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나비의 꿈 (7) >
*
언젠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해서, 감히 내게 허락될 수 있는 나날일지 모르겠다고. 품에 안긴 채로, 그녀가 그렇게 속삭인 적이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녀는, 그리고 나는. 페르난데스는 잠든 아리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둘 모두, 분명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느슨해지는 입가를 매만지며 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열린 덧창 아래로 달빛이 내려 앉아, 아리아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처음 그가 그녀에게 갖은 감정은 애착과 소유욕에 가까웠다. 미명 아래에서 시간 감각 사이를 헤매이는 지금. 그가 그녀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은 회한과 사죄, 그리고 회개였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을까? 그렇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다.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그가 그녀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선의 나날들로 가득 채워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그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형제님.”
쉭쉭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울렸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얼굴을 잠시 만졌다. 그리고 손을 내렸을 때, 차갑게 벼려진 눈매와 싸늘하게 비틀린 입술만 남아 있었다.
“가져와라.”
“예, 형제님···.”
-달그락.
페르난데스가 앉아 있는 책상에 작은 두루마리가 놓였다. 사내는 비쩍 마른 손으로 두루마리를 건네고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물러섰다.
“꺼져라.”
“허면, 본청에서 뵙겠습니다. 형제님.”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사내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하라마르. 악마 숭배자 집단, [엔하리의 그림자들] 출신의 고위 암살자였던 사내. 지금은 그의 주박에 걸린 채 그의 명령에 따라 한때 동료였던 이들을 암살하는 꼭두각시다.
말레디카는 그런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차가운 눈으로 하라마르가 두고 간 두루마리를 펼쳤다.
*
[특수 작전 : 거미줄 정리]
작전 지역 : 대황야, 모사트 시 시외 제 11 체크포인트.
작전 개요 : 수인 연합 대족장, 키르하스 하트테이커와의 접선. 교단 성물 확보 및 해당 지역의 고대 유적 조사.
작전 테스크포스 팀 : 말레디카 페이자쉬 와일드캐스트. 이하 [검열됨]
음성 기호 : [검열됨]
악마를, 이단을, 마녀를 불태우리라.
최종 승인 :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장 마르코 선데일.
[해당 문서 소각까지 : (15초) 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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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데스는 두루마리를 공중에 던졌다. 최종 인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시작한 작전 제안서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성공적이었다.
-화르륵.
공중에서 두루마리가 타올라, 잿가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불길한 푸른 화염의 잔상이 망막에 남아 어른거렸다.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까지, 길어도 5년.’
황제와 술탄의 70년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대황야에,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와일드카드라 한다면 전쟁의 중립을 선언한 호족 연합 뿐이다.
이 시기의 호족 연합은 긴 내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대족장의 강력한 지배력 아래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마침내 백국마족의 대북진이 시작되고, 대륙 최남단에서 동북부를 향해 타오른 그 거대한 전화를 막아설 그 인물에게 날개를 달아 주어야 했다.
더 효과적으로, 더 빠르게 사건을 끝마칠 수 있도록. 그래서 비로소 물질 세계가 종말로 치닫는 시기가 도래했을 때, 세상에 아직 이를 이기어 낼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도록.
‘네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하마.’
페르난데스는 꿈결 속에서 입맛을 다시는 아리아를 내려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싶은 대로 공부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삶을 주겠다.
전쟁도, 악마도, 이단도 없는 온전 해진 물질 세계. 세상의 구원 따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구원 받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만이 전부였다.
그러니, 네게는 꽃이 흐드러진 초원과 따듯한 바람이 부는 언덕만을 보여주겠다. 완벽한 화원과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잠자리만을 주겠다.
그 세상의 진창과 거름은 나 혼자 감내하는 것으로 족하다. 이번엔, 이번 만큼은 네게 그런 세상을 보여주지 않겠다.
‘그게 내가 네게 보일 속죄다. 아리아.’
-사륵.
페르난데스는 잠든 아리아의 뺨을 쓰다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
대황야는 언제나, 역사상 그 어떤 순간에도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이룩한 적이 없었다. 현대 문명에 가까워질수록 분쟁과 혼란의 시기가 더욱 격해져 갈 뿐.
지금에 이르러 황제와 술탄이 대황야를 배경으로 장구한 체스 게임을 벌이는 이 시기에, 단 한 구역. 양측 진영 모두에게서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중립 지대가 있었다.
“대족장!!”
거구의 낭인족 청년이 낡은 창을 들어 올리며 소리질렀다. 그는 거의 날듯이 뛰어와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또각.
그의 앞으로 날카로운 구두, 낭창한 발목과 종아리가 다가와 멈춰 섰다. 대륙을 호령하는 두 강대국들조차도 감히 자신들의 체스판 위로 끌어들이기를 꺼려하는 세력, 수인 호족 연합의 수령.
“말해라.”
날카롭고 강인한 음성이 낭인족 청년의 머리 위에서 흘렀다. 청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놈들이 왔습니다!”
-찰칵.
금속성과 함께 짙은 기름 냄새가 났다. 청년은 코를 움찔거리며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황야의 정오, 역광으로 내려 앉은 그림자 안에서 한 여인이 굵은 담배를 물고 있었다.
-펄럭.
바람이 거칠게 불어 닥치며 검은 망토를 흔들었다. 짐승의 털가죽으로 윤기가 흐르는 망토가 바람에 거칠게 흩날렸다. 그녀의 곁에 기립한 시종이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그녀의 입에 불을 붙여 주었다.
“후···.”
매운 담배 냄새가 청년의 코를 찔렀다. 여인의 입에서 흩어진 연기 사이로, 청록색 눈동자가 안광을 발하며 번뜩였다. 그 위압감에, 청년은 곧장 고개를 바닥에 늘어트렸다.
“어디쯤 왔지?”
“이제 거주지 입구를 지나고 있을 겁니다!”
“곧장 내게 데려와라. 손님 접대를 준비하고.”
“주안상을 차릴까요, 다과를 준비할까요?”
“글쎄다.”
-후.
담배 연기가 다시 한 번 흩어졌다. 여인은 차갑게 웃고는 몸을 돌렸다. 시종과 호위무관들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이 거대한 군영 전체가 그녀의 손아귀 아래에서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수인종의 모든 종족들이 단 한 명의 지도자 아래에 복종한다면, 그 지도자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문명 사회의 국가들은 수인 호족 연합을 일컬어 신정일치 사회라 불렀다.
인류 문명엔 수많은 문명국들이 있으며, 각국엔 각자의 수장이 있다. 북부 야만인들 또한 그렇고, 저 정글의 토인들 또한 그러하며, 심지어 엘프들 또한 고왕국의 세 왕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모든 일원들이 단 한 명의 손에 복종하는 종족이 있다. 호족 연합의 수많은 부족장들이 추대한 단 한 사람의 대족장. 불패자, 전쟁의 화신, 서부 대황야의 방패···.
칼라니 씨족의 키르하스.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자신에게 대립했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부족간의 오랜 내전을 종결시킨 대영웅. 악마 숭배자들의 노예 신분으로 보낸 어린 시절과, 그 악마 숭배자들을 모조리 도륙내고 탈출해 자라난 청년기를 거쳐 지금, 그녀는 인생의 정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뭐, 일단 술자리를 먼저 준비하도록.”
“예!”
키르하스는 천천히 자신의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
수인 호족 연합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무엇일까. 페르난데스는 일곱 번째 검문을 받으며 생각했다. ‘성자’ 페르난데스였던 시절에 만났던 호족 연합은 정말 쭉정이에 불과했구나.
“다른 녀석들은 속일 수 있을 지 몰라도, 난 아니지. 늙은이.”
근육이 알알이 박힌 거구의 수인 청년이 페르난데스의 소매에서 단검을 꺼내며 이죽거렸다. 그는 거칠게 페르난데스의 몸을 툭툭 털며 무장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말야. 젊은이?”
“늙은 살갗의 쉰내가 나는 것 같군. 다음!”
조금 상처받았다. 페르난데스는 이 예의 없는 수인을 한 번 흘기고는 픽 웃었다. 새파란 젊은 것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나. 그는 고개를 절래 흔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호족 연합의 거주지를 지나 중심지로 향할수록 검문과 감시가 철저해졌다. 이제부터는 부족들의 족장, 예언자, 그리고 원로들의 막사가 있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나 와서 대족장을 만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이상한 거겠지.’
따지고 보면 대족장은 종족 전체의 지도자다. 현인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니, 그런 존재를 아무나 알현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가 기억하는 수인 연합의 형태와 전혀 달라진 이 부락들을 살피며 미소 지었다. 그래, 이 정도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겠지.
‘이 정도 군기는 유지하니 카라드스카르를 막아낸 거겠지.’
저마다 흉흉한 병장기로 무장한 거구의 병사들이 골목마다 서서 페르난데스와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곁에서, 하라마르가 작게 속삭였다.
“형제님, 참으셔야 합니다.”
“···넌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냐?”
“···.”
하라마르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는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아니, 난 죽여야 할 놈들만 죽이는 편인데.”
“제가 본 형제님은 수도원 밖에선 항상 누굴 죽이고 있었습니다만.”
“그거야 세상에 죽일 놈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고.”
대족장의 막사가 눈 앞에 있었다. 도열한 정예병들 사이로 긴 융단이 깔려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융단을 밟고 천천히 나아갈 때 마다, 병사들이 위협적으로 창을 바닥이 찍어댔다.
유치한 수작이다. 페르난데스가 이를 비웃고 있자니, 하라마르가 곁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족장이 거부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죽이면 안 되지.”
-촤악!
“입장하라. 예를 갖춰라!!”
막사의 입구에서 창을 교차로 잡고 있던 거구의 수인이 고함 쳤다. 곧, 막사의 휘장이 걷혔다. 보라색 비단으로 치장되고, 번들거리는 수많은 전리품들이 장식된 거대한 내부가 드러났다.
“호···.”
자주색 융단이 깔린 길, 그 끝에 짐승의 가죽과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옥좌가 있었다. 시종들의 부채질을 받으며, 그녀가 의자에 길게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하얗고 긴 종아리를 지나 탄력적인 몸이 부각되는 옷, 그리고 어깨부터 아래로 길게 늘어트린 윤기 흐르는 검은 망토까지.
“대족장, 만나 뵈어 영광이오.”
“그래. 영광으로 알아야지.”
오만한 청록색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후—, 담배 연기가 그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렀다.
‘불패자,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가신’ 키르하스와는 전혀 다른 인물인 것 같은, 그러나 같은 얼굴의. 정점에 도달한 무력은 마력을 담는 법이고, 마력으로 단련한 몸은 세월의 흐름과 노화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그가 기억하는 키르하스의 모습은 거의 30년 전이었지만,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가 겪은 30년은 전혀 다른 시간이었을 터. 그녀는 그 긴 시간 속에서도 더 노련해지고, 더 사나워지고, 더 강인해졌지만. 여전히 그가 알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달그락.
그녀가 손을 뻗어 시종의 부채를 치웠다. 시종은 곧, 그녀의 눈 앞에 도자기로 만들어진 재털이를 가져왔다. 키르하스는 굵은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 끄고는 페르난데스를 내려봤다.
“오만한 제안을 하더군. 동부의 사제들.”
“우리의 것을 돌려 받고 싶을 뿐.”
“너희의 것? 글쎄, 언제부터 그게 너희의 것이었지?”
“우리 신의 신물이니. 수인족과는 상관 없는 일이 아니겠소?”
“내가 알기로 너희의 신은 베이타서스였을텐데. 나는 이걸 사냥의 신의 심장에서 뽑았어. 어째서 이게 너희의 것이란 거지?”
키르하스가 그리 말하며 손짓하자 시종이 붉은 천으로 둘둘 감긴 대검을 가져와 부복했다. 키르하스는 대검의 칼자루를 쥐고 천천히 뽑아 들며 페르난데스를 향해 칼끝을 겨눴다.
“증명해라.”
베이타서스의 성물, 열쇠검. 훗날 네 명의 대천사를 소환하는 제물로 사용되는 신화적 유물. 페르난데스는 촛불에 일렁이는 은백색 칼날을 바라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