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나비의 꿈 (8) >
*
키르하스의 얇은 손목과 호리호리한 체구에 비해 대검은 너무 거대했다. 그녀의 눈은 마치 맹수처럼 타올랐고, 그 탓에 그녀가 쥔 칼은 짐승의 송곳니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 거대한 칼을 한 손에 쥐고도, 쭉 뻗은 칼끝에 작은 미동조차 없이 페르난데스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네 목을 걸어라.”
“내가 가진 것 중에선 가장 가치 없는 것 중 하난데.”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칼날을 살짝 밀었다. 키르하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농 같나?”
“대황야의 여제께 농담을 하겠소? 주위를 물러 주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다른 이들이 들어서 좋을 일 없을 테니.”
페르난데스의 말에 그녀의 곁에 도열한 시종과 원로들이 이를 들어내며 으르렁거렸다.
“저 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동부의 사제들은 언사가 교묘해 대족장을 현혹하려 들 겁니다.”
“그 따위 하찮은 수에 당할 성 싶더냐?”
“하오나···. 저들은 베이타서스의 사냥개들입니다. 저들의 신이 저들에게 내린 가호가 가볍지 않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들, 자리를 비켜라.”
“네, 대족장.”
키르하스의 말에 원로들이 눈을 흘기며 빠져나갔다. 페르난데스는 저들의 사나운 시선을 받으며 감탄했다. 이 시기의 키르하스가 받고 있는 존경과 존중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자존심 높은 원로들이 키르하스의 말 한 마디에 반발을 억누르고 뒤로 물러섰다라···.’
그녀가 가진 지배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원로들을 장악했다는 것은, 넓게 보면 각 부족의 핵심 인력들을 장악했다는 뜻이며. 이는 곧 호족 연합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거대한 막사에 단 둘만 남아 대치하는 상황에서, 페르난데스는 당장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그를 노려보는 키르하스를 향해 천천히 술잔을 건넸다.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느냐?”
“친구, 또는 동맹으로 지내자는 제안 아니겠소?”
키르하스는 술잔을 받아 들고는 대검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녀는 칼자루에 한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겠다. 이제 해보도록.”
“칼라니 씨족의 은거지. [카자크 카단의 몰락].”
“···하.”
페르난데스의 말에 키르하스가 움찔거렸다. 페르난데스는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 분노한 맹수를 다루는 것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당신도 보았을 텐데. 그 천칭 너머의 지하를···. 카단의 시체가 있는 그 전당을.”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내가 직접 봤으니.”
“거짓말 하지 마라. 칼라니 씨족이 멸망한 이후, 그곳에 발을 들인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카단이 뭄토의 손에 신성을 빼앗기고 필멸자로 전락한 이후, 그는 베이타서스에게 힘을 간구했소. 힘과 복수를. 그러니, 우리는 넓은 범주에서 형제가 아니겠소?”
페르난데스는 술잔을 들어 키르하스에게 내밀었다.
“카단의 목소리가 들릴 텐데. 당신.”
“넌 누구냐?”
“누구이길 바라시오?”
키르하스의 눈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카단이 그대에게 한 것과, 베이타서스가 우리에게 한 것은 그 결이 같지. 가호를 내리고, 복수와 정의를 종용하오. 우리는 꼭두각시들이지.”
“나와 카단은 동등한 관계야.”
“나와 베이타서스 또한 같은 관계요. 그러니, 우리 또한 그런 관계가 될 수 있겠지.”
“내가 얻는 것이 뭐지?”
“복수.”
키르하스는 그 말에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말을 돌리지 말아라. 죽고 싶지 않다면. 나는 이미 과거의 은원을 모두 해결했다.”
“카단의 힘을 빼앗은 뭄토에게, 카단의 복수를. 그리고 칼라니 씨족을 몰락시킨 악마와 악마 숭배자들에게, 그대의 복수를. 어떻소?”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하지만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야. 나는 일개 무부가 아니다. 나에겐 이끌어야 할 이들이 있어.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느냐?”
“실리라, 좋지.”
페르난데스는 막사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대황야의 전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무지는···. 말 그대로 황무지요. 훌륭한 고대 유물들이나 몇몇 반짝거리는 장신구들이야 사토 속에 묻혀 있겠지만··· 그것이 70년간 전쟁을 벌일 일은 아니지. 그대는 황제와 술탄이 어째서 세대를 거듭하며 이 지역에 혈안을 하고 있다고 보시오?”
“인간의 탐욕 때문이겠지.”
“반만 맞았군. 악마 때문이오.”
페르난데스는 대황야의 한 가운데, 아무것도 없는 거대한 평원을 손가락을 짚었다.
“이 지하에 파묻힌 대악마 때문이지. 놈은 하수인들을 부려 전쟁을 종용하고 있소. 각국의 핵심 인력을 도발하고, 타락시키고, 유혹하고 있지. 인간 배교자들은 처단할 수 있지만···. 근본을 뿌리 뽑지 않는다면, 두 강대국은 서로가 멸망할 때 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이오.”
“그래서 대악마를 잡자? 이상론이군. 우리 입장에선 그 두 인간 국가가 싸우는 편이 낫다.”
“근시안적이오. 저들의 전쟁은 결과적으로 황무지를 불태울 테니까.”
“더 태울 것들이 남았나?”
“없다면, 다른 뗄감을 찾아 불길이 번지지 않겠소?”
“감히? 감히 나의 영토를 건드리겠다고?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진 않을 텐데.”
키르하스가 짧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투에서 고고한 자존감이 묻어 나왔다. 페르난데스는 몸을 돌려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전력에 비하자면, 호족 연합이 더 거대하다 자부할 수 있소? 술탄의 불멸대대가 본격적으로 이 지역을 진공한다면, 이를 견딜 자신이 있나? 냉정해지시오. 수인 호족 연합은 그 자체로 강대한 것이 아니라, 두 강대국이 굳이 건드려 전선을 늘리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니.”
“너 재밌는 녀석이군.”
키르하스는 천천히 왕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나한테 감히 그런 말을 하는 놈들이 없었지. 나라고 몰랐겠나? 아니면, 내 수하들은 모조리 머저리들 뿐이라 몰랐겠나. 우리가 세력을 여기까지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세력들이 우리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키르하스는 팔걸이에 턱을 괴고,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마실까? 아니, 아직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전황 파악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 담대함이 흥미롭기는 해도, 용기 있는 녀석일 뿐이라면 내게 썩 매력적이진 않아. 대악마를 죽이고 전쟁을 끝내는 것, 내가 그걸 도와야 할 이유가 뭐지?”
“이미 이 전쟁으로 두 국가의 국고가 거덜나고 있으니까. 전쟁이 종결된다 하더라도 호족 연합에게 곧장 칼부리를 겨누지 않을 테니.”
“이상적인 추측이로군. 다음은?”
“오랜 전쟁으로 대황야에 있는 문명 도시들은 이미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 되었소. 기실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니, 전쟁이 끝난 이후라면 대부분 철수하겠지. 그렇다면 대황야는 진공 상태가 될 것이오. 몇몇 작업만 더해진다면 더 완벽한 공백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소.”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에게 다가갔다. 키르하스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그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그대를 도와주지. 우선 그대가 나를 돕는다면···. 이 황무지 전체를, 그대에게 주겠소.”
“재미있구나. 알 수 없는 정보를 알고, 이를 파악하는 눈이 날카로워. 저 칼의 기원을 대체 어떻게 파악할 걸까. 네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신성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말이지. 아주 마음에 들어.”
키르하스는 후, 하고 웃으며 잔을 들었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쳤다. 챙,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둘은 동시에 독주를 들이켰다.
술은 수인 호족들의 전통상 친교의 의미를 갖는다. 키르하스는 잔을 바닥에 던지고, 바닥에 꽂힌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는 칼을 거꾸로 쥐고, 칼자루를 그에게 건넸다.
“빌려주마.”
“돌려 드려야 하오?”
“하하!”
감히 그녀의 물건을 달라는 제안이 아니었다면, 그런 오만한 요청이 아니었다면. 키르하스는 결코 그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페르난데스가 보낸 서한을 받고 난 후, 줄곧 그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며칠 전, 베이타서스 교회가 그녀에게 오만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성물을 반환하라.’라는 서한을 보낸 후. 그녀는 분노를 터트리는 수하들을 다독이며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명 사회는 언제나 수인 호족 연합을 괄시해왔다. 그녀의 세력이 거대하고, 공고해진 이후엔 괄시가 무시로 바뀌었었다.
그런 문명 사회의 만신전 교회에서 그녀에게 밀서를 보내고, 그들의 사절을 파견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제 거래 상대로 취급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키르하스의 야망은 단순히 호족 연합을 통일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타오르는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호걸의 야망은, 대황야를 온전히 손에 넣고도 문명 사회에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상호 호혜적인 거래였다. 선신 만신전의 교회가 대황야의 통일을 돕겠다는 의미는. 키르하스는 그걸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북부의 침공은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둘 모두, 최소한 차악을 선택할 수는 있었다.
대악마가 물질 세계에 풀려나고, 인류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이제 남은 시간은 30년. 그 사이에 인류 문명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는 두 사건을 충분히 대비한다면···.
‘멸망을 피할 수 있다.’
그의 목표는 항구적인 평화의 이룩이 아니다. 완벽한 이상 세계의 건설 또한 그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보다 소박한, 그리고 충분히 현실적인 꿈만을 꾼다. 자신의 삶,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삶, 자신이 속죄해야 하는 삶과 같은.
평화로운 세계의 울타리가 한 마지기 논밭에 불과하고, 그 외의 세계 전부가 불타올라 사그라든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자신의 가정이 안온할 수만 있다면···. 그 외의 모든 것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나 또한.’
*
수인들이 마련해준 막사는 놀라울 만큼 아늑했다. 페르난데스는 낙타 가죽으로 만든 침상에 걸터 앉아 열쇠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르하스와의 대면에선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열쇠검을 건네 받고, 이를 쥐기까지 했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했다.
‘신성이 없어?’
열쇠검은 베이타서스가 물질 세계에 내린 가장 강력한 유물 중 하나였다. 신이 직접 벼린 상징물이자, 훗날 대천사를 물질 세계에 강림 시키는 핵심 제물이었다.
지옥 마력이 흐르는 흑마법사가 그런 유물을 붙잡았는데, 아무런 반발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생각해보면 만신전의 응답도 없었다.’
이 시기의 만신전은 봉문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필멸자의 삶에 개입하지는 못하지만, 신탁이나 이적과 같은 일들을 물질 세계의 하수인들에게 전달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이 몇 년간 만신전의 응답을 받은 적이 없었다. 지금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만신전의 신들이 가장 기꺼워 해야 마땅했으나, 이들은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분명 그 날 초월자의 개입이 있었어.’
그가 미명 아래에 깨어나고, 처음 교회에 찾아갔을 때. 그는 초월자의 존재를 느꼈다. 석상의 문구를 조작하거나, 그의 머릿속에 음성을 흘려 넣는 등. 그 때 분명 그에게 개입한 것은 신격을 가진 초월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 아무런 개입도 없다고? 거기에 열쇠검에서 신성마저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런 것 치고는···. 키르하스에겐 분명 ‘뭔가’가 있었다.’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카단의 기름부음 받은 지상대리인. 그녀에게서 필멸자의 것을 초월한 일종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영성의 격이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 특유의 압박감이 있었다. 그녀를 직접 찾아온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키르하스에게 남아 있는 카단의 영성. 물질 세계에 남아있는, 만신전에 소속되지 못한 소신격들의 영성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신의 영성이라는 것은 환각으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그것이 있다면, 이 세계가 환술에 불과하며, 자신은 지금 꿈결 속에서 자기만족적인 몽상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가설을 폐기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몇 년간 그를 끈질기게 쫓아오던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금 이것이 꿈이라면? 뭄토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했다. 그러나 영혼마저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환각은 현실과 다르지 않다.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깨물며 심장을 옥죄는 그 끈적한 감각에 저항했다.
‘카단의 영성을 두 눈으로 확인했어. 놈은 이 세계에 있다. 이게 그저 나의 환각일 뿐일 리가 없어. 제기랄. 왜 대답하지 않지, 베이타서스? 네가 원하는 것이 이런 것 아니었나?’
이 세계의 평화에 이토록 헌신하고 있는데, 왜 아무런 대답이 없지? 페르난데스는 신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열쇠검을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