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너는 안온함을 바라지 말라, 네가 아니라 (3) >
*
손가락을 접었다가, 다시 폈다.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겁고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 아찔했다. 저주와 증오가 몸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혈관이 터져, 시야가 붉게 일그러졌다. 하나의 육신에 담기엔 너무나 많은 힘과 영혼이 그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카단, 뭄토, 다인. 그리고—
-내가 너를 찾았다. 마법사.
그의 귓가에, 머나먼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게, 희미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페르난데스는 충혈된 눈으로 뭄토의 두개골을 노려보았다.
“그러니, 나의 손을 잡아라. 놈의 사도가 되었듯이, 내가 너를 나의 사도로 임명하마.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놈과의 협업보다, 나와 함께 이룰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뭄토는 승리를 확신하며 킬킬거렸다. 그는 페르난데스의 심장에 파고드는 자신의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 저 육신은 이제 복구할 수 없을 지경으로 타락했다.
지옥 마력의 타락은 이성과 본능을 왜곡시킨다. 놈이 어떤 성미를 지니고 있었든, 이미 덫에 걸린 영양과 같다. 뭄토는 천천히 거대한 손아귀를 뻗었다.
-스르륵.
뭄토의 손이 페르난데스의 몸을 움켜쥐려는 순간, 페르난데스의 입이 열렸다.
“원래 세계로 돌아왔군.”
“뭐라 했느냐?”
“원래 세계. 그래. 원래 세계로 돌아왔어.”
페르난데스는 손가락을 꽉 움켜 쥐었다. 근육의 결을 타고 흐르는 성자의 신성이 느껴졌다. 검게 흘러내린 머리칼 아래엔, 더 이상 세월의 흔적이 없었다.
체격이 커지고, 근육과 힘줄 사이를 벼락처럼 누비는 힘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관조하며 숨을 쉬었다. 이곳은 영혼계다.
-고오오오···.
주위를 살폈다. 뭄토의 손아귀 너머에, 음울한 암녹색 하늘과 그 위를 떠다니는 수천 명의 망령들, 지평선 너머까지 뻗은 피라미드와 계곡들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망령들의 혼과 그 소용돌이가 보였다.
이곳은 영혼계였다. 애초에, 잘못 본 적도, 잘못 온 적도 없었다. 뭄토가 만들었던 세계는 이미 일그러져 사라져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한쪽 눈이 감기고, 그 아래로 피가 흘렀다. 육신에 흐르는 저주와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신체의 말단부터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피가 떨어졌다. 기실, 눈이 있었더라도 눈물이 흘렀겠지. 달콤한 꿈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고열에 아찔한 머릿속에서 지난 세월을 되짚었다.
“그래. 하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네 영혼이 이쪽으로 건너왔을 뿐. 널 위한 세계는 여전히 저 아래, 차원의 벽 너머에 자리잡고 있다. 네가 바란다면, 네가 돕는다면 그 벽을 허물어 이곳에 덮어 씌워 주겠노라.”
뭄토가 속삭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콰드드득, 바닥이 갈려 나가며 뭄토의 손이 더욱 거세게 옥죄어 왔다. 이제 거의 페르난데스를 움켜쥐기 직전이었다.
“페이자쉬.”
-그래. 이제 내 말이 들리나?
“보고 있었나?”
-···그래.
“어땠지?”
-달콤하더군.
베이타서스가 갈라 놓은 영혼은 영혼계에서도 실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사실이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이 세계에서 진정코 그를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니까.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등 뒤에서 속삭이는 페이자쉬를 향해 짧게 웃었다.
-터지기 직전의 거품이 가장 아름답고 크게 방울 지는 법이지. 깨기 전의 꿈이 가장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으나. 동 트기 직전의 밤하늘이 가장 어두운 법.
“그게 위로냐?”
-내가 너를 위로한다면 그건 자기위로에 불과해. 페르난데스.
“하하.”
페르난데스는 뭄토의 손아귀를 노려보며 웃었다. 육신은 터져 조각나기 직전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마력에 노출되었다.
힘이 빠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지의 말단, 손과 발의 끝부터 으스러지며 핏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명백히, 죽기 직전. 또는 이미 죽은 육신이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등 뒤에 손을 돌렸다. 대검의 칼자루가 손에 닿았다. 다인 왕의 검. 연민검. 아니, 지금 필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다시 손을 더 옆으로 뻗어 마침내 그의 손가락 끝에 단단한 칼자루가 잡혔다. 열쇠검. 선신 만신전의 진정한 영성을 담고 있는, 베이타서스의 검이다.
-스르릉.
“감히 나에게 저항하려 하느냐?”
뭄토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영혼계 전체를 울렸다.
“네 상태를 보거라. 네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너는 나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네게 준 기회를 박탈하겠노라. 내가 네게 시간을 주었듯이, 너 또한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구나. 널 조각내고, 다시 조립해서. 나의 병정으로 삼겠다!”
뭄토의 위협이 비명처럼 터져 영혼계의 하늘을 찢어 발겼다. 하늘을 유영하는 수천 명의 망령들이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퍼억.
페르난데스의 다른 눈이 터지며 감겼다. 진득한 핏물과 안구의 유리체가 뺨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천천히, 칼날이 뽑혀 나와 손에 잡혔다.
“너의 미명에 종말이 닥쳤다. 나는 너의 꿈이 아니오, 오직 악몽이니. 네게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도다.”
“가로되, 너는 안온함을 바라지 말라···.”
페르난데스의 입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찬미경의 구절, 이단심문관의 선서 중 하나. 베이타서스를 향한 기도문이었다.
“기도하느냐? 너의 신에게?”
“네가 아니라 나의 양떼를 위함이니. 너는 안온함이 아니오, 오로지 가시밭길을 나아가리니···.”
신성 주문의 삼 요소는 기도와 기원. 그리고···.
-화르륵!
페르난데스의 등허리에서 새파란 불길이 치솟았다. 영혼계의 마력이 흩어지고 뭄토의 저주를 불사르며, 점점 더 또렷하게!
*
[내가 네게 임하였으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너는 나와 만신전의 대리인이 되었노라. 너는 결코 무너지지도, 타협하지도, 안주하지도 않으리라. 이것이 내가 네게 부여하는 나의 두 번재 권능이다.]
*
그 성흔의 이름은 [불굴]이라. 증오와 타락과 저주는 영혼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인성과 본성을 어그러트린다. 영과 성, 백과 혼이 모두 오염되는 지옥 마력 속에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불길처럼. 불굴의 성흔이 타올랐다.
-투두두두···.
전신 혈맥을 타동하며 신성이 내달렸다. 댐이 허물어진 후의 강줄기처럼 거칠게! 핏줄을 타고 신성이 흐르며 놈의 저주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성은 필멸자의 육신이 담기엔 너무 과중하니—
“커흑!”
걸쭉한 핏물이 목젖을 타고 터져 나왔다. 내장 조직이 섞인 끈적한 핏물이 그의 마지막 삶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수축된 혀를 힘겹게 움직여 기도를 이어갔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오, 검을 주러 왔노라. 쿨럭!”
가슴팍에서 새파란 불길이 이어졌다. 식어가던 몸에 다시 생명의 열기가 치솟으며 육신이 수복되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끊어졌던 혈관이 붙고, 터진 살점이 이어졌다.
*
[너는 네 임무가 온전히 마무리될 때 까지 결코 쓰러지지도, 몸을 누이지도, 안식을 찾지도 못하리라. 이것이 네게 부여하는 나의 첫 번째 권능이오.]
*
가슴팍의 성흔이 빛을 발할 때 마다, 페르난데스의 검은 머리칼이 하얗게 타들어갔다. 이제 반백이 된 머리칼 사이로, 감겼던 눈이 뜨였다. 터진 안구가 다시 이어 붙으며, 새파란 안광이 흘렀다.
이 성흔의 이름을 [불사]라. 완벽한 불멸성 따윈 없으니, 오히려 이것은 저주에 가깝다. 페르난데스의 마음에, 죽어도 다음 기회가 있다는 군살을 찌우는 저주!
그러니. 그러니. 페르난데스는 칼을 들어 뭄토의 몸을 가리켰다. 몸속에 잔류하던 핏물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 앞섶을 흠뻑 적셨다.
“베이타서스!! 내 말을 듣고 있다면, 나를 찾았다면!”
너를 찾았다. 마법사. 그 목소리는 분명 베이타서스의 것이었으니!
“네 저주를 이 자리에서 사용하겠다. 죽음에게 죽음을!”
성검이 타오른다. 열쇠검. 신과 인간 사이의 관문에 박아 넣는, 인간을 향한 신의 마지막 기회이자 시련을 의미하는 성검. 봉문된 선신 만신전의 굳게 닫힌 전당을 열어 젖히는 열쇠!
-콰드드드득!!
허공을 찢고, 페르난데스가 뻗은 칼날이 그 사이를 비집었다. 칼날이 산산이 바스라지며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영혼계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죽음을 죽이는 제물로, 불사를! 영원을 영락시키는 제물로, 불굴을 바친다!”
불사란 죽음의 반대항. 죽음이라는 관념을 죽이기 위한 제물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불사의 권능이 되리라. 베이타서스의 신성을 직접 때려 박은 이 성흔을 온전히 바쳐, 죽음의 신을 죽이겠다.
신성 주문의 삼 요소는, 기도와 기원. 그리고 기적이다. 페르난데스의 손아귀에 잡힌 칼날이 완전히 박살나며, 기적이 그의 손 안에서 터져 나갔다.
*
베이타서스의 검이 성흔과 동조해 어둠 속을 불태우며 빛났다. 뭄토는 그 모습을 보며 그를 평생 뒤쫓던 지독한 적수가 떠올랐다. 이단 사냥의 카단. 그의 최후 또한 저런 모습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페르난데스의 손에 잡힌 칼이 터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뭄토는 그 압도적인 힘 앞에 몸을 굳히고 섰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만신전의 대신(大神), 전쟁과 명예의 베이타서스. 놈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놈의 신성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너무나 높은 밀도의 신성에 뭄토의 몸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뭄토는 어금니를 으스러트릴 듯 씹으며 외쳤다.
“베이타서스!! 네 놈의 기만은 이제 지겹다! 역천을 이루려는 계략이 어찌 선신에게서 나온단 말이냐? 만신전의 봉문은 우리와의 약속이었거늘! 너는 이것이 공정하다 보느냐!”
[공정이라.]
-후우우웅!
거칠게 휘몰아치는 신성의 바람 너머에서, 베이타서스의 세계로 이어지는 관문 너머에서.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언제 공정을 논한 적이 있더냐?]
“빌어먹을 잡신이—!!”
뭄토의 입이 열리며 자신의 신성을 모두 불태운 저주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모해 발휘하는 대(大) 사령술사의 저주였다.
그러나, 그 사이를 비집고 공간을 갈아내며, 검은 궤적이 그의 머리로 날아와 틀어 박혔다.
“커흑!!”
저주가 중간에 끊어지며 한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뭄토는 자신의 머리에 틀어 박힌 묵빛 대검을 바라보았다. 대검이 날밑까지 깊게 박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한 손을 뻗은 채로 헐떡이는 페르난데스가 보였다.
“대악마. 네 항변의 기회는 끝났다. 종교 재판 사법권. 이단 즉결 처형권. 구마용 군이양지권. 교단성사 대리지권. 만신전이 보장하는 위 권한으로 이단재판을 시행하겠다.”
“너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
페르난데스는 그 말에 핏물을 머금은 입술을 비틀었다.
“악몽의 뭄토. 피고의 죗값은 사형이다.”
“죽음을 죽일 수는 없다!! 나는 죽음 그 자체다!”
“완벽한 불멸성은 없는 법.”
-촤르륵.
페르난데스의 피로 젖은 손이 허공에 수인을 짚었다. 그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영혼들 중, 프타하의 정복자 투탄 가르텝. 그의 영혼을 제물 삼아 얻은 힘으로 짚은 수인. [만물].
-화르르륵.
신성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지옥 마력을 이용하지도, 흑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 오히려 신성해 보이기까지 한 주문. 고대 제사장의 번제처럼 숭고하게—
그의 몸 속에서 다른 영혼이 화답했다. 대제국을 집어 삼킨 죄인을 벌하기 위해. 마흐라스의 마술사왕, 알타락. 그의 영혼을 제물 삼아 얻은 힘으로 다음 수가 허공을 짚는다. [죽음].
-카드드득!
마지막 영혼이 몸부림친다. 기꺼이 뭄토의 수하가 되기를 자청했던 대사제장, 파프테트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번제의식의 수탉을 베어내는 제사장처럼 단호하게—
그 마지막 수인은 [나침반]. 어떤 것도 완벽하게 불멸할 수는 없는 법. 저 하늘의 별들 마저도. 천구(天球)가 돌며 하늘을 떠돌던 영혼계의 망령들이 흩어지고—
-화르르르륵!
온 세상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별들과 머나먼 우주, 그 심연이 하늘을 수놓고. 하늘에 달이 뜨고, 달이 지고, 다시 해가 뜨고, 해가 지며. 영원을 상징하는 만트라가 거꾸로 돌고 바스라지는 형상으로!
[만물]. [죽음]. [나침반]. 단 세 수의 고대 주언. 상 아시트 시절 가장 강인한 세 영혼을 갈아내어 만들어낸 신성 주문의 대이적이 페르난데스의 손 끝에서 맴돌고—
“그러니. 죽음의 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안 돼!!”
뭄토의 비명과 함께, 영혼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바스라지는 뭄토의 육신과, 닫혀가는 베이타서스의 전당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게 끝이겠지?”
-글쎄.
페이자쉬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불사의 권능을 소모해 일을 벌였으니, 이제 페르난데스에게 더 불태울 생명력이 남아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허물어지고 으깨지는 영혼계의 지평선과, 그 아래를 유영하던 망령들이 마침내 자유를 얻어 하늘로 승천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대악마를 죽였다. 필멸자가 이루어낼 수 없는 업적이다. 그러나,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었다면 합리적인 행동이었을까?
영혼계에 속박된 망령들이 자유를 찾아 떠났다. 하늘이 밝게 타올랐다. 이제 대황야를 지배하던 악마도, 대황야를 타락시킨 저주도 없어졌으니. 이 세계가 살아남을 가능성 하나가 더 꽃피운 셈이다.
페르난데스는 행복과 열락에 노래하며 흩어지는 망령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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