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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23화 (124/388)

< 123. 나비의 꿈 (1) >

*

햇볕이 눈가 어림에 닿았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뜨기 전에,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오랜 도주 속에서 그가 깨달은 생존법이었다.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알려주지 않으려는 종류의.

‘힘이 없군.’

온몸을 기운차게 맥동하던 신성도, 근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축 늘어진 인대와 바싹 마른 근육이 힘 없이 꿈틀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분명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영혼계로 향하는 거대한 절벽을 향해 뛰어내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영혼계에 있어야 했다.

‘페이자쉬. 들려? 페이자쉬!’

그에게 대답해주는 목소리가 없었다. 베이타서스의 권능으로 갈라 놓은 영혼을 누군가가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건—

“선생님, 후후. 일어나셨네요?”

“···?!”

페르난데스는 퍼뜩 눈을 치켜 떴다. 낡은 오두막의 짚단을 엮어 만든 조악한 침상이었다. 그는 바스락거리는 침상을 한 팔로 짚으며 흐린 눈으로 저 멀리,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실루엣을 노려 보았다.

“항상 그러신다니까요. 깨셨으면 제깍 일어나시지, 왜 항상 꿈틀거리다가 일어나세요?”

“···이게 무슨···?”

페르난데스는 갈라진 목으로 말을 잇다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목을 잡았다. 주름진 살갗이 손끝에 닿았다.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알고 있는 목소리다.

아니다. 오히려 지독하게 익숙한 목소리다.

팔십 년을 함께한 목소리···.

“아, 이런. 물이요? 잠시만요!”

실루엣은 쾌활하게 떠들고는 곧 물컵을 가져와 건넸다. 아직 시야가 희뿌옇게 떠 있었다. 마른 눈이 햇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질박한 도자기 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받아 마시고는···.

그것을 잡고 있는 하얀 손이 눈에 들어 왔다.

‘아라젤모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 검지와 엄지 손톱의 아래가 연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라젤모네. 희귀한 약물을 다루는 마법사나 약제사, 또는 연금술사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증상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여인을.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여인을. 또는, 아라젤모네 물이 항상 손끝에 들어 있던 여인을 기억하고 있다.

빛 바랜, 낡은 액자에 색이 물든다. 흐린 눈에 점점 초점이 잡히며, 그가 누워 있던 오두막의 정경이 보였다.

즐비한 연금 시약들과 실험 도구들. 수로를 끌어오는 간이 펌프와 작은 동물들을 가두고 있는 조그마한 우리. 덧문 너머로 보이는 창 밖 풍경. 가을 하늘 아래 밀밭이 펼쳐진 그 땅이.

그 너머로, 가을 추수를 하고 있는 농부들. 그들에게 새참을 건네는 아낙들. 연을 잡고 뛰노는 아이들과 닭, 그리고 개의 울음소리.

그리고 익숙한 향기. 프레지아의 꽃 향기. 그녀가 직접 만들어 정제한, 그녀만의 향수.

-달칵.

그의 머릿속 낡은 액자에, 색이 돌아오고 있다. 이 풍경을 담았던 그만의 추억, 그 그림에. 가을 낮, 사늘한 바람이 몰고 온 그 향기까지도.

“아리아···.”

“네, 선생님?”

검은 머리칼이 찰랑인다. 그리고 그 아래에, 따듯한 인상의 여인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달그락.

페르난데스는 멍하니 스프에 빵을 찍어 먹으며 생각에 빠졌다.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영혼계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따라서, 가장 타당한 가설은 이 모든 것들이 환상이며 뭄토가 그를 농락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저··· 선생님? 입맛이 없으세요?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걸로 끓인 건데.”

농촌에서 고기는 생각보다 대단히 보기 드문 식자재다. 그러나 이 끈적한 스프엔 닭고기가 잘게 찢어져 듬뿍 담겨 있었다. 맛있다. 그리운 맛이다. 페르난데스는 적신 빵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좋다.”

“···그렇···죠?”

아리아는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신할 요인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열여섯 살로 돌아간 그 순간에도 이랬다.’

자신이 정말 돌아온 것인지, 이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했는지, 악마가 보여주는 꿈인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는 망상인지.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모든 가정은 비참하고, 그걸 확인하는 방법은 요원했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몸 안에 들끓어 오르는 지옥 마력의 흐름, 그리고 거대하고 조밀하게 짜여진 마력 회로를 느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시기에 할 수 없을 마법도 어떤 백래시도 느낄 새 없이 깔끔하게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겐 경험과 지식, 그리고 센스가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빵을 스프에 적시는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그녀를 보는 모든 순간에 가슴이 뛰지만.

‘마음 놓고 즐길 수는 없겠군.’

이것이 현실이라면, 지난 일년은 꿈이었나? 이것이 환상이라면, 그는 이 달콤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자살···?’

자살을 해볼까? 그것은 하책 중 최하책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면, 그는 스스로 다가온 기회를 걷어차는 것이나 다름 없다.

손가락을 살짝 접어 보았다. 몸에 베인 익숙한 수인들이 차례로 그의 손에 맺히고, 이에 본능적으로 이끌린 마력 회로가 기동했다. 주문이 그의 손아귀에 얽히기 시작했다. 마력의 섬세한 흐름이 한 가닥 마저도 손끝에서 느껴졌다.

“아리아.”

“네, 선생님?”

“교회. 교회가 어디에 있지?”

“어머···?”

아리아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차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기분 좋게 그의 이마에 얹혔다. 아리아는 잠시 자신의 이마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있다가, 문득 말했다.

“열은 없는데···. 갑자기 왜 그러세요? 무섭게.”

“베이타서스의 교회가 필요해.”

16세의 침엽수림에서 눈을 떴을 때, 그에게 전생의 사실을 알려준 것은 베이타서스였다. 그러니 확신이 필요하다면 베이타서스에게 가야 했다.

아리아는 남은 빵을 오물거리고는 꿀꺽 삼켰다. 그녀는 곧 맑게 웃었다.

“같이 가요. 마침 저도 목사님께 전달할 게 좀 있고.”

*

페르난데스는 의복을 갖춰 입고 집을 나섰다. 작고 낡은 집. [페이지의 약방]이라는 간판이 삐딱하게 걸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뭐 두고 오셨어요?”

“아니. 가자.”

“네!”

페르난데스의 말에 아리아는 하얗게 웃으며 성큼성큼 그의 앞을 걸었다. 마을을 가로질러 자그마한 언덕 위에 있는 검소한 교회로.

그의 눈 앞에 흙길 덮인 마을의 정경이 펼쳐졌다.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가다가, 그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빨랫감을 털던 아낙이 그를 보고는 정답게 말을 걸어 왔다.

“아이, 약방 선생님! 좋은 날이에요!”

“아, 네. 좋은 날입니다. 부인.”

“혹시 고뿔 약이 좀 있으면 볼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우리 잭이 가을 감기에 걸린 것 같아서요.”

“···네.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우선 지금은 행선지가 있어서.”

“아, 네. 꼭 한 번 들러 주세요! 그리고 이거, 햇감자가 좀 남았는데···.”

“고맙습니다. 부인.”

이런 식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이 마을의 유일한 약사였고, 시골 촌민들은 도시에서 공부하다 내려왔다는 그를 극진하게 여겼다. 그럴 때 마다 아리아는 자못 뿌듯하다는 듯 허리를 펴며 엣흠, 헛기침을 하곤 했다.

페르난데스는 최대한 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지금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도 꼴이 우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마침내, 교회가 나타났다. 검소한 나무 문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잠시 침을 삼켰다.

‘후···.’

내 생전 신에게 답을 물어보기 위해 교회 문간을 두드리다니.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나무 문을 힘껏 밀었다.

*

회귀 전의 삶. 평생 교회 문간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교회 문간을 밟는 그 순간이 바로 그의 마지막 날. 즉 이단심문을 받는 그 날일 것이리라 생각하며 살았다.

따라서 이 교회의 목사와는 냉담한 사이를 유지했다. 서로 존재는 알고 있으되, 결코 우호적으로 지내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 지역 토박이인 목사는 그런 그의 자세를 고깝게 보고 있었고, 아리아는 눈치 빠르게도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목사를 데리고 어디론가 나갔다.

‘착한 아이야.’

눈치 빠른 아이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가 교회에 가려는 목적이 결코 목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교회의 기도실로 향했다.

베이타서스 교회의 기도실은 검소하다 못해 살풍경했다. 열쇠검 조각이 새겨진 거대한 석상이 단상 위에 서 있고, 이를 중심으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가장 맨 앞 열로 성큼 걸어가 앉았다. 그는 베이타서스의 신물을 노려보았다. 성상의 최하단, 그 아래에 작은 부조가 있었다. 그곳엔 음각으로, 고대 게일어가 적혀 있었다.

-막토(Macto). 찬양하라.

-수페를라우도(Superlauda). 최선을 다하여.

‘시골 촌민들이 무슨 고대 게일어를 안다고. 하여간 오만한 것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성상을 향해 두 손을 그러 모았다. 현대 마학 이론에 따르면, 기도는 신에게 향하는 전서구이며, 모든 신들은 자신을 향하는 기도를 매순간 인지할 수 있다.

악마를 소환하고 그들에게 청원하는 것과,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마학적 구조상 다르지 않다.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마학과 악마 비전학에 통달한 마법사였다.

‘대답해. 베이타서스. 날 보고 있지 않나.’

과거와 완전히 같은 시간대, 같은 상황. 이것이 꿈이나 망상, 또는 악마의 환술이 아니라면 베이타서스는 자신에게 응답할 것이다. 그의 기도를 듣는다면, 신은 반드시 그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나는 네 성자였다. 이건 꿈이었나?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꿈인가? 만일 아니라면, 대답해라. 베이타서스. 그 대가로 네가 가장 원하는 답을 주겠다.’

신에게 향하는 기도는 일종의 거래다. 신들이 신도에게 대답하지 않는 것은, 냉정하게 말해서 그것이 신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들의 신에게 간구한다. 무엇을 해달라, 무엇을 부탁한다. 신은 시종이나 요정이 아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자 한다면 그들에게도 매력적인 제안을 해야 했다.

‘이 시대가 현실이라면, 아직 만신전은 봉문하지 않았다.’

만신전이 봉문 하는 순간은 물질 세계의 몰락 직전. 아직 선신 만신전과 물질 세계간의 교신이 끊기지 않은 지금이라면—

‘그러니 대답해라. 베이타서스. 나는 미래를 환시한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것이 나의 환시인가?’

제발. 대답해다오. 내가 아리아의 웃음을 바라보며 마음 편히 따라 웃을 수 있도록. 아니면 적어도. 내가 이들의 웃음과 호의를 마음 편히 무시할 수 있도록.

그 순간, 페르난데스가 노려보고 있는 성상의 밑둥. 그 아래에 게일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석상의 새김이 저 홀로 변할 턱이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이적이었다.

-너는 무엇이 진실이기를 바라느냐?

‘너는 베이타서스인가?’

-너는 내가 누구이길 바라느냐?

‘제기랄.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마라.’

그의 기도에, 잠시 글귀가 멈췄다. 그리고 곧 새로운 글귀가 떠올랐다.

-피해라. 가능한 한 멀리. 너의 미명을 위해서라도.

‘뭐라고?’

곧, 그의 머릿속에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를 찾았다. 마법사.]

‘···베이···타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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