을 조각내고,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히던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그는 결코 단 한 수에 착수하지 않는다. 처음 이 단검을 얻었을 때부터, 네크로폴리스로 향하는 열쇠로 만들기 위해서. 그의 핏물에 단검의 칼날을 담금질했다.
성자의 혈액엔 신성이 흐른다. 그리고 신성은 그 어떤 물질보다 더 관념에 가까운 힘이다. 마력도, 무력도, 신성에 비하자면 오히려 물리적인 형상을 띈다.
신은 반쯤 관념적인 존재다. 그리고 그들의 구성입자는 관념을 상징한다. 페르난데스의 핏물 속에 흐르는 신성은 ‘전쟁’, ‘승리’, ‘정의’를 대변하는 베이타서스!
-카드드드득!
단검을 곧게 세우고, 눈 앞에 아른거리는 영혼계의 장벽에 박아 넣는다! 물리적인 충격이라면 결코 타격을 입힐 수 없는 그 장벽에, 단검이 정확히 틀어박히며 그 칼날이 갈려나가기 시작했다.
신성한 혈액에 담금질된 칼날이 조각나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그 격렬한 반작용에 어금니를 깨물며 버텼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칼날을 쥔 손이 쥐어 짜이는 것 같았다.
-꾸드득.
오른 손목이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였다. 그 손목 위에 왼손을 얹어 지지하며, 충혈된 눈으로 그 틈을 노려 보았다.
-쿵, 쿵, 쿵!
그의 심장이 영혼의 상태를 경고했다. 영혼계에 이끌리는 것은, 좋게 말해 침입이었지만. 보다 정확하게 그 상태를 묘사하자면 죽음이나 다름 없었다.
사후 세계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죽음의 문을 건너야 한다. 너울지는 영혼계의 장벽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암녹색 빛이 뿜어져 페르난데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빛에 닿은 육신이 힘을 잃는다. 불사의 성흔이 미친듯이 점멸했다. 이 이상 다가가는 것은 좋지 않다. 이것은—
“내 선택을 존중해라 베이타서스!!”
죽음? 좋다, 기꺼이 죽겠다. 오라! 기쁘게 죽겠다! 페르난데스는 핏대 선 목으로 하늘을 향해 외쳤다. 필멸자의 몸으로 대악마를 죽일 수 있다면, 목숨을 내걸어도 좋다!
성공한다면, 놈을 죽이는 것에 성공한다면! 죽음의 신으로 거듭난 그 괴물에게 진정한 죽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만 있다면.
‘돌아올 수 있다.’
-이론상.
드물게 페이자쉬 마저도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은 페르난데스에게도, 페이자쉬에게도 낯선 영역이었다. 페이자쉬는 죽음 직전에 회귀했고, 페르난데스는 죽음에게서 거부당하는 축복을 입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미지의 영역을 향해 나아가기로 합의했다.
-촤아아아악!!
영혼계의 장막이 반으로 갈라졌다. 테라스 바깥은 이제 영혼계와 물질세계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콰과과과—
도시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그들이 본디 있어야만 했던 사토 속으로. 그 위의 모든 존재들이 모래와 먼지로 부스러지며 흩어지기 시작한다.
뭄토의 영역에서 비롯된 모든 것들이, 다시금 그에게 돌아가고 있다. 영혼계의 장벽이 허물어지며 이들을 물질 세계에 묶어 두고 있던 모든 요소들이 관념으로 화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건물들이 점점 흙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거리가, 수로가, 그리고 거대한 성벽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싱크홀이 도시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도시는 나락과 절벽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저 먼 지하. 모래가 부스러지며 떨어지는 저 머나먼 지하에, 암녹색 빛이 소용돌이치며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마치 개미지옥 같다. 방사형의 구덩이 아래로, 그 부채꼴의 끄트머리엔 만물을 삼키는 영혼계의 입구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종말인가.]
그의 등 뒤에서, 카하레페르의 목소리가 울렸다. 페르난데스는 바닥을 향해 쏟아지는 도시를 내려보며 말했다.
“종말의 끝이지. 친구. 내 그대를, 그대의 백성들을 반드시—“
-쿠구구구궁!!
그 말이 마치기 전, 그가 서있던 테라스와 궁중마저 허물어져 지하로 무너져 내렸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부릅뜨고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영혼계의 문을 노려 보았다.
‘기다려라 뭄토.’
도박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그 자신과 그의 모든 가능성을 걸고 하는 일종의 주사위 놀음이었다.
다만, 승산이 제법 높은 편인.
*
“후열을 막아! 후미를 지켜! 흩어지지 마!!”
키르하스는 다가오는 해골의 머리를 쪼개고, 곧장 자신을 향해 뻗어 나오는 창을 걷어 쳤다. 창날이 바스라지며 튕겨 날아갔다.
“모여! 내게 모여라! 흩어지면 죽는다!”
흡사 전쟁을 위해 태어난 듯한. 전투를 형상화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칼을 쳐내고 방패를 차고, 창을 부러트리며. 그녀는 소용돌이처럼 전장을 누볐다.
퇴각전이 한창이었다. 후퇴의 가장 중요한 점은 열을 무너트리지 않는 것이다. 퇴각하는 군대와 와해된 군대의 차이는 그들이 열을 지키는지, 아닌지에 갈린다.
지금 이 순간, 본대가 와해된다면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녀와 수인 호족 연합에겐 패배란 곧 실패와 동의어였다.
호족 연합은 정통성에 근거해 유지되고 있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대족장이 지휘한다는 실낱 같은 정통성에.
그런 그들에겐 패배 후에 변명할 자리 따윈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승리. 그들의 정통성은 오로지 승리로만 증명될 수 있었다.
-카드드드득!
칼을 쳐내 부수며,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그녀는 양 팔, 양 다리. 필요하다면 꼬리까지 무기로 사용하며 싸우고 있었다.
퇴각전의 가장 중요한 시점은 후미가 적의 선두에 잡아먹히지 않을 시간을 버는 것이다. 아무리 망자라 하더라도, 전투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놈들 또한 자신의 몸을 소모하며 움직이는 존재.
‘그 시간만 버틴다면, 승산이 있다!’
모든 원로들이 ‘죽을 자리’라 부르는 전장. 퇴각하는 진영의 최후방을 지키는 유격대. 키르하스는 스스로 그 자리에 지원했다.
마치 곡예를 하는 것과 같다. 목숨과 승리를 양쪽 편에 걸고 뛰어야 하는 외줄 곡예. 모든 것을 얻거나, 모든 것을 잃을 그 백척간두의 상황!
그런 순간들을 딛고, 그녀에게 정통성이. 그리고 자격이 주어지는 법.
“물러서지 마라!”
“대족장! 피해야 하오! 사방이 해골들 뿐이야!”
“아니.”
키르하스의 푸른 눈이 정면을 응시했다. 푸른 길. 짙은 푸른색의···. 페르난데스의 눈동자를 닮은, 푸른 길이 그녀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주군에게 향하는 길이. 아니—
“승리는 정면에 있다.”
승리의 길이.
“미쳤소? 그쪽은 적진 한 복판이오! 뒤로, 본대로 돌아가야 해!”
“여기서 물러서면, 승리할 수 있겠나?”
“생존할 수 있겠지.”
“노예로 한 해를 살겠느냐? 아니면 나와 함께, 자유로운 수인 다운 하루를 살겠느냐?”
키르하스의 눈이 사자처럼 타올랐다. 자그마한 묘인족 소녀에 불과하던 그녀는 이제 없다. 그녀의 주위를 지키며 싸우던 수인들은 그 순간, 어떤 미증유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찬란한 빛이 그녀의 머리 어림에 내려 앉았다. 이글거리는 황야의 태양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고대 신의 가면이.
-철컥.
키르하스는 천천히 머리 위에 카단의 가면을 눌러 썼다. 후우, 가면 아래에서 뜨거운 숨이 맴돌았다. 자신의 숨, 땀, 그리고 피 냄새가 그 안에서 억눌렸다.
그것은 사냥의 냄새였다. 피와, 승리와, 복수를 향한 사냥의 냄새. 평생 악한 존재를 사냥하기로 맹세했던 고대 신의 본능이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두근.
심장의 고동이 신의 울음소리를 닮아간다. 그녀는 그르렁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핏줄을 타고 맹렬한 기운이 치솟기 시작했다.
[나를 섬겨라.]
‘아니.’
-스르릉.
부서진 칼을 버리고, 다음 칼을 뽑아 쥐며. 가면 아래에서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이 타올랐다.
‘네가 나를 섬겨라.’
그리고, 그녀의 몸이 정면으로 쏘아져 나아갔다.
*
“이겼다고···?”
“다시 말해 보거라. 적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고···?”
선두에서 피난민들을 지휘하던 원로들은, 후미에서 달려온 병졸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병졸은 피와 땀에 푹 절어 헐떡거리고 있었다.
“대족장이 적진 한복판의 사제와 장수를 모조리 죽였습니다. 적진이 와해되기 시작했고, 놈들이 본대로 퇴각하고 있습니다.”
“···허.”
원로들은 멍하니 병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그 곁을 걷던 바트라스가 껄껄 웃으며 그들의 어깨를 쳤다.
“이거, 우리 시대에 영웅이 나타났군 그래.”
“그것이 마냥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오. 부족장.”
파르탁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왜? 원로회의 입지가 더 좁아질 것이 두렵기라도 한가? 응? 사냥의 신의 대신관 나으리. 즐거워야 할 일이 아닌가.”
“···모난 정은 돌을 맞기 마련이오. 대립 대족장의 의회가 이제 어금니를 드러내겠군.”
지금의 승리는 생존을 위한 일이었다. 당연히 달가운 일이지만···. 파르탁은 기나긴 피난 행렬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전란이 더욱 복잡해지겠군.”
대립 대족장. 지금의 대족장 키르하스를 인정하지 않는 부족들이 모여 만든 반란군들. 이들은 지금까지 이리저리 피난만 다니던 호족 연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으나, 지금의 승전보가 황야에 알려지면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할 것이다.
놈들을 이긴다면, 그래. 수인 호족 연합은 비로소 하나의 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뒤엔? 파르탁은 침통하게 목을 울렸다.
“전쟁 뿐이겠지.”
세 파라오와, 다섯 개의 국가가. 이 대황야의 아귀다툼 속에서. 의미도, 목적도 불분명한 채로. 오로지 전쟁만을 계속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