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나비의 꿈 (2) >
*
베이타서스의 음성은 그의 뇌리를 헤집고 강타했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그러모은 두 손을 풀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목소리가 베이타서스의 것이라면, 처음 저 석상의 문자를 바꾼 것···. 나에게 대화를 시도한 것은 베이타서스가 아니다.’
가정 1. 적어도 두 초월체가 지금 자신에게 개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꿈인지, 아니면 내가 전생이라는 허황된 꿈을 꾼 것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가정 2. 자신의 전생이 꿈이라면? 또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둘 다 대비해야 한다.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으니. 부디, 영혼계로 뛰어든 이후 겪는 일종의 환상이길 바라고 있긴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한 가지 가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깍지를 풀며 일어섰다. 둘 중 무엇이든 좋다. 이 모든 것이 뭄토의 계략이라면, 놈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둘 중 무엇이 환상이라 하더라도. 얻는 것이 있다.’
페르난데스에겐 지금 이 시기로부터 사십 년 후까지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정보가 있다. 전생이 꿈이라면, 그래. 차라리 좋다. 이제부터 하나씩 바꿔 가기에도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내겐 힘이 있으니.’
마력 회로. 얼마나 그리웠던가. 청동 왕좌의 불완전한 기능을 애써 가다듬으며 섬세하게 조율할 필요가 이젠 없다. 그의 전성기를 30년은 더 이르게 구현할 자신마저 있었다.
‘반면 지금 이 순간이 나의 환상이라면.’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지금 이 시간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최대한 모으고, 그 후에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니. 거기에···.
‘이런 잡스러운 짓을 저질러야 할 정도로 뭄토가 약해져 있다는 반증!’
권능이 온전한 뭄토라면 능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십대 청소년 정도는 무력화시키고 남음이 있다. 그의 권역에 들어섰는데도 고작 보여주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환상 뿐이라면···.
‘이게 끝이라면 넌 죽는다.’
페르난데스는 일어서서 성상을 향해 고개를 삐뚜름하게 돌렸다. 그는 픽 웃으며 성상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꼭 해보고 싶었어. 어쩌겠나. 지금 나는 사제 따위가 아닌데.”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등 뒤에서 무언가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가 돌아보니, 감자를 한 소쿠리 들고 있던 아리아가 바구니를 떨어트리고 당황하고 있었다.
“세, 세상에. 선생님! 지금 그게 무슨···! 빨리 나가요, 빨리!”
“어···?”
“아무리 종교가 다르다고 해도 어떻게 교회에서 신성모독을···. 정말!”
어어, 하는 새에 아리아의 손에 끌려 나갔다. 그는 겁에 질려 그를 잡아당기는 아리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멀어지는 성상을 노려 보았다.
‘네 개를 보내 보거라.’
*
집으로 돌아와 거의 한 시간 가량 훈계를 들은 후에야 그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아리아를 집에 돌려보낸 후 간단한 실험을 시작했다.
[모리스 란의 수정구]
제조법은 간단하다. 총 다섯 가지 주문을 박아 넣고, 짐승의 생혈과 일곱 가지 약재를 섞어 만든 용액에 깨끗한 묘안석, 또는 그에 준하는 구형 결정체를 담는다.
-치이익.
마력이 흘러 들어간 용액이 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 묘안석을 구할 방법은 없었지만, 수정구 자체는 약제상, 연금술사, 또는 방랑마법사들의 필수품 중 하나였다. 마법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형상을 띈 기물이니까.
그는 행낭에서 그가 이 시기에 애지중지하던 탈출의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위기 상황에서 발동시키면 감각 교란 주문이 걸린 안개를 내뿜고, 시전자에게 가속 주문을 걸어주는 귀한 물건이다.
‘이 시기에 나에겐 도주용 소품이 필요하지 않다.’
이걸 통해 목숨을 구한 적이 더러 있지만, 이 시점에서 전성기의 페르난데스를 막아설 수 있는 영웅은 극히 드물고, 그 영웅들이 그를 찾아올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페르난데스는 수정구에 얽힌 주문을 해주하고 천천히 용액에 집어 넣었다.
-촤르르륵.
끈적하게 부글거리던 용액이 거품치며 수정구를 휘감았다. 그 위로 페르난데스의 손가락이 얽히며 만트라를 짚었다.
차례로 [구축] [감지] [지시] [지도], 그리고 [나침반]. 그것으로 [모리스 란의 수정구]가 완성된다. 복잡한 마법 기물이지만, 그의 마력 조율 감각과 경험이라면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촤아악!
수정구의 표면에 혈액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기이한 도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음산한 붉은 빛이 수정구를 담고 있는 용액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래서야 빼도 박도 못하고 이단이구만.’
지금 누가 이 공방 문을 연다면 곧장 가장 가까운 교회에 이단재판을 신청할 것 같은 광경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하루아침에 뒤바뀐 처지가 퍽 우스웠다.
그러나 필요한 일.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수정구의 표면에 얹었다. 뜨겁게 맥동하는 주문의 잔향이 손 끝에서 느껴졌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시간은 충분하니. 그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눌렀다. 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정구의 표면으로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꽈득.
단단한 젤리 안에 손가락을 쑤셔 박는 감각이었다. 그는 손가락 끝 감각에 집중하며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렸다. 전서구, 까마귀, 독수리. 무엇이 되었든 새의 형상을 띈 것···.
-꾸드드득.
수정구가 담긴 피가 부글거린다. 수정구의 표면을 따라 주술 문자들이 물결치며 용액 속으로 스며들었다. 모리스 란의 수정구. 총 다섯 마리의 하수인을 생성해 동시에 부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법 기물.
하수인을 부리는 주문술사들에게 있어서 꿈과 같은 마법 중 하나다. 전투의 보조부터 작게는 이런 식의 활용도 가능했으니까.
-꾸르르륵.
핏물 속에서 붉은 까마귀들이 기어 나왔다. 페르난데스는 수정구에 손을 넣은 채로 정신을 집중했다. 날아가라. 날아가서, 너희가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다.
-퍼드드득!
잠시 몸을 털어내고,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굴뚝을 통해 비상했다. 모든 하수인들이 페르난데스에게 시야를 공유해왔다. 하늘로, 하늘로. 지평선이 둥글게 휘어질 때 까지 그저 저 천공을 향해!
-후우우웅!
날개가 바람을 가르는 촉감과 고고도의 거친 바람이 내는 소리까지. 모든 감각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평범한 주문술사들은 이 정도의 교감을 유지한 채 한 마리 이상의 하수인을 부리기 버거워 하지만···.
‘가라.’
-푸드드득!
페르난데스는 다섯 마리의 까마귀를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날리며 섬세하게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이 근방의 지리는 익숙했다. 당장 필요한 정보는 물론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인지 아닌지, 그것 뿐이지만.
‘최대한 이 시기의 정보를 알아 둔다.’
까마귀들에게 비행 방향을 지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페르난데스는 수정구에서 손가락을 뽑았다.
‘북부인들의 땅, 데인 왕국, 서부 대황야, 그리고 백국마족의 평원과 아세아스 고위 의회.’
그가 기억하는 역사와, 이 시기의 역사. 그리고 회귀한 이후 개변한 역사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해 전략을 수립해야 했다. 만일 지금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뭄토를 죽인 이후 돌아갈 수 있다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정보들이다.
“이제 손님 맞이 준비를 해보실까.”
잠시 손가락을 풀고는, 페르난데스는 다른 기물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마법사의 공방이었고, 이곳에서 그가 해둘 수 있는 팻감은 무수히 많았으니까.
*
깜빡 졸았다. 페르난데스는 어느새 들어와 자신의 눈 앞에 커피를 따르고 있는 아리아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들 때에도 언제나 날서 있던 디모니카의 육신과는 달리, 이 시기 페이자쉬의 육신은 황혼에 다다라 시르죽어 있었다. 밤샘 작업은 무리였나. 밤마다 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디모니카의 몸을 가지고 있었을 땐, 삼 일에 한 번씩 잠드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페르난데스는 멍한 머리를 흔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익숙해져야 한다. 얼마나 더 이 미명 속에 갇혀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아.’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것은 자신의 욕심이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신이 미래를 환시했을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그렇다면.
“세상에. 집이 엉망이더라구요. 선생님. 제가 얼추 치워는 봤는데··· 괜찮나요?”
“물론이지.”
지금이 현실이고, 지난 일 년이 꿈이라면···. 나는, 아리아. 나에겐 아직 기회가 있는 셈이구나.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커피를 들이켰다. 그 따듯하고 씁쓸한 액체에 잠이 달아나고 있었다.
“밤을 새신 건가요? 몸이 상한다고 제가 누차 말씀드렸는데···. 선생님은 가끔 보면 오래 살고 싶어하지 않는 것만 같아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정말로요! 참, 마을 사람들 오래 살라고 보약도 짓고 병도 고쳐주면서 정작 자기 몸은 제대로 건사를···.”
페르난데스는 커피 잔을 들어 입술에 올리며, 자신을 향해 열변을 통하는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소리가 멀어지고, 햇살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빛났다. 지금 이 순간, 그녀만이 이 세상의 전부였다.
‘이게 현실이길 바라는 건가?’
지옥 마력에 오염된 심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악마와 피의 계약을 나누지 않았다. 사바트를 받기 전이라면 아직 돌아갈 길이 있다. 마력 오염은 개선할 방법을 찾으면 될 일이고···.
약해진 육신? 마법의 비의가 그의 손 안에 잠들어 있거늘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래.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면, 자신이 미래를 환시한 것이라면···.
‘달콤하군.’
아리아는 한창 열을 올리며 조잘거리다가, 미소 짓고 있는 페르난데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전혀 듣고 있지도 않잖아요!”
“아냐, 다 듣고 있었다.”
“거짓말.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건강을 챙기라고?”
“그 다음은?”
“사제의 법도가 땅에 떨어졌구나. 어딜 스승에게 따지려 드느냐?”
“이럴 때만!”
아리아는 약이 오른 표정으로 소리질렀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시기의 그녀는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시골 처녀에 불과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하마. 아리아.”
“네?”
“기왕에 이리 된 것. 오래 살아 보자꾸나. 아주 오래. 그리고···.”
적어도 너 만큼은 행복하게. 너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 페르난데스는 그리 말하며 아리아의 머리를 흩어 놓았다.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넌 죽는다 뭄토. 하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감사를 표하마.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눈을 감고 커피를 마셨다. 그래, 감사를 표하마.
‘네 종복들은 가장 마지막에 죽여 주겠다.’
아리아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물질 세계에 악마와 이단은 필요하지 않다. 이게 현실이라면, 너희는 나의 손에 죽어야 한다.
*
밤이 찾아왔다. 마을 어귀에 모인 다섯 명의 사람들은 천천히 병장기를 들어 올리며 마을로 진입하고 있었다.
“데메테르. 서쪽으로 향하도록. 베일, 남쪽을 맡아라. 카를, 나와 함께 정면으로 돌입한다.”
“막토.”
거꾸로 꽂힌 검은 열쇠검의 자수가 크게 그려진 로브. 베이타서스의 이단심문관들이었다. 코드네임 안젤로, 그는 칼을 뽑아 들어 올리며, 품 속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임무 개시. 형제들. 베이타서스의 영광을!”
-촤악!
호리병이 날아가 부딪치며 요란하게 깨졌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액화 화염이 넓게 흩어지며 마을의 외곽을 타고 불타 올랐다.
화염과 재, 이 시기의 이단심문관들을 상징하는 요소다. 그들은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그 순간, 마을의 외곽 목책을 요란하게 집어 삼키던 화염이 한 순간에 말소되었다.
“뭐!?”
“밤에 불장난하면 아침에 후회할 걸.”
그들의 정면, 저 멀리 마을 광장을 가로지르며. 수염을 짧게 기른 호리호리한 중년 사내가 천천히 걸어 오고 있었다. 안젤로는 칼을 쥔 손을 다잡으며 그를 노려 보았다.
이번 임무의 타겟. 배신자 방랑마법사 페이자쉬. 날카로운 눈매와 비웃는 듯 비틀린 입고리, 양팔에 그려진 화려한 문신. 40대 전후로 보이는 외모. 확실했다.
“오만인가, 회개인가. 마법사?”
“거래다.”
“오만이로군.”
안젤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칼을 치켜 들었다. 등 뒤로 돌린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그의 뒤에 있는 이단심문관들에게 지시했다.
[포위.]
다른 이단심문관들이 재빨리 담을 타고 넘으며 마을 곳곳으로 흩어졌다. 안젤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돌진할까? 아니면···.
“너희의 신과 거래를 틀어 보려 했는데, 원치 않는 모양이더군. 그럼 너희에게 대신 들려줄까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기회다. 안젤로는 재빨리 소매에서 단검을 뽑아 집어 던졌다. 디모니카의 근육이 만들어낸 놀라운 속도, 세인트메탈 단검이 빗살처럼 날아가 마법사의 머리를 향해—
-챙!
“너희를 쓰러트린 후에 들려주는 편이 간단하겠군.”
“덮쳐라!”
마법사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던 단검은 허공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그러나 첫 공격이 먹힐 것이라곤 애당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안젤로는 크게 외치며 마법사를 향해 달려 들었다.
동시에,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이단심문관들이 마법사를 향해 뛰어 들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보며 짙게 웃었다.
“많이 늙었군. 파비아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