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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35화 (136/388)

< 135. 물안개 속 외딴 섬 >

*

빌어먹을 먹구름에서, 또 다시 빌어먹을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때 대황야를 건너는 모든 방랑자들에게 갑작스러운 비는 신의 축복과 같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흙더미를 창끝으로 뒤적이던 수인족 전사 하나가 욕지기를 내뱉으며 머리를 긁었다. 대황야엔 지금 한달 내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미신과 저주에 민감한 수인족 답게도, 전사는 빗물을 입안에 머금고 부글거리다가 곧 바닥에 뱉어냈다. 이 음산한 빗물의 저주가 자신을 빗겨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전사는 투덜거리며 야영지로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비가 더 심해져서 가는 길이 진창이 된다면, 내내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

이미 온 사방이 진창이었지만. 어쨌건.

-퍼석.

그때, 전사의 귀가 쫑긋 섰다. 전사는 당황과 공포에 으르렁거리는 표정으로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지역 망령들은 모두 갑자기 사라졌는데···.’

대족장의 명령으로 프타하 인근을 뒤지기 시작한 것이 한 달 째다. 그리고 대황야 전체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 또한 그쯤 되었다. 프타하 인근을 차지하고 있던 망령 도시는 한 순간 땅에 꺼진 듯 사라졌고, 여기에 남은 것이라곤 고대의 사금파리와 깨어진 도자기 같은 잡동사니들 뿐이었다.

그러나 곧, 소리가 이어졌다.

-퍼서석.

“누구냐!!”

전사가 으르렁거리며 눈을 치켜떴다. 빗소리에 섞여서, 소리가 난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에겐 다행히도 곧 가늠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저 멀리, 황무지의 흙더미 한 가운데에서—

-퍼석!

손이 튀어나왔다. 전사는 그 즉시 창을 집어던지고 도망쳤다.

*

콧속, 입속, 귓속. 눈이야 감고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사지에 흙이 가득했다. 페르난데스는 호흡곤란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오, 이제 곧이야. 내가 봤어.

‘그거 정말 도움되는 말이야. 페이자쉬. 도와줄 생각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하!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페르난데스는 힘겹게 팔을 뻗어냈다. 잔뜩 젖어 무겁게 뒤엉킨 진흙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이미 죽어 나자빠졌을 극한의 상황이다. 그러나 디모니카를 생매장 정도로 죽이려면 상황이 이보단 더 ‘극한’에 가까워져야 했다.

-투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빗물의 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페르난데스는 흙을 삼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호흡하며 힘차게 팔을 뻗었다.

-퍼석!

흙더미가 흩어지며 팔에 차가운 빗물이 닿았다. 밖이다! 페르난데스의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팔을 내뻗고 다리를 박차 올라갔다.

-파사삭! 쏴아아아아!

“하, 하하!”

흙더미에 하반신을 묻은 채로, 페르난데스는 하늘을 향해 양팔을 뻗으며 소리쳤다. 엄청난 장대비로 시야가 뿌옇고, 고된 노동으로 전신이 피로했지만. 공기가, 물질 세계의 공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워나갔다.

“쿨럭! 크! 하하하!!”

입안에 들어온 진흙을 뱉어내며 페르난데스는 미친듯이 웃었다. 빗물로 온 얼굴과 머리칼을 닦아내며 그는 한참 박장대소했다.

-뭐가 그렇게 좋지? 살아 나온 것?

“멍청한 녀석! 하하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즐겁지 않겠나!”

아직, 세상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아직 자신에게도 구원의 자리 한 켠이 남아 있다는 뜻이며, 내심 삶을 포기했던 순간에도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는 소리였다.

그것이 기꺼워, 페르난데스는 웃었다. 영혼계가 붕괴하고 지하 저 아래에서 지축이 무너지던 그 순간에, 페르난데스는 내심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직감했었다.

베이타서스와의 계약, 그것을 보증하는 서명이 그의 몸에 박힌 성흔이었다면. 페르난데스가 그것을 포기해 불사라는 기회를 잃었다. 그에게 남은 건 지침 몸뚱아리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번 생이 특히 잘 풀린 것이라고 봐야 했다. 언제는 여분의 목숨을 가지고 싸웠었나? 수월한 난관, 치열하지 않았던 투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에겐 이런 상황이 일상이었고, 그는 항상 살아 남는 편이었다.

-쏴아아아아···.

페르난데스는 온몸을 적시는 빗물과, 흙더미 사이에서 피어난 작은 풀을 바라보며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대황야를 뒤덮고 있던 지독한 저주가 완전히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

얼마나 걸었을까. 페르난데스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물 사이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황야의 밤은 매섭다. 비에 젖은 몸을 녹이지 않는다면 심각한 수준의 저체온 위협이 있었다.

“여기가 프타하 지역일까?”

-마지막으로 봤던 곳이 그랬으니, 그렇겠지.

페르난데스는 곱아드는 손에 입김을 불며 걸었다. 반백으로 샌 머리칼이 비에 젖어 눈가에 흘러내렸다. 그때, 저 멀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저 놈이다!!”

한 무리의 수인족 전사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칼자루로 손을 가져가며 자세를 잡았다.

“제가 봤습니다! 이놈이 땅을 뚫고 솟구쳤다고요!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고 했죠?”

“잘했다. 넌 누구냐, 이방인? 망령처럼 보이진 않는데, 왜 이 지역에 와 있지?”

말을 타고 있는 수인이 그를 내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여긴 프타하 인근인가?”

“넌 네가 서 있는 곳조차 모르는가?”

“아쉽게도. 혹시 이 근처에 마을이나 도시가 있다면 안내해줄 수 있나? 길을 잃었다네.”

“지하를 뚫고 나온 정체불명의 이방인에게 마을로 안내할 정도로 우리가 어리석지는 않아서. 일단 잡아라!”

말 위의 전사는 창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수인들이 달려들어 페르난데스의 양팔을 붙잡으려 했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를 움켜쥐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전사들을 노려보았다.

“수인 호족 연합 소속인가?”

“그렇다면 어쩔거지?”

“순순히 따라가지. 손님으로. 수인 호족 연합의 전사들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네. 아는 사람이 있어서.”

“···흠.”

전사는 당황한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먼저 칼을 뽑지 않는다면, 당장 적대할 생각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체를 모르는 인물을 야영지에 들여도 좋을까? 지금이야 휴전 상황이라 해도, 이 근방은 화약고나 다름 없었다.

“대장님, 데려가 보는게 어떻습니까?”

“흠?”

“대족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대예언자님도 그랬구요. 아니면 뭐 그때 치도곤을 내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대족장님이 말했던 놈이랑 이 놈은 인상착의가 너무 다른데?”

페르난데스는 쑥덕거리는 전사들을 훑어보며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신체 상태가 만전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디모니카의 육신은 여전히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원치는 않았지만 여차하면 싸워볼 만은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수인 전사들은 내전과 탈영으로 한껏 예민해진 상황이었고, 언제 상황이 터질지 알 수 없었다.

“비켜라.”

그때, 저 멀리에서 차갑고 예리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수인 전사들이 움찔 떨며 황급히 말 아래로 뛰어 내려 엎드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페르난데스는 빗물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물안개가 짙게 낀 황무지 위에, 청록색 안광이 타오르고 있었다.

-철퍽.

무거운 것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실루엣이 점차 커졌다. 수인 전사들은 길을 터며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키르하스···?

페이자쉬의 억눌린 신음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압박감과 사슬에 묶인 야수와 같은 흉포함이 안개 너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곧,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흐린 날에도 불구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 가면을 머리에 관처럼 올리고, 빗물 속에서도 윤기가 흐르는 검은 망토를 두른 여인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외모였지만, 그가 기억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차갑고, 날카롭고, 강인한 포식자의 눈이다.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동자가 잠시 페르난데스의 머리칼에 닿았다가, 이내 내려가며 그의 전신을 훑었다.

“네 말이 맞았군. 카단. 아, 그래. 칭찬해주마. 떠들지 마.”

바싹 갈린 칼날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키르하스는 나른한 손짓으로 그의 옆에 부복한 전사에게 팔을 뻗었다.

“불을 붙여라.”

“예, 대족장.”

완벽한 복종의 자세로 꿇어 앉은 전사가 키르하스의 손에 들린 담뱃대에 불꽃을 피우고 재빨리 방패를 들어 올려 가림막을 만들었다. 후, 깊은 숨소리와 함께 담배 연기가 그 아래에서 흘러내렸다.

“대족장, 저 자를 어떻게 할지···.”

“데려와.”

“예! 뭣들하나? 잡아!”

전사들이 발작적으로 몸을 던지며 페르난데스에게 다가왔다. 페르난데스는 혼란 속에서 방어를 해야하나, 그대로 포박되어야 하나 고민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불패자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어떻게 그녀가 이 시기에 여기에 있지?

‘설마 이것도 꿈이란 소린 하지 마.’

-그것 참 그럴싸한 가설이로군. 합리적이야.

전사들은 당혹감 속에서 잠시 굳어 있는 페르난데스를 둘러 쌌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키르하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조심히!”

“···네?”

“어···음. 으음···. 상처 입히지 말고 데려와라. 내 손님이니.”

키르하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말 위에 올라탔다. 전사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페르난데스를 말 안장으로 안내하고는 길을 떠났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든 상황이 지날 때까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

야영지에 도착할 때 까지 키르하스를 계속 바라봤지만, 키르하스는 그에게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끔 떨어지는 빗물에 귀를 까딱거리거나 이따금씩 담뱃대에 새 담뱃잎을 채워 넣을 뿐이었다.

야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당황한 전사들이 그를 깔끔한 막사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쉬고 계십시오. 거 우리 대족장님 손님이었으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원···.”

전사는 투덜거리고는 떠났다. 막사의 한 가운데에 있는 모닥불에 손을 녹이며, 페르난데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 분위기, 그 존재감. 분명 불패자의 것이었어. 혹시 우리가 시간을 건너 뛰었다던가···?’

-그것도 가능성 있는 가설 중 하나···. 뒤를 봐라!

페이자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발치에 있는 검집을 차 올리며 칼자루를 뽑았다. 거의 소리 없이 들어온 인기척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칼날을 뽑을 새도 없이 뒤로 대검을 휘둘렀다.

-캉!!

거친 충격에 대검이 튕기며 낡은 검집이 부서졌다. 파편이 흩어지는 사이, 페르난데스는 자세를 잡고 뒤를 돌았다.

-캉! 카드득!

온전히 대비할 새도 없이 이어진 공세에, 페르난데스는 정신 없이 뒤로 물러섰다. 비를 너무 오래 맞은 탓일까. 뭄토와의 격전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 그의 생각대로 따라오지 못했다.

-카앙!

적의 공격이 반박자 더 빨리 들어와 그의 검로를 끊었다. 페르난데스는 튕겨 올라간 칼을 수습하려 팔에 힘을 주었다. 그때, 공격자가 그의 품 안으로 재빨리 들어와 그의 뒷목을 붙잡았다.

“큭?!”

불사가 없는 굳은 육신에 갑작스러운 기습.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페르난데스는 이를 깨물며 팔을 쳐내려 했다. 그때 그의 몸이 붕 뜨며 침상 위로 떨어졌다.

“윽!!”

“후···.”

침입자의 숨결에서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났다. 페르난데스는 충격에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매끄러운 검은 머리칼이 차양처럼 그의 주위를 덮었다. 그의 몸 위에 올라탄 침입자가 그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은공···.”

차갑고 가느다란, 떨리는 손가락이 페르난데스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페르난데스는 혼란에 휩싸인 채로 멍하니 입술을 떼고 물러나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어깨를 강하게 누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낭창한 종아리가 허리를 꽉 조이며 얽혀 들어왔다.

“가만히.”

“키르하스. 이게 지금 무슨···.”

“잠시만 가만히 계세요.”

다시 한 번, 키르하스가 그의 입술을 덮쳤다. 물기 젖은 청록색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짧고 강렬한 입맞춤 끝에, 키르하스가 물러서며 입술을 살짝 핥았다. 페르난데스는 허리 위에 올라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고생이 많으셨나 봅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은공도 그러셨나요?”

“궁금한 건 많지.”

“그럼 제가 은공의 시간을 사겠습니다.”

-쒜액!

키르하스는 재빨리 출수해 촛불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천막 안의 촛불들이 일제히 꺼지며 유일한 조명은 천막의 중심에서 타오르는 노란 모닥불 뿐이었다.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천막에 내려앉은 고요를 흔들고 있었다. 장대비가 천막의 지붕에 부딪쳐, 바깥의 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물안개 속의 외딴섬처럼. 이 야영지에 오로지 그와 그녀 단 둘만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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