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나비의 꿈 (4) >
*
파비아노는 아무런 상처도 입고 있지 않았다. 총 일흔 세 번의 격전 속에서, 페르난데스는 맨손으로 그에게 유효한 타격을 단 한 차례도 입히지 못했다.
애초에 제압을 하려던 것이 아니기는 했다. 파비아노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피로감과 무력감 속에 주먹을 쥐었다가 풀고, 다시 쥐며 골목 어귀에 기대어 있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백 번 채울까?”
“허억···. 허억···.”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싸울 땐 싸우는 느낌이 있었다. 기술과 기술이 얽히는 감각도, 살을 치고 밀어내는 감각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처럼, 페르난데스는 멀쩡한 얼굴로 저 멀리 골목 어귀에 나타났다.
“비겁한··· 자식!”
“어떻게 마법사가 이단심문관 앞에서 정정당당히 승부를 보겠나?”
“말은···!”
“어쨌건, 시간이 아깝군.”
저 멀리 동이 터오고 있었다. 심야에 시작한 격전이 아침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파비아노는 헐떡거리며 가을 하늘에 푸른 빛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마을 주민들도··· 한 패였나···!”
“내가 잠재웠네. 하루는 푹 자겠지.”
농촌의 아침은 이르게 시작된다. 거기에 밤새 이런 시끄러운 격투 속에서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파비아노는 마른 침을 삼키며 페르난데스를 노려 보았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더 싸울 용의가 없다면, 이제 대화를 좀 해보겠나?”
“···무슨 말이 하고 싶나?”
“동맹 제안일세.”
“···뭐?”
파비아노는 상처 입은 야수와 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파비아노의 온몸 근육이 바싹 긴장하는 것이 손 아래에서 느껴졌다.
이 녀석이 일격을 먹인다면 피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는 파비아노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흑마법에서 손을 뗐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너희가 이단 사교도 배교자 쓰레기라 부르는 놈들에게서 손을 뗐지. 그러니, 우리는 공공의 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야.”
“그 말을 믿어야 하나?”
“원한다면 내 마력 회로를 걸고 맹세하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따를 용의가 있네.”
“···왜?”
파비아노는 혼란에 빠졌다. 이 흑마법사가 자신을 또 다시 농락하려 하는 거라면? 혹은, 자신을 타락시키려는 것이라면? 그가 복무하던 긴 시간동안, 악마에게 타락해 배교한 이단심문관들은 손에 꼽을 수 없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이 된다면? 그것보다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는 마치 파비아노의 생각을 읽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 다른 방도가 있겠나? 자네가 날 믿든 아니든. 자네는 날 죽일 수 없네.”
“난 널 믿지 않는다. 흑마법사.”
“그러게. 그래도 자네를 죽이진 않겠네.”
“네가 얻는 것이 뭐지? 너희 이단 잡것들을 배신하는 대가로 네가 얻는 것이.”
그 말에, 페르난데스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둘 중 하나지. 행복한 삶, 또는 거대한 사고 실험.”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면, 성공한 이후에 가정을 꾸리고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여생을 마무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니라면, 지금이 모두 나의 꿈이고, 환상이고, 뭄토가 만들어낸 거대한 환술이라면. 이건 일종의 사고 실험이 될 것이다. 악마를 섬멸하는 방식에 대한 현실적인 방법론 연구가.
“그러니. 내 의견을 이단심문청과 교황청에 전달하게. 가게나.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살려 보내줄테니.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제피스나 베오른과 함께 오게.”
“···!!!”
파비아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귀신을 보는 것처럼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곧 할 말을 찾아 더듬대다가, 고개를 돌렸다.
페르난데스는 떠나가는 파비아노의 축 쳐진 등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적어도 전생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아리아의 가족도, 그녀의 고향도 불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아리아가 받을 삶의 고통을 한 움큼 정도는 덜어냈다는 점이었다.
‘내가 모두 이고 가마. 아리아. 네 고통, 네 슬픔, 네 애환을. 이것이 환상이고, 이 모든 것이 나의 자기 위로에 불과하더라도. 적어도 내 속죄 정도는 될 수 있기를.’
*
아리아는 덧창을 열고 창틀에 얹은 먼지를 털었다. 그녀는 연신,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콜록거리며 찻잔에 찻숟가락을 넣고 덥힌 우유를 젓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낡은 고서를 뒤적거리며 우유 섞인 홍차를 홀짝였다. 아주 얄미운 자세와 모습이었다. 그는 일부러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며 흥얼거렸다.
“이··· 이··· 못된 아저씨.”
“어허, 아리아. 내 착한 제자야. 스승을 향한 존중과 존경이 최근 들어 더더욱 찾기 어려워 지고만 있구나. 나 때는 말이다···.”
“으으으!!”
아리아는 먼지떨이를 바닥에 던지며 페르난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아리아를 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쪼르르륵.
그러자 텅 빈 잔에 따듯한 우유가 차올랐다. 아리아는 씩씩거리더니 한숨을 폭 내쉬고는 잔을 들어 우유를 들이켰다.
“그래, 우유는 성장에 좋단다.”
“저 이제 스물셋 이거든요?”
“내가 스물셋 때는 일년에 삼 센티는 자랐단다.”
“이···이익!”
아리아는 씩씩거리며 우유를 모두 들이켰다. 페르난데스는 껄껄 웃고는 책을 덮었다. 그는 아리아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리아는 낯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작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왜죠?”
“무엇이 말이냐?”
“대체 왜 절···. 아니, 후견인이라뇨? 선생님. 절 어디에 보내고 싶어 하시는 건데요?”
“글쎄다. 네가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아리아는 슬픈 눈으로 그를 올려 보았다. 페르난데스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랄만한 것이 크게 뜀박질 쳤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우습지만. 아리아, 나는 제국에 제법 유명한 석학들과 교분이 있단다. 내 이름으로 수학한다면 너는 훌륭한 약제사나, 연금술사, 원한다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단다.”
“선생님보다 뛰어난 사람들인가요?”
“아니?”
“그럼 대체 왜요?”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잘 가르치는 사람들이긴 하지.”
페르난데스는 오만하게 웃었다. 아리아는 잠시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텅 빈 찻잔을 보았다.
-쪼르르륵.
그녀의 눈 앞에서 잔이 다시 차올랐다. 따듯한 우유가 잔 안을 맴돌다가, 그 가운데에서 초콜릿 크림이 꽃처럼 피어 올랐다.
“한잔 더 하겠느냐? 네가 좋아하던 것 아니냐.”
“···열네 살 때쯤이면 그랬죠.”
“나는 서른아홉 살에 우유를 처음 얻어 먹고, 그 뒤로 우유라면 사족을 못 쓴단다.”
헛간에서의 만남. 오랜 추적과 도주에 피폐해진 페르난데스에게 다가와 따듯한 우유를 건네던 아리아의 모습이 우유 표면 위에 초콜릿 크림과 함께 그려졌다.
아리아는 잠시 숨을 멈추고 찻잔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인형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왜 저를 보내려 하세요?”
“이유는 말했을텐데.”
“제가 싫증나세요?”
“평생이 지나도 그럴 리가 있겠느냐?”
“제가 필요 없으시다거나···.”
“너는 내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란다. 아리아.”
그의 말에 아리아는 상처 입은 얼굴로 멍하니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에,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쪼르륵.
거품이 일며, 초콜릿 크림이 꽃처럼 만개했다. 향은 없었지만, 그녀가 익히 아는 꽃이었다. 프레지아. 페르난데스는 멍하니 찻잔을 바라보는 아리아를 향해 조용하게 말했다.
“너는 내게 충분한 존재다.”
“···반칙이야. 정말.”
“그러니, 지금은 떠나 있거라. 당분간이면 된다.”
“얼마나 걸리시는데요.”
“글쎄다. 나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확신하긴 어렵다만···.”
페르난데스는 얼굴을 붉히고 조용히 찻잔 테두리를 쓰다듬는 아리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문간을 향했다.
-똑똑.
“페이지 선생, 계시오?”
“들어오시겠소?”
“선생이 나오시는 것이 어떻소?”
“하, 현명하시군.”
마법사의 공방에 발을 들이고 싶진 않다, 이 뜻이렸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리아가 따라 일어서려 하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내 얼마나 걸릴 지는 모르지만, 아리아. 적어도 이것이 가치 있기를 바랄 뿐이란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초로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문간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형한 눈빛과 다부진 체격, 허리 굽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데스보다 한 뼘은 더 큰 체고. 그리고, 익숙한 흉터와 표정까지.
‘당신도 많이 늙었군. 제피스 시라다스트.’
이 나이까지 살아남은 디모니카라. 대단히 드문 인재일 것이다. 아무런 시종도, 호위도 대동하지 않은 것은 그의 자긍심과 자신감을 상징하겠지. 페르난데스는 오랜 친구를 만나는 느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날 보고자 했다 들었소. 페이지 선생.”
“차 한잔 하겠소?”
“당신 집에서 당신이 주는 차가 아니라면.”
“그럼 교회로 갑시다.”
“···그러고 싶어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고 싶진 않소만, 그쪽과 서서 이야기를 끝낼 것이 아니라면 내가 굽혀야지.”
그쪽이 굽히진 않을 테니. 페르난데스가 웃으며 말하자, 제피스는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
교회의 담임 목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어주고는 재빨리 자리를 비켰다. 현명한 처사였다. 마을에서 가장 껄끄러운 약제사와, 이단심문청에서 파견된 고위 이단심문관의 회동에 참여하기엔 그의 성품이 견딜 수 없을 테니까.
-탁.
건조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사제실에서 페르난데스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텁텁하고 묽은 차를 들이켰다. 그가 마시는 것을 보고 제피스가 따라 마시며 그를 노려 보았다.
“페이지 선생. 아니면 페이자쉬라 부르는 게 낫겠나? 이단. 내가 널 살려 두어야 할 이유가 뭐지?”
“궁금증 때문이겠지. 이단심문청의 높으신 분들을 꿰고 있고, 이단심문관들을 끝끝내 살려서 돌려 보낸 데다가, 타락을 시키지도, 마력을 주입 하지도, 마술을 걸지도 않았으니까.”
페르난데스는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피스에게 다가갔다. 제피스는 눈썹을 꿈틀거릴 뿐 자세에 변함 없이 그를 내려 보았다.
“왜? 대체 왜? 그 이단 마법사는 대체 왜 이단심문관들을 살려 두었을까? 마법을 건 흔적도 없고, 현혹하지도 않고, 그저 정말로. 대화를 하고자 했다? 왜지? 원하는 게 뭘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치지. 뭐가 달라지지?”
-드르륵.
제피스는 품 안에서 길쭉한 원통형 기계 장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페르난데스는 그것을 힐끔 보고 얼굴을 굳혔다.
“드워븐 썬더 쓰로워? 이단심문청에 없다고 들었는데?”
“글쎄. 그렇지 않더군.”
“빌어먹을 마르티리오 형제.”
“···네 정체가 뭐지?”
페르난데스는 끝까지 드워븐 썬더 쓰로워가 없다고 우겨 대던 그 고집불통 엔마기카 형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제피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르티리오 형제는 오 년 전에 전사했다. 그리고 그 형제가 생전에 병기고를 관리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이단이 알 수 있는 정보는 아니지. 네 정체가 뭐지?”
“긴 이야기가 될 거야. 믿기도 어려울 거고. 괜찮겠나?”
“날 믿게 만드는 편이 좋을 거야. 내가 믿지 못한다면 그건 이단이 내뱉는 개소리일 테고, 그런 소릴 들은 이단심문관이 할 일은···. 아주 단순하니까.”
제피스는 위협적으로 총구를 겨누어 페르난데스를 향해 까딱거렸다. 그 무례한 행동에도, 페르난페르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리의 거리 사이에 합의점이 있다고 믿어 보자고. 제피스 형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