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나비의 꿈 (6) >
*
세월이 흐른다. 누군가에겐 속절 없는,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압도적으로 밀도 높은 세월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정된 자원이지만, 공평한 자원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널 저주한다.”
“해봐.”
-콰지지직!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는 지하 공동이다. 자욱한 혈향에 후각이 미쳐 날뛰는 종류의 공간이었다. 모든 벽에 빼곡히 아세아스 비술 언어가 적혀 있고, 바닥의 틈을 따라 핏물이 복잡한 문양을 그리는 곳이었다.
시체들 중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없다. 시체들은 제각기 얽히고, 뒤엉키고, 섞이고, 뭉쳐 있었다.
데일 페르타스의 실험 공방. 몰락한 청동 천칭단의 비밀 거점 중 하나. 페르난데스는 이 지독한 생체 실험 공방을 직접 급습했다.
치열한 전투라고, 적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결과가 정해져 있는 싸움에 과정은 어쨌건 결코 치열할 수 없다. 페르난데스는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산책 나온 듯 한가롭게 행동했다.
“내 오랜 친구. 하하, 오랜 친구. 나를 저주해라. 나를 증오해.”
“네 배신은 지옥의 모든 악마들이 속삭일게다.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하라지.”
-콰드드득!
페르난데스는 데일의 머리를 잡고 거칠게 눌렀다. 데일은 헐떡이며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된 진창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의 신음을 들으며, 페르난데스는 그의 머리맡에 발을 얹었다.
“떠들어 보라 해라.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놈들은 깨닫는 바가 있을 거야.”
“끄으윽.”
페이자쉬. 고대 멜라쿰 제국 방언으로 ‘배신자’. 그가 이 이름을 처음 정했던 그 날, 그는 인류를 배신하기로 맹세했었다. 치기 어린 서원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비틀며 발에 힘을 주었다.
-부그르륵.
“나를 증오해라. 지옥으로 꺼져. 가서, 네 주인에게 가서 똑똑히 전해라. 나를 저주하고 증오하라고.”
그리하여, 내 죄악이 더욱 크고 넓어지도록. 내 죄악의 깊이가 깊어지고 마침내 범람하도록.
너희 모두를 집어 삼킬 수 있을 때까지.
페이자쉬. 고대 멜라쿰 방언으로 ‘배신자’···. 그래. 배신이란 가장 방심한 이들을 향해 해야 비로소 효과적인 법. 그가 처음 인류를 배신하려 마음 먹었던 순간에 인류는 결코 그에게 방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몇 년간, 그가 악마들을 도륙하고 이단을 색출하고 배교자들을 불태우던 이 시간 동안. 그들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가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배신을!
-끄르르륵!
피거품 속에서 데일의 호흡이 점차 가빠지고, 이윽고 끊어졌다. 페르난데스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데일의 머리를 툭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태워라.”
그의 말에, 그의 뒤에서 도열하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화염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흑마법에 손을 담았던 이들, 또는 그런 이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그의 뒤에 모여 있었다. 서로를 증오하며 각자의 손에 죄악을 물들이던 살인마들이다.
배신자 군단. 죄악의 수도회. 렐리기오사 말레디카. 창립 3년의 일이다.
*
죄악의 수도회가 창립된 이래 삼 년. 인류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던 악의는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고, 그림자 속 악마들은 불에 타올라 사라져갔다.
이단심문청의 기나긴 추적과 격전 속에서도 살아남은 배교자들과 흑마법사들은, 페르난데스의 손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이단심문청의 수도원장실, 그 방에 걸린 거대한 지도에 점차 마커가 찍혀 나갔다. 실종된 이단심문관들, 발생한 이단 사건들. 그리고 완전히 정화된 지역에 대한 표기들이, 그 어떤 시대의 어떤 순간보다 더 격렬하게!
“이거 자네를 성자로 시성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군.”
“개소리 하지 말게, 형제.”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마르코의 차를 뺏어 마셨다. 마르코는 껄껄 웃으며 탁상을 두드렸다.
“이리 쉬운 일이었나? 이렇게 수월했단 말인가?”
“당연히 쉽지.”
아직도 지금이 현실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지만, 페르난데스는 만족스레 웃으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 날, 그가 이 미명 속으로 들어온 그 날의 이전.
‘성자’ 페르난데스로 살아가던 그 치열한 일 년간 그가 일구어낸 일들을 생각해볼 때, 이 정도 난이도는 당연히 예상한 범위 안이었다.
아무런 힘도 세력도 없던 ‘성자’ 페르난데스의 일 년이 그럴 진데···. 마법의 비의를 온 몸에 두른 채로 이단심문청의 정예병들을 한 손으로 부릴 수 있는 ‘배신자’ 페르난데스의 삼 년은. 당연히 그래야 했다.
“그래 맞아. 북부 대침공과 남부 대북진. 그 두 사건에 대해 이제 이야기를 좀 해보지.”
마르코가 페르난데스를 보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페르난데스로서는 피하고 싶은 문제들이었다. 사전에 대비하는 것만 간신히 가능할 뿐, 근본적으로 막아낼 수 없는 사건들이니까.
북부의 침공이 초읽기에 닥쳤다. 그 사건이 끝나면? 곧장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 시기가 도래한다.
카라드스카르를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가 세력을 일구기 전까지, 그는 그저 일개 무명 필부에 가까워 수색할 수도 없을 뿐더러. 세력을 일군 이후 그를 암살하는 것은 자살 임무에 불과했으니.
그러나 북부인들의 침공은 최소한의 대비가 가능하다. 어쨌건 동부 왕국 연합의 힘으로 막아낸 사건이었으니. 마르코는 페르난데스의 예언을 떠올리며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비센테 왕이 어찌 프란츠리트 혈족을 밀어내긴 했지만, 아직 북부 해상을 온전히 수복하진 못했어. 자네의 ‘예언’에 따르면, 이제 슬슬 위험한 시기가 아닌가?”
“괜찮아. 프란츠리트가 살아 있었으면 진짜 위험했겠지만, 어느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일 테니.”
“어느 정도의 피해라···.”
“북부 해안선에 맞닿은 모든 왕국이 불타오르고 레바인테르 제국의 절반이 전화에 휩싸이는 정도의 피해.”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그 정도의 피해는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농담이지?”
“무슨 상관인가? 문명 사회의 세력이 약해지면 악마 숭배자들이 발호 하는 것이 섭리겠지만···. 내가 있지 않나? 날뛰어 주면 오히려 쉽고 편해지니 좋지.”
“자네는···. 그 사이 죽어갈 사람들이 보이지 않나?”
“막을 수 없네. 형제.”
페르난데스의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그는 찻잔을 내려 놓으며 깍지를 끼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내가 십 년만 더 먼저 움직였다면, 그래. 칠흑의 에리크를 막아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 내게 이십 년이 더 주어졌다면, 동부 왕국 연합의 기반을 온전히 다질 기회를 만들었을 수도 있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하려 했다. ‘성자’ 페르난데스 시절,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페이른 왕실의 이단 사건 종결과 데인 왕국의 부패 근절, 그리고 프란츠리트 혈족의 축출이었다.
그 모든 대비는, 북부인의 대침공을 고려한 대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페르난데스는 열일곱 ‘성자’ 청년이 아니었다. 그는 마흔 줄을 넘긴 흑마법사이며, 지금 준비하기엔 모든 것이 이미 늦었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과거를 한탄하며 멈춰 서기엔 그에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의 시간은 언제나 한정된 자원이었다.
“지금 대비하는 것들은 그저 최악을 차악으로 만들어 보자는 발악에 불과하네. 그 둘 사이엔 그렇게 가시적인 차이가 없을 걸세. 그렇다면 북부에선 이제 손을 떼는 것이 옳네.”
“불신자들의 손에 죽어갈 교인들을 외면할 수는 없네.”
“우린 교리수호회도, 십자구호기사단도 아니네. 우리는 이단심문관이지. 우리의 일은 교인들을 보호할 방패가 되어주는 것이 아닐세.”
페르난데스는 지도의 이곳 저곳을 손가락 끝으로 툭, 툭 쳤다.
“여기, [피의 수탐자]들의 근거지. 이 지역, [강철군단]의 봉인지. 그리고 이 곳은 어디보자···. 이 시기라면 [진홍단]의 활동 지역이겠군. 우리의 일은 이런 걸세. 형제.”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는 마르코를 향해 말했다.
“적의 손에서 교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 사회를 좀먹고 불사르는 죄인들을 직접 잘라내는 일일세.”
그는 인류의 구원을 바라며 행동하지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오로지 그와, 그의 가정의 구원 뿐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피로에 찌든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 이 미명의 끝이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목적은 정점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다.
이것이 자기 기만에 불과한 일이라도. 지금 그의 모든 노력은 환각 속의 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아리아에게 바치는 그의 헌화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적어도, 지금 그의 모든 행동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가늠하는 실험이 될 것이다.
‘뭄토.’
오랜만에, 그는 대악마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여전히 그의 현실엔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 그 존재에게.
‘이것이 꿈이 아니길 바란다. 너도 그래야 할거야. 이게 환술에 불과했다면, 넌 내 손에 죽는다.’
그리고 네 악마 동료들도 같은 방식으로 죽게 될 것이다. 내게 이 시대의 정보를 준 대가로···.
*
아리아는 얇은 테로 감싸인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책상엔 수많은 실험 도구들과 시약들, 그리고 실험 일지가 널려 있었다.
이 부분에서 매번 막혔다. 아리아는 페르난데스가 남기고 간 교재를 읽으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허공을 섬세하게 짚어내고, 마력이 그녀의 손끝에서 조율 되기 시작했다.
-파지직
곧, 주언이 얽히며 공기 중에 뿌연 연기가 퍼졌다. 실패였다. 주문의 매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리아는 투덜거리며 실험 일지에 실패 기록을 늘렸다.
“엄지와 검지 각도가 15도 더 좁혀져야 해. 그리고 손목을 보다 오른쪽으로 기울여야 했다.”
“아··· 선생님?!”
“자, 보거라.”
-스륵.
그녀의 등 뒤에서 바싹 마른 손이 다가와 그녀의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었다. 아리아가 당황한 사이에, 손이 아리아의 수인을 새로 잡아주었다.
“이 각도를 기억하거라. 그리고 이렇게···.”
-사르륵.
마력이 그녀의 팔목어림에서 흘러 주문을 잇고,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 올랐다. 곧, 그녀의 눈 앞에 놓인 비커에서 녹색 투명한 액체가 차올랐다.
“이제 알겠느냐?”
“식사는 하시고 다니시는 거죠?”
“내 말을 듣지 않고 있었구나.”
“세상에, 마른 것 봐요.”
아리아는 빠져나가는 손을 붙잡고 고개를 돌렸다. 페르난데스가 멋쩍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수척해진 페르난데스의 턱과 뺨을 쓰다듬었다.
“교회에서 밥을 안 주나요? 너무해요.”
“잘 먹고 다닌다. 내 걱정은 이제 됐고—“
“선생님이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교회에서 고기 반찬은 나오나요?”
“내가 이 나이에 반찬 투정을 하겠느냐? 이제 내 일 말고 다른 이야기를—“
“이 옷 언제 빨았나요? 먼지 얹은 걸 보세요! 교회는 의복 세탁도 안 해주나요? 안 되겠어요. 제가 가서 단단히 한 마디를 해야겠어.”
“내 옷은 내가 직접 빨고 있단다. 자, 아리아. 내가 온 것은—“
“아, 참. 내 정신 좀 봐. 빨리 여기 앉아요. 선생님. 일단 앉아서, 어···. 우유? 우유라도 드릴까요?”
“···우유는 좋지.”
페르난데스는 아리아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간신히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아리아는 재빨리 부엌으로 가서 다과를 준비해 왔다.
“이건 어제 산 베이컨이에요. 이거랑 빵이랑···. 아, 참. 스프를 좀 내어 올까요?”
“밥 먹으러 온 것은 아니다. 아리아. 그러니 내 말을 좀—“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알람 주문을 잔뜩 깔아 두었는데!”
“내가 가르쳐준 주문인데 내가 해주하지 못할 성 싶더냐?”
“아하하.”
아리아는 해맑게 웃으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지긋이 우유와 빵을 노려보았다. 페르난데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빵을 살짝 베어 물어 씹고는, 그제야 밝아진 아리아의 얼굴을 보았다.
“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분위기가 살지 않는구나.”
페르난데스는 빵을 내려 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등 뒤로 손을 뻗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꽃을 꺼내 들었다.
“마법으로 자아낸 것이 아니라, 오는 길에 내가 직접 샀다. 아리아.”
“어머, 고마워요.”
프레지아를 엮어 만든 다발이었다. 아리아는 행복하게 웃으며 꽃을 한 아름 안아 들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년이다. 아리아.”
“네?”
“이 년이면 내 역할이 얼추 끝날게다. 그 뒤로는 내가 없어도 교회 놈들 힘으로도 충분히 사건 해결이 가능한 수준까지 상황이 진전될 거야.”
“···또 어딜 가시게요?”
“그래.”
페르난데스는 불안한 눈을 한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네 곁에.”
그는 그녀의 머리칼 사이에서 손을 빼냈다. 그의 손 안엔 어느새 아무런 장식도 없는 깔끔한 반지가 올라가 있었다. 그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아리아의 손을 잡았다.
“아···.”
“그 뒤로는 내 결코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 아리아.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
“이것도 마법으로 만드셨나요?”
“···어···. 아니?”
“그건 이상하네요. 선생님.”
아리아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마법 같은 순간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