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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32화 (133/388)

< 132. 너는 안온함을 바라지 말라, 네가 아니라 (1) >

*

교단에 보내야 하는 정기 보고마저 생략한 채, 페르난데스가 데인 왕국의 변경을 향해 말을 몬 것이 이제 보름 째였다.

“쿨럭, 큭!”

거의 대부분의 날에 잠을 아껴가며,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식사를 건량으로 대체하며 내달린 보름.

마흔을 넘어 쇠락해가는 육신과 흐려지는 정신을 마력으로 채찍질하며 쉼 없이 뛰었다.

교단은 추적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의 수하들에게 ‘긴급한 상황이라 이단을 추격하고 있다.’라는 전언을 이미 보내 놨었다. 다행히도, 지난 삼 년간의 활약 탓인지 교단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가 악마의 간자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일들을 저지른 후였으니. 악마의 세력들은 지난 그 어떤 순간들보다 크게 축소되어 있었다.

그 덕에, 평화로운 시기였다. 기실 폭풍 전의 평화일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말을 내몰며 주위 풍광을 보았다.

과부거미 해안은 겨울철 햇볕으로 아름다운 물비늘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 해안선 전체가 몇 년 안에 모조리 불타오를 것이다. 교단 입장에선 나름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게 충분하진 않을 것이다.

카라드스카르의 위명 탓에 다소 가려진 것 같지만, 칠흑의 에리크가 이끄는 북부인들은 북방 해안선 인근의 모든 왕국을 불태우고 황폐화시켰다.

카라드스카르에겐 키르하스라는 적수가 있었지만, 에리크에겐 그런 것 따윈 없었다.

칠흑의 에리크, 그가 침공을 멈춘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비센테 2세의 용기와 전략, 그리고 동부 왕국 연합의 기사들의 분전 탓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남부 토벌 도중 걸렸던 열병 탓이었다.

그 강대한 전사가 열병에 걸려 앓다가 닷새가 지나기도 전에 고꾸라지자, 그의 카리스마 아래에 묶여 있던 수많은 북부 부족들은 사분오열되어 귀향했다. 이것이 북부 대침공 사건의 전말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저 멀리, 해무 사이로 드러나는 인퍼머르 시의 등대를 보며 말머리를 향했다. 이 도시도 전화에 짓밟히고 불타오를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확인해야 했다.

그의 심장을 좀먹는 불안감을. 심박 소리가 그 어느 순간보다 격렬하게 들렸다.

*

인퍼머르, 항해자들의 도시. 이 거대한 항구도시는, 그 주인이 끊임 없이 바뀌던 지난 몇 세기 동안에도 여전히 항해자들의 도시였다. 인간, 엘프, 흡혈귀, 그리고 지금 다시 인간들.

-깡! 깡!

저 멀리, 배의 갑판을 망치질하는 선원들의 소리가 들렸다. 고함과 웃음, 그리고 거칠고 둔탁한 파열음이 이어졌다. 페르난데스는 로브를 깊게 여미며 도시의 입구에서 번화가로, 그리고 그 귀퉁이의 슬럼가로 향했다.

-컹!

늙은 개 한 마리가 시끄럽게 짖으며 뛰어다녔다. 활기찬 도시였다. 동북부 삼각 무역의 중심지로 거듭난 이 도시는 페이른의 메를린포트와 제국 북부의 파라마린 사이의 핵심 교역로였다.

페르난데스는 스쳐 지나가는 선원과 행상들,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프란츠리트의 손에서 데인 왕국으로 이양된 이 도시엔, 어딜 둘러보아도 생명의 활력이 넘쳤다.

보기에 흡족한 광경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이 도시의 정경은 흡혈귀의 근거지였고, 그 외엔 미친 엘프 왕의 체스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고대하던 풍경은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보다 더 끈적하고 음산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여실히 남아 있는, 누구의 것인지 그 기억이 적출된. 그의 정신 속 흉터에.

페르난데스는 꿈결 속에서 보았던 길을 걸었다. 지하 수로로 향하는 음침한 골목으로, 흡혈귀와 흑마법사들이 용을 부활시키는 음모를 펼치고, 엘프 왕이 이를 이용하려는 계략을 자아내던 곳으로.

그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라며, 아니. 어쩌면 이 순간이 꿈이길 바라는 것일수도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기억 속 그녀는, 적어도 이렇게 사라져도 좋을 인물이 아니었다.

-두근.

명백히 그의 감정이 아닌 격동에 심장이 뛰었다. 페르난데스는 깊은 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다스리려 했다.

‘누군지 기억조차 못하는데, 가슴이 뛰는 것은 비이성적이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설령 자신의 것이라 하더라도, 감정은 기억에 기반해 반응성을 지닌다. 즉,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의 감정은 그의 것이 아니라 봐야 했다.

꿈일까. 그녀의 웃음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꿈일까? 나는 무엇이 진실이기를 바라는가. 손 안에,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이 두 손 안에, 평생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행복이 있거늘.

*

흡혈귀의 습격도, 엘프 잔당의 위협도 없었다. 지하 수로는 이따금씩 보이는 탁한 눈의 걸인과 시끄럽게 발치를 스치는 쥐, 그리고 끈적하게 휘몰아치는 오수만 가득했다.

어둡고 습한 수로였다. 관리가 부실한 탓에, 수로를 이루는 돌벽 군데군데에서 침착된 오물이 흘러내렸다. 페르난데스는 한 손에 불을 켜고 앞으로 걸었다.

더 깊은 곳을 향해. 지하 저 너머로. 언제 죽었는 지 모르는 넝마 속 해골이 드문드문 보이는 깊은 수로에 닿았을 때, 그의 기억 속 공동이 나타났다.

“허···.”

황급히 치운 실험 도구들과 거대한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동이었다.

어디서 흘러 들어오는 지 모를 빛에 벽면의 축축한 이끼들이 번들거렸다. 그는 천천히 그 한 가운데에 있는 파괴된 문을 향해 걸었다.

산산조각난 석문이 보였다. 더 아래로 내려가는 문. 기억에 있었다. 흡혈귀가 잠궈둔 봉인을 강제로 뜯어내며, 용의 유해가 있다는 사실에 들떠 내려가던 길이다.

‘그 기억이 맞다면, 가이메른은 용과 상잔했다.’

용과 상잔하고, 그 빈틈을 노려 들어온 프란츠리트에 의해 엘프들은 인퍼머르와 동북부 해상에 대한 지배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에 불과했다.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타다닥.

그의 발치에 걸린 돌조각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길게 메아리 쳤다. 그 아래로, 꿈과 현실의 경계가 천천히 허물어지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소리와 빛···.’

카단의 시련이 떠올랐다. 소리와 빛을 교묘히 이용한 환각 마법이. 그 때처럼 현실 감각이 천천히 무뎌지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가장 확실한 것이라곤, 거칠게 뛰는 심장과 마력이 여실히 꿈틀거리는 마력 회로 뿐이었다.

한 발자국, 지하 통로를 향해 발을 디뎠다.

*

차갑고 섬세한 손가락을 기억했다. 그의 거친 손을 감싸 쥐며, 그 아래에 힘을 불어 넣어 주던 손을.

따듯한 마력이 그의 텅 빈 마력 회로를 타고 흐르며 부드럽게 그를 지지하던 순간이었다. 힘을 잃어 떨어지던 그의 손에 깍지를 얹고, 다시 들어 올려 힘을 주며—

[너는 그저 이끌거라. 내가 따르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수인이 완성되고, 신의 힘이 그의 손 아래에서 맥동하던 그 순간을 기억했다. 이곳, 인퍼머르 시의 해상. 가이메른 왕의 기함 위에서.

그렇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부드럽게. 포근하게. 그를 내려보던 푸른 눈을—

*

휘발된 기억과 뇌간의 텅 빈 흉터 사이에 퍼즐 조각이 끼워 맞춰지듯이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더 내딛을수록 그녀의 윤곽이 더욱 또렷해졌다.

-저벅.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보름을 지새워 내달린 중년 사내의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경쾌한 걸음이었다. 페르난데스의 반백 머리칼이 자라나고, 피로와 혼란에 탁해진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저벅.

한 걸음을 걸어갈 때 마다, 한 꺼풀씩. 세월을 벗어 내리듯. 시간이 빗겨 흐르듯이!

*

장난스럽게 휘두르던 검의 궤적이, 그의 무거운 격검을 가볍게 흘렸다. 그 때, 잃어버린 그의 균형을 한 팔로 지탱하며 웃음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맑은 하늘 아래, 아마도 이단심문청의 훈련장. 수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검학에 대해 논하는 그녀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 가능성에 함몰되지 말거라. 항상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지거라. 언제나 멈춤 없이. 그게 너희들 인간이 아니더냐?”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늦여름의 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흐르고, 고아한 귀족처럼, 신비한 요정처럼 보이던 그녀의 눈에 순간 아이 같은 장난기가 어린다.

“용은 육식 동물이다.”

그녀는 사슴 고기를 좋아했다. 개인적으로, 사슴 고기는 퍽퍽하고 단단해서 썩 맛있는 고기가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요리에 능하지 않지만, 가능하다면 고대에 비해 진보한 현대의 요리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는 음식을 좋아했다.

*

기억이 또렷해지며, 지하 저 너머에 있을 그녀의 무덤가를 떠올리자. 그의 가슴 속 맥박이 더욱 거세어져 갔다. 데인 왕의 감정이다. 이제 그는 그의 심장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영혼 속에 녹아서 흐르던 데인 왕의 업이 느껴졌다. 환상일지도, 그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의심 속에서도 그의 심장은 거칠게 뛰었다.

-탁.

거대한 절벽이 발 아래에 있었다. 지난번엔 어떻게 내려갔더라. 그는 난간을 찾았다. 난간은 낡고 삭아 부서져 있었다.

‘할 수 있을까?’

흉터 덮인 손을 바라보며 그는 잠시 발을 멈췄다. 이상할 정도로 온몸에 힘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시야가 또렷하고 저 멀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마저 선명했다.

‘할 수 있다.’

그는 곧 절벽 아래로 몸을 낮춰 내려갔다. 콰직, 콱. 손가락이 단단한 절벽의 틈을 움켜쥐었다. 미끄럽고 가파르지만, 떨어지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지만—

그의 생명은 여전히 소모품이며,

그는 결코 현실에 안주하며 살지 않는다.

*

말 위에서 그를 내려보며, 빗물에 젖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아련했다. 살풋 젖은 머리칼은 눅눅한 햇살 사이에서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그를 내려보며, 따듯하게 둥그러졌다.

“아, 페르난데스. 우리는 표류자들이구나. 각자의 시간에서 떠나 먼 길을 왔어.”

그때 뭐라 대답했더라?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회피였다. 침묵이 부정을 대신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호의를 알고서도, 이를 악용한. 가장된 무지였다.

유치한 가면극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순간, 그녀가 그의 가면 아래를 살펴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때에도 부드럽게 웃었다.

“다행히 너에겐 등대가 있구나.”

“당신 또한 그랬으면 하오.”

그의 차갑게 식은 심장도, 데인 왕의 영혼 탓이 아니라. 정말 그의 심장마저도 한 순간 아릿하게 뜀박질 칠 법한. 그런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햇살을 등에 얹고 말했다.

“이미 있다.”

그게 나였소? 그 순간이 정녕 꿈이었소? 지금이 꿈이란 말이오?

페르난데스는 바위에 긁히고 베여 피에 절어 붙은 손을 바라보았다. 바닥의 단단한 촉감은, 도저히 꿈결이나 환몽이라 여길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꿈이길 바라는 것일까? 잊고 싶지 않아서? 꿈 속의 여인에게 호의를 느꼈노라는 사춘기 소년과 같은 감정일까? 그에겐 행복한, 안온한, 그리고 완벽한 미래가 있었다. 이것을 감히 놓을 수 있을까.

이 높은 절벽을 맨손으로 타고 내려왔음에도, 그의 팔과 다리엔 여전히 힘이 넘쳐 흘렀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보름 밤을 지새고 단 한 순간도 편히 쉬지 못한 중년 사내가 가질 수 있는 힘, 그런 사내가 가질 법한 젊음이 아니었다.

단단하게 조여드는 근육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새 상처가 없어져 있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조각난 기억이 퍼즐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조립되고 있었다. 텅 빈 공동, 수많은 파괴흔, 휘몰아치는 마력, 그리고 저 앞—

마력의 흐름으로 뒤덮인 뿌연 안개 너머로. 진실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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