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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31화 (132/388)

< 131. 나비의 꿈 (9) >

*

네크로폴리스의 봉인을 강화하는 작업은 순조로웠다. 페르난데스는 마지막 봉인에 칼을 박아 넣으며 주언을 외웠다. 다섯 콘클라베가 봉인된 무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가 한 일은 콘클라베와 뭄토의 봉인지를 강화하는 것 정도로도 족했다.

“아쉽게 됐군. 사제. 대악마를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하니, 너희에겐 슬픈 일이 아닌가?”

“놈을 죽이기 위해선 이 봉인을 뜯어내야 하오.”

페르난데스는 웃음짓는 해골들이 춤을 추고 불을 마시는 석화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로, 상아시트의 상형문자들이 일렁거렸다. [우리는 너희의 미래다.]

-콰드드득.

축성 받은 장검이 바위의 틈사이에 박혀 들어갔다. 페르난데스는 장검 위에 사슬을 감고, 게일어 축사가 적힌 아마포를 감았다. 교황의 혈액으로 성경 구절을 적어 넣은 아마포였다.

그 위에 주문을 외워 봉인에 얽힌 마력을 조율하며,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았다. 저 그늘, 밤과 죽음의 장막 너머에, 뭄토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열쇠검의 신성력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밤을 지새며 고민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신의 가호, 또는 신성의 개입이 없을 때, 뭄토를 봉인에서 풀어놓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 시대의 뭄토는 전성기의 힘을 잃지 않은 채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데인 왕국의 실패와 세 파라오의 배신과 같은 사건이, 이번 세계에선 일어나지 않았다.

온전한 힘을 가진 대악마를 물질 세계에 풀어 놓을 때, 이를 막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까? 그 직후 북부인이 침공하고, 그 다음 백국마족이 북진한다면. 그 피해를 문명 사회가 감당할 수 있을까?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로사리오의 열쇠검 상징에 입술을 맞추고 마지막 주문을 외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키르하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대 아시트의 영웅들 전원을 집어 삼키고, 신들을 잡아 죽인 대마법사를 봉인에서 풀어주어야 한단 뜻이지. 놈이 이대로 잠들 수만 있다면, 우린 그대로 좋소.”

“···뭐 좋아. 왜 갑자기 계획을 바꾼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중 최고들을 가려 뽑아 이 봉인을 지키도록 할 것이오.”

“우리 또한 도와주지. 최고는 아니고, 차선 정도로.”

키르하스는 킥, 하고 웃으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그의 등 뒤에 걸린 대검으로 향했다.

“칼을 차는 법이 제법 제대로인데?”

“돌려 받고싶으시오?”

“물론. 하지만 너희가 우릴 도왔으니, 나도 너희에게 기회를 주지.”

키르하스는 천천히 칼자루를 쥐고 뽑아 올렸다. 살을 에이는 소리와 함께 잘 닦인 장검이 그녀의 손에 잡혀 나왔다. 그녀는 칼을 한 바퀴 빙글 돌리고는 자세를 잡았다.

“덤벼.”

“나는 마법사이오만?”

“내가 장님으로 보이나? 네 손의 굳은살, 네 걷는 자세, 네가 상대를 볼 때 손과 어깨로 먼저 향하는 시선. 이봐, 사제. 너는 전사야.”

그것도 제법 실력 좋은. 키르하스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너를 신뢰했다. 사제. 알진 모르지만, 날 죽이려고 들었던 것들은 모두 마법사들이었고, 날 살리려고 목숨 바쳤던 멍청이들은 모두 다 전사들이었거든. 나의 연합엔 그래서, 마법사가 없지.”

“그리 원한다면···.”

키르하스는 사납게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등 뒤에 메인 대검을 뽑아 들었다. 베이타서스의 열쇠검. 신성이 느껴지진 않지만, 여전히 그 내구도와 예리함으로는 물질 세계에서 짝을 찾을 수 없는 유물이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대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늙고 쇄락한 근육이 대검을 잡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열쇠검은 대단히 상징성 높은 유물이다. 한번 고생하는 것 정도로 수복할 수만 있다면 교황청에 한 소리 낼 수 있을 것이다.

‘은퇴하고 평화롭게 살겠소.’

그 정도의 요청 정도는 들어주지 않을까? 사제가 은퇴하는 경우는 오로지 파문 뿐이며, 파문 당한 사제는 교단의 영원한 감시와 제재를 받지만, 그런 결과 말고도 행복한 노후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이라곤 이제 그것 뿐이었다. 이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뿐. 그의 피로한 눈에서 의지가 타올랐다.

키르하스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사제. 너는 전사로군. 더 마음에 든다.”

“봐주시오.”

“너는 봐줄 생각 없어 보이는데, 웃겨 정말.”

키르하스는 킬킬 거리며 칼끝을 까딱였다.

“첫 수를 양보하지. 와라.”

*

페르난데스의 대검이 허공을 찢었다. 과거, 그러니까. 미명 속에서 데인 왕과 나누었던 검격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검술은 아니었다. 디모니카의 근육도, 성자의 혈액도 담고 있지 않은 늙은 흑마법사의 몸이었으므로.

그러나 그 날의 경험과 기량은 여전히 살아 숨쉬어, 그의 손목 어림에 남아 있었다. 본능과 같은 영역에서, 그는 칼자루를 교차로 잡고 뒤틀었다.

-챙!

첫 공세는 거품처럼 꺼졌다. 키르하스는 가볍게 칼날을 뻗어 페르난데스의 대검을 쳐 올렸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교차로 쥔 손목을 풀어내며 그 반탄력으로 칼날을 한 바퀴 크게 돌렸다.

-후웅!

대검은 힘의 무구가 아니다. 힘이 더 강하면 다루기 편하기야 하겠으나, 기본적으로 대검은 회전력으로 타격하는 검! 격검이 이어질수록 공세는 더 수월했다.

“하하! 역시! 훌륭하군!”

키르하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녀는 칼날을 비틀어 페르난데스의 검격을 흔들었다. 마치 실타래로 장난치는 고양이처럼, 가볍게. 그러나 그 일격 하나 하나가 페르난데스의 전신에 거대한 충격을 일으켰다.

“큭!!”

“하하, 더 힘 내봐. 좋구나.”

-챙!

키르하스는 이제 완전히 잇몸을 드러내고 웃음을 터트리며 칼을 휘둘렀다. 페르난데스는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칼을 고쳐잡고 연신 휘둘렀다. 그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생사를 넘나들던 격전의 경험 덕이었다.

키르하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페르난데스가 막 공세를 흘리고 칼을 내려 그으려 할 때였다. 그 찰나의 순간, 검격의 획이 세로로 이어지며 하늘을 향하고, 그 정점에서 페르난데스의 양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차.’

페르난데스는 칼을 치켜든 자세로 그대로 내려 그으며 혀를 찼다. 잠시간의 대련으로 한 순간이나마 그가 ‘성자’ 페르난데스가 된 양 착각했다. 이 일격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다인 왕의 검술을 어설프게 따라한, 본능에 남아 있던 그의 검로였다. 공간을 갈아내는 검. 디모니카의 몸으로도, 만전의 상황과 최선의 자세로도 쉽게 성공하지 못했던 검격.

지금 이 늙고 노쇠한 흑마법사의 몸으로 시전했을 때, 성공은 둘째 치고도 몸에 가해지는 부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멈출 수도 없다!’

이미 내지른 검이다. 페르난데스는 급격히 뜨거워지는 손목을 느끼며 검을 내려 그었다. 손목의 인대가 붓고, 관절이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카칭!

“하, 너?”

키르하스의 검이 페르난데스의 대검을 치고, 그 검격을 중간에 끊어냈다. 키르하스는 재빨리 칼을 되돌려 그 힘을 흘려서, 페르난데스의 손목이 부서지는 것을 막았다.

“흡···.”

페르난데스는 그 충격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키르하스가 그의 칼을 쳐 밖으로 날려버리고는 그대로 그의 몸을 받아 내었다. 그녀의 숨결이 페르나데스의 어깻죽지에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귓가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네 몸이 네 기술을 따라오지 못하는군. 이거 점점 더 재밌어 지는데.”

“시험이었소?”

“일종의. 네게선 전사의 눈도 보이고, 마법사의 눈도 보였거든. 마법사의 냄새가 나는 이상한 녀석이었지.”

“나는 통과했소?”

“지금은. 그 칼을 가져가라. 잘 들고 조금 튼튼한 정도일 뿐. 내겐 큰 가치가 없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를 밀었다. 페르난데스는 의복을 정리하고, 열 발자국 너머 바위틈에 틀어박힌 대검을 쥐었다.

칼을 뽑아내고 등에 납도하는 모습을 보던 키르하스가 꼬리를 탁, 치며 말했다.

“그건 자격의 시험이었을 뿐. 거래는 별개의 문제야. 알지?”

“알고 있소. 교황청엔 내가 직접 전달하지.”

그녀가 페르난데스를 돕는 이유는, 교황청의 공식적인 인가 탓이었다. 수인 호족 연합을 문명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공식적인 인가. 그리고 적어도 추기경에 해당하는 인사들을 파견해 연합의 고위 인사들을 직접 세례하는 것이 그들이 맺은 거래였다.

이로서 수인 호족 연합은 대황야의 일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선신 만신전의 전통상, 이후 수인 호족들은 문명국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독립과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 사건은 단순히 떠돌이 용병이나, 쓰기 쉬운 팻감, 또는 불법 노예로 취급 받던 수인들에겐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전통을 주장하는 원로들의 반발이 거세겠지만, 키르하스의 내부 장악력은 역대 대족장들 중 독보적이었다.

페르난데스에게는 바라마지않는 일이었다. 키르하스의 세력이 공고해지고, 이를 통해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걸로 되었다.’

페르난데스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키르하스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문명 사회의 멸망은 얼추 막아냈어.’

지난 삼 년간, 대륙의 동부와 중부 지방을 아우르는 대규모 정보망을 구축했다. 제국의 아이언사이드, 술탄의 샥시시, 페이른의 헌팅스쿨을 포함해 정보 조직들 사이에 가교를 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수많은 지역들을 직접 정화했다. 때로는 마법으로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공권력으로. 이단 사교들과 배교자, 흑마법사, 악마 추종자들을 무수히 도륙내고 장대에 내걸었다.

그 피가 강을 이루고, 그의 손과 발을 적셔, 넘쳐 흘렀다. 그러나 그걸로 충분했다. 삼 년 전에 꾼 꿈에, 이 세계가 불타고 수많은 영웅들이 그의 목을 노리던 시절보다는 지금이 나았다.

적어도 아리아. 그녀만큼은 안전하고 평화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그가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 뿐이었다.

북부인들? 그들의 침략으로 동부 왕국 연합의 동북부 해안선과 레바인테인 제국 전역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라지.’

백국마족의 대(大)게르? 그들의 북진으로 키르자트 술탄국과 남부 변경왕국들, 그리고 정글 민족들과 수많은 중소규모 왕국과 영지들이 모조리 불타오를 것이다.

‘그러라지.’

하지만,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페르난데스는 그 두 사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행동했다. 그가 대비한 것은 인류 최후의 대전쟁. 그것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이젠 충분했다. 인류 멸망의 서막은 대악마의 강림이었고. 그는 이번 생을 모두 바쳐서 대악마를 강림시킬 수 있는 인물들을 모두 도륙내었다.

아직 덜 여문 어린 흑마법사들과 악마 숭배자들. 이대로 이십 년에서 삼십 년만 더 주어진다면 훗날 ‘세계를 멸망시킨 열다섯 악적’이라 불리게 될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렐리기오사 말레디카의 창설 이후 삼 년은,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재앙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집요하게 악마 숭배자들을 처단했다.

‘이걸로 이젠 됐어.’

북부와 남부가 전화로 불타고 인류 문명이 수십 년은 퇴보하게 되더라도. 이젠 아무 상관 없어.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생각했다. 그는 그 전란으로부터 안전한 곳을 적어도 다섯 군데 이상 댈 자신도 있었다.

열쇠검을 교황청에 바치고 교황과 거래를 한다. 안전하고 완전한 은퇴를. 그리고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그간 모은 재산을 풍족하게 사용하며 아리아와 함께 여생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내가 돌아간다. 아리아.’

인생이 너무 쉽구나.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손목부터 어깨까지 이어진 굵은 마력 회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같은 힘을 가지고도, 그토록 힘겹게 악마를 추종했던 지난날이 우습게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너무 쉬워···.’

페르난데스는 흐린 눈으로 지하 묘지를 벗어났다. 황무지의 밤하늘이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밤하늘에 마력이 흐른다. 달빛과 별무리 사이에서. 천공의 흐름이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하고, 가까웠다.

별들이 수를 놓듯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오래 걸린것도, 아주 금방 끝난 것도 같았다. 달콤한 꿈결 같기도, 씁쓸한 미명 같기도 했다.

“저 별은 탐내지 마라.”

“뭐라고 했소?”

“저기부터 저기, 보이나? 저 청록색 별 말이야. 저건 내 별이야.”

어느새 그의 곁에 와서 친근하게 어깨에 손을 두른 키르하스가 밤하늘에 손가락질을 하며 흥에 겨워 말했다.

“저것, 그리고 저것. 저렇게 이으면 나오는 별자리. 저걸 키르하스 자리라 부를 것이다.”

-두근.

그녀의 말이 귓가에서 이어졌다. 그때 심장이 거칠게 맥동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 별자리 바로 곁에, 널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구나.

눈 앞에 가을 태양 아래 밀밭이 펼쳐지는 것처럼, 화려하게 빛나던 황금색 머리칼과—

-아아, 페르난데스. 우리는 표류자들이구나.

그를 바라보던 아름다운 파란 눈. 그를 향해 빛날 때면 언제나 미소를 담고 둥글게 휘어지던 섬세한 눈썹과 눈매.

“이봐, 내 말 듣고 있나?”

-두근.

잊었다. 잊고 있었다. 그 순간과, 그런 말을 했던 여인을.

“이봐!”

“기억이 나질 않소.”

“뭐?”

“그대도, 아리아도, 제피스나 파비아노도, 바울도. 흑마법사들과 이단 단체들도 모두 기억이 나오. 하지만 어째서?”

왜 기억이 나지 않지? 그녀의 이름이. 인류의 시대를 사랑하던 인간들의 수호룡이. 그녀의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두통으로, 날카로운 정이 그의 정수리를 내려 찍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헐떡이며 비틀거렸다.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이럴 수가!”

기억이 희미하거나, 자연스럽게 휘발된 것이 아니었다. 아침 해를 바라보며 지난밤의 꿈을 잊는 것처럼. 그저 감각과 기분만 남아 혀끝에 맴도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도, 얼굴도. 그녀에 대한 것이 모두 기억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소.”

특정 기억을 삭제하는 마법? 간단한 술법이지만 페르난데스에게 그런 저주를 거는 것을 불가능했다. 그는 그런 어수룩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정신과 영혼에 대한 방비는 거의 완벽에 다다라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칼로 도려낸 것처럼, 깔끔하게 없어져 있었다. 키르하스의 농담이 아니었다면 머릿속에 부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성자’로 살았던 지난 날들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한 여름밤의 꿈이었을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예지였을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그의 불안감과 고통은 모두 자기혐오적 환각에 불과하다는 뜻이었으나.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그의 미명이라면? 그의 눈 앞에 놓인 안온한 삶과 행복한 여생이, 단순한 그의 환몽에 불과했다면?

페르난데스는 허리를 숙여, 떨리는 손으로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모래알이 손가락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여실했다. 이것이 환상일 수가 있나? 이토록 정교한 환각이 있을 수가···.

“왜 하필 그녀지?”

그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이유가 뭐지? 페르난데스는 눈가를 떨며 생각에 잠겼다. 이유가 뭐지? 그에겐 수많은 기억과 경험이 있었다. 개중 중요한 것들, 그의 목숨과 계획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법한 것들이 숱하게 많았다.

그런데, 왜 하필 그녀의 기억이 사라진 거지?

“확인해야 하오.”

“어, 어··· 그래. 도와줄까?”

“아니.”

혼자 해야 하오. 페르난데스는 황야의 저 너머, 지평선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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