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27화 (128/388)

< 127. 나비의 꿈 (5) >

*

지금 시점으로부터 향후 발생할, 굵직한 이단 사건들. 개중 인류 문명 사회에 지대한 타격을 입히는 사건과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약해진 시점과 공격하기 가장 적합한 위치에 대한 정보들.

전세계에 흩어진 토치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 헤매는 그 값진 정보들이 페르난데스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제피스는 점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페르난데스의 정보를 단순히 값어치로 따지자면···. 글쎄, 이단심문청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어도 모자라지 않을까.

페르난데스는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책상을 톡, 톡 두드렸다.

“그래. 이제 내 말이 믿기나?”

“이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지금 시점에서 교차 검증이 가능한 것들부터 확인해 보게.”

“예언자였나?”

“아, 나도 그건 헷갈리더군.”

예언이라. 페르난데스는 짧게 깎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정말 예지몽이었을 수도 있다. 지난 일년간의 기억은. 지금이 현실이라면, 그걸 예지몽이라 부르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 확신할 수는 없는 법···. 페르난데스는 날카로운 눈매로 창백하게 굳은 제피스를 바라 보았다.

“그러니, 내 제안 하지 않나. 나와 손을 잡겠나?”

“네가 얻는 것이 뭐지?”

“이미 파비아노 형제에게 말했었는데.... 그건 전달 받지 못한 모양이군. 행복한 삶과 거대한 사고 실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얻게 된다고.”

“네가 행복한 삶을 바랄 줄은 몰랐군.”

“누가 아니겠나?”

페르난데스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길게 묻으며 팔짱을 꼈다. 화려한 문신이 그려진 팔뚝이 보였다. 태양을 삼키는 악마, 그리고 그 악마를 둘러 싼 수많은 주술 언어들이 그려진 문신이었다.

지독하게도 이단적인 문신이다. 제피스는 그 그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무턱대고 너를 믿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이단.”

“그러니, 신뢰가 아니라 거래를 하자는 것 아닌가.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를 살짝만···. 좁혀 보자고.”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일렁이는 촛불 탓에, 그의 그늘진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악에 물든 마법사의 전형적인 외향. 물론 제피스는 외모로 이단을 판단하진 않지만···. 그의 긴 이단심문관 경력에서 비롯된 판단력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 혼자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군.”

“원하는 대로 하게. 내겐 시간이 많지. 하지만 자네들에겐 그렇지 않을 거야. 우선, 그래. 엘프를 믿지 말고, 북부인들을 경계해야 하며, 데인 왕국의 헬르가 왕을 반드시 죽이고, 페이른 왕국을 조사하게. 그건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이니.”

페르난데스의 말에 제피스는 안색을 굳히고 일어섰다. 저 자가 한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는 일이나, 지금 당장 그가 해야 할 일은 진위를 파악하기에 앞서 이 사건을 교단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

모든 그림자에 악마가 웃음 짓는 시대. 선인이 장대에 걸리고, 현자가 광기에 휩싸이고, 수녀가 음행을 저지르고, 영웅이 독살 당하는 시대.

페르난데스는 마차의 앞에 앉아 채찍을 치며 말을 몰았다. 그는 가을 낙엽이 흩날리는 산길을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마부석은, 단적으로 말해도 편안한 공간은 아니다. 마부석 앞에 늘어진 유등이 녹슨 걸쇠 탓에 삐걱거렸다.

이 시기의 산골은 위험했다. 사실, 이 시기의 그 어떤 여정도 안전하다고 하긴 어려웠다. 도심과 마을에서 조금만 벗어난 길목은 악마, 악에 물든 졸개나 들짐승, 괴물들이 산발적으로 출몰했다.

이를테면, 저 광경 처럼.

-푸르륵!

말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멈춰섰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고삐에서 손을 놓으며 길가에 쓰러진 시체와, 그 시체를 퍼먹고 있는 워커를 바라 보았다.

-으적, 으득.

워커는 탁한 눈으로 말 없이 여행자 차림의 시체를 뜯어 먹고 있었다. 복강이 모두 뜯어져 나간 시체는 구더기가 슬은 장기를 길바닥에 흩어 놓고 있었다.

흔한 일이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들어 잠시 놈을 겨누고는, 그대로 던졌다.

-퍼억!

워커의 정수리에 깔끔하게 단검이 파고들었다. 놈은 살조각을 입에 문 채로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 마법을 쓰기에도 아까운 상대였다. 그러나, 이런 놈들이 이 시기 산간에 온통 퍼져 있을 것이다.

페이른 근방의 산간엔 워커 사태가 퍼져 있었다. 청동 천칭단은 뎀드리자드와의 세력 싸움에서 빈사 상태가 되었지만, 놈들이 불러 일으킨 워커 사태는 동부 왕국 연맹의 모든 지방을 불사르고 있었다.

“선생님?”

“나오지 말거라. 아리아. 쉬고 있어.”

“무슨 일이 있나요?”

“아니.”

페르난데스는 고삐를 틀어 겁에 질린 말을 이끌었다. 마차 안에선 다시 조용히 사각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여정 중에, 아리아는 항상 그가 적어준 마법서를 읽곤 했다.

“후.”

페르난데스는 수통을 뜯고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삐를 고쳐 잡았다. 제국으로 향하는 길은 비교적 바르게 닦여 있고, 안전한 편이지만. 그는 그 길을 이용할 수 없었다.

베이타서스 교단과의 거래는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아직 제국 입장에서 그는 현상수배자 방랑마법사 중 하나였으니까.

-다각, 다각.

그는 유등이 어스름하게 밝힌 밤길을, 그 끝없이 펼쳐진 것만 같은 어둡고 기나긴 길을 바라보았다. 산길 그 어디에서도 갑작스레 괴물이 튀어 나올 수 있었고, 그 탓에 그는 편히 쉬거나 잠들 수 없었다.

“이 나이 먹고 하기엔 힘든 여정이야.”

하지만 누구에게 위탁할 수도 없는 여정이다. 적어도 아리아는 자신의 곁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할 테니까.

그는 밤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우선 제국령에 근접했을 때, 이단심문청에 연락을 해야 했다.

*

“그대의 말은 사실이더군.”

“그 말이 얼마나 듣고 싶었나 몰라.”

페르난데스는 바울 4세의 눈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수많은 주문이 그의 몸을 얽고 있었고, 그에 모자라서 엔마기카들이 만들어낸 봉인진 안에 무릎을 꿇고 있는 채였다.

이단심문청에 소환된 이후, 그를 대하는 이단심문관들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꺼림칙함, 증오, 분노, 혐오. 말이라도 걸면 혀를 잘라낼 것 같은 예리하고 싸늘한 불신.

그리고 교황이 직접 내방하기로 결정이 된 이후, 그의 처지는 한층 더 나빠졌다. 집요하게 마력을 차단하는 결계와 24시간 계속되는 헤레티카들의 감시. 언제나 그를 겨누고 있는 석궁과 단검들까지.

지금 이 순간도, 예배당의 한복판에 무릎을 꿇은 채 묵직한 칼을 차고, 수십 명의 이단심문관들의 창과 칼날 앞에서야 간신히, 그는 바울 4세를 만날 수 있었다.

바울은 천천히 로사리오를 손 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믿음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며, 그대와 우리 사이에 놓인 강줄기는 쉽사리 건널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지. 그대의 손에 목숨을 잃은 우리의 형제들이 얼마나 되던가.”

“내가 먼저 때린 적은 없어. 그쪽에서 날 죽이려 들지 않았나.”

“그대가 양민을 도륙하고, 영웅들을 독살하고, 사제들을 배교시키던 과거는 깨끗하게 잊었나?”

“내가 기억력이 나쁜 편이라서.”

페르난데스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자, 그의 곁에 있던 이단심문관들 사이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촤르르륵!

“컥!”

“기억 나게 해줄까?”

“···후회 할텐데?”

그의 목과 팔을 결박한 사슬이 거칠게 당겨지며, 그의 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페르난데스는 키득거리며 자신에게 창날을 들이 밀고 있는 이단심문관을 바라 보았다.

“어떻게 후회하게 하겠다는 거지? 이단, 네가 지금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날 죽이면, 너희는 패배한다. 거의 반드시 패배하겠지. 아직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아직 문명 사회에게 시대를 이기어낼 여력이 남아있을 때에. 바로잡아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그건 사실이네. 칼을 거두게, 형제들.”

-스륵.

제피스가 창날을 눌러 내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침잠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내려보다가, 교황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하, 이 자의 증언 중 거짓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보고는 받았네. 그래. 사실이더군.”

“이 자를 믿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자를 이용할 방법은 있습니다.”

“계속해보게.”

“저는 이 자리에서 감히, 새로운 부처의 창설을 요청 드립니다.”

제피스는 천천히 페르난데스의 곁에 섰다. 디모니카가 이단을 비호하는 광경이라는 것은, 이단심문관들에겐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탁.

“교황 성하의 친전일세. 정숙하시게.”

한 노인이 나무 지팡이를 거칠게 바닥에 찍으며 호통쳤다. 페르난데스는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노인의 얼굴을 보며 픽 웃었다. 반가운 얼굴이 또 있었다.

‘마르코 선데일···.’

이단심문관은 이성과 합리로 진리를 밝히는 빛이라. 그렇게 말하던 인상 푸근한 중년 사내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새로운 부처라?”

“악마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오히려 악마들 그 자체일 것입니다. 저희는 악마의 무구, 그들의 술수, 그들의 병기와 유물들을 대봉인전에 봉인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심장 속 벌레가 사자를 고꾸라트리는 것처럼. 교황 성하. 대봉인전을 이용하여, 이단의 힘으로 이단을 정화하는 새로운 부처의 창설을 제안 드립니다.”

“위험하지 않겠나?”

“가라사대, 너희의 앞길이 온건함은 너희의 수치라. 너희가 아니오, 주의 양떼를 안온히 하라. 너희는 가시밭길을 기꺼이 거닐며 너희의 피로 길을 닦으라.”

“주께서는 능히 너희가 간구하는 바를 알며, 이를 더하시리라.”

“막토.”

제피스의 말에 바울이 후창하며 짧게 성호를 그었다. 제피스는 잠시 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따라서, 이 자를 이용하고, 이 자와 같이 이단을 기꺼이 심판할 다른 이단들을 수배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 대한 책임과 감시로 제가 이들을 이끌겠나이다.”

“그대의 힘과 지혜라면 능히 저 마법사를 제어할 수 있겠지···. 그래. 좋네.”

교황은 잠시 눈을 감았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지금 이 판단은, 교회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찾을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교회의, 가장 순수해야 할 이단심문청에 이단을 입단 시킨다는 일이.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는 그 일이.

이 일을 결정하는 교황의 마음이 이럴진데, 이 제안을 올려야 했던 제피스의 마음은 어떨까. 교황은 그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경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제피스는 돌과 같이 평온했다. 그 모습에 교황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대라면 내가, 아니 우리 모두가 믿고 맡길 수 있겠네. 그대의 뜻대로 하게나.”

“믿음에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단심문청에 네 번째 부처가 만들어지겠군.”

교황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손뼉을 쳤다. 그는 보다 경쾌해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부처의 이름을 무어라 하겠나?”

“렐리기오사 말레디카(Religiosa Maledica : 죄악의 수도회)라 하겠습니다.”

제피스는 사슬에 묶여 무릎을 꿇고 있는 페르난데스를 내려 보며 말했다. 그의 벗은 상반신엔 악마와 이단을 숭배하는 배교적인 그림과, 사악한 주술 문자들이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태양과 들판, 산악을 삼킬 것처럼 혀를 내밀고 있는 뿔 달린 악마의 형상이 그의 등판과 양 팔에 가득 그려져 있었다.

죄악. 이보다 그를 상징하는 단어가 있을까. 바울은 천천히 로사리오를 내리며 기도하듯 말했다.

“주께서 이들의 죄악까지 품으시기를.”

“아니.”

그들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던 페르난데스가 무릎 꿇은 자세로, 바울의 눈을 올려 보며 말했다.

“적들이 우리의 죄악 속에서 익사하기를.”

나의 죄업과 회한이라면 그러기에 충분할 테니. 페르난데스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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