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황무지의 끝 (1) >
*
“하지 말거라.”
“제가 뭘 하려 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해도, 하지 말거라.”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달뜬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반백, 희게 새어버린 머리칼 사이로 그의 푸른 눈이 빛났다.
키르하스는 꼬리와 귀를 바싹 세우고는 그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어째서 항상 저를 거부하기만 하십니까?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지요? 아벨, 그녀는 되고 저는 어째서, 어째서···. 제가 모자라십니까? 제가 충분치 않았나요?”
“키르하스···.”
“저는, 저는 봤습니다. 은공이 그녀와 입을 맞추는 모습을. 한 번이 아니셨었죠! 어째서 저는 그 자리에 닿을 수 없습니까?”
페르난데스는 서두르지 않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숨결이 바로 입가에 닿았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려는 키르하스를 붙잡아, 무릎 위에 돌려 앉히며 천천히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네가 상처 입을게다.”
“지금보다 더요?”
“아마도. 네가 내게 가진 감정은 허상이야. 노예 신분에서 구원해주고, 너를 가르치고, 네게 힘을 주고, 그리고 널 이 위치까지 끌어 올린 것. 네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은, 나의 전부가 아니다.”
“은공께서 보시는 제 모습도 제 전부가 아닙니다.”
그녀의 투정 어린 말에, 페르난데스는 큭 하고 웃었다.
“그렇더구나. 훌륭하게 성장했어.”
“지금 저는 은공을 이길 자신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럼 제가 은공을 힘으로 제압하고 하던 일을 마무리하면 안되는 이유가 뭔가요?”
“내가 너를 아끼니까.”
페르난데스의 낮은 목소리에 키르하스의 꼿꼿한 기립근이 바싹 섰다. 키르하스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상처가 가득 덮이고, 거칠게 튼 손이었다. 그 거친 세월과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열정. 그녀가 좋아하는 손이었다. 키르하스의 꼬리가 미끄러지듯 늘어져 페르난데스의 허벅지를 감쌌다.
“밤이 기니, 내가 네게 해줄 이야기가 많구나.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페르난데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 페이자쉬의 속삭임이 들렸다.
-그냥 해버리지 그래? 그게 더 수월할텐데. 저 여자가 더 이상 성장하기 전에, 목줄을 채워 두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어?
‘그것 참 도움 되는 조언이군. 페이자쉬.’
-진심이야. 어차피 그 용이나 저 짐승. 둘 다 우리의 팻감에 불과해. 우리가 바라보는 체스판은 소꿉장난보단 더 큰 편이지.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마라. 그건 독을 흘려 넣는 것에 불과해.
‘잠시 꺼져 주겠나. 친구?’
-큭. 친구라···. 자기도착적이군.
페이자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사라졌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키르하스의 목덜미를 손등으로 쓸었다.
“점점 더 참기 힘들어지는데요, 은공?”
“나라고 감정이 없겠느냐. 나도 하는데 네가 못할 리가 없다. 자, 키르하스. 긴 이야기가 될 거야.”
그래, 그 말부터 하자.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살짝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아내가 있단다.”
놀란 고양이가 뛰듯이, 키르하스는 벼락처럼 일어나 방 반대편으로 뛰어올랐다.
*
이야기가 끝난 후 그녀가 잠에 든 것은 그로부터 네 시간이 지난 뒤였다. 페르난데스는 탁상에 걸터앉아 차를 한잔 마시며, 침대에 늘어져 쌔근거리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현명하군, 마법사.]
“카단.”
그의 옆에 돌연, 자칼 머리를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너에게 주기엔 아까운 아이지.]
“기억을 가지고 있군.”
[당연하지 않나? 내가 누구라고 생각한건지. 하, 그래도 궁금하긴 하군. 왜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지?]
“나에겐 아내가 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 인간은 핑계에 불과해. 저 아이는 아주 매력적이고, 장래가 유망하고, 심지어 지금도 대족장에 앉아 있네. 아마 호족 녀석들 역사상 가장 어린 대족장이겠지. 그런데 왜 그녀를 취하지 않았나?]
“그게 바르지 않으니까.”
페르난데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몸을 웅크리고 훌쩍이며 잠을 자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저 아이를 취하는 것은, 저 아이를 이용하는 것에 불과해. 나 또한 저 아이를 아낀다네. 카단. 하지만 진실을 더 늦게 알게 될 때, 저 아이가 그땐 날 어떻게 생각하겠나?”
[비겁하군. 저 아이는 그래도 행복해 할거야.]
“···그럴지도. 하지만 그건 기만에 불과해.”
[너는 삶을 복잡하게 사는구나. 마법사.]
“세상이 단순하지 않으니.”
페르난데스는 차갑게 식은 찻물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키르하스의 뽀얗게 드러난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고는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 아이는 행복할 자격이 있어. 최대한 오랫동안···. 이 아이의 앞에 놓인 길이 마냥 꽃밭은 아닐테니. 내가 그런 길로 인도하게 될 테니까. 그 전까지는···.”
[너로 인한 피해자라, 이 말이냐?]
“그렇지 않나? 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모든 건 결국 그녀가 쟁취하게 되었을 것들이야. 내 기억을 보지 않았나? 영혼계에서 말이야.”
[그건 기억이 아니었다. 페르난데스.]
모닥불 건너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카단이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놈은 수많은 거짓을 담았지만 적어도 하나 진실이 있었다면···. 네가 겪은 그 몇 년은 환상이 아니었어. 그건 정말 놈이 만들어낸 수평 세계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저 아이가 변한 모습을 보고도 모르겠나? 저 아이의 영혼은 섞이고 있어. 놈이 죽고 그 세계가 허물어지며 내가 다시 이 물질계로 돌아왔고···. 그 사이에 나와 계약했던 그 세계의 ‘키르하스 하트테이커’의 영혼과 이 세계의 영혼이 섞이고 있단 말이야.]
카단은 잠시 입술을 핥았다.
[네 말이 맞다. 마법사. 네가 저 아이를 가시밭길로 인도하겠지. 이미 그랬고. 저 아이는 점점 더 변하게 될 거다. 그 세계의 ‘불패자’와···. 정체성이 흔들리며 성향이 바뀌는 과정이 얼마나 끔찍할지, 너도 알텐데?]
너의 책임이다. 카단은 눈을 우습다는 듯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잠이 든 키르하스를 내려보다가 카단에게 다가갔다.
“후회를 더 떠안는다고 내가 바뀌진 않아. 카단. 내게 할 말은 그것 뿐인가?”
[저 아이를 책임지라는 말? 글쎄, 네가 지금 떠나려는 것을 만류하고 싶긴 하군. 네가 떠나면 저 아이는 이 모든 상황을 내팽개치고 널 찾아 달려갈 테니.]
“저 아이에겐 저 아이의 일이 있어. 나에겐 나의 것이 있고. 카단. 이제 일 이야기를 해보지. 대황야는 지금 어떤 상태지? 남은 파라오들은 어떻게 되었고, 어째서 이 지점까지 수인 호족 연합이 영역을 넓힌 건가?”
[그것도 재밌는 이야기가 되겠군.]
카단이 입술을 핥았다. 놈의 입 안에서 칼날처럼 예리한 송곳니들이 보였다.
*
페르난데스가 지하에 파묻힌 네크로폴리스를 뚫고 올라온 것이 한 달, 그 시간은 곧 뭄토가 죽고 그 여파가 퍼진 이후로 한 달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황야는 한달 내내 비가 내렸다. 처음 일주일간 빗물에 영혼계의 마력이 흘러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 일주일간은 풀이 자라나고 정글이 솟는 등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황제와 술탄은 공식적으로 대황야의 지배권을 포기했다. 이미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는 판단, 또는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은 땅이라는 판단 탓이다.
그 덕에, 살아남은 두 파라오는 온전히 세력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두 국가는 평화 협정을 맺고 서 아시트와 동 아시트로 국호를 개칭했다.
그리고···. 키르하스가 있었다.
*
[내가 임한 이후, 그녀의 영혼에 저 세계의 키르하스가 섞이기 시작했네. 더 과감해지고, 노련해지고, 기민해졌지. 그야말로 불패자. 대립 대족장 의회라 불리던 떨거지들은 추풍낙엽처럼 흩어졌다.]
카단은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그 날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립 대족장의 군단 한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 단 수십 기의 기병으로 돌격해 대족장의 목을 따고 시산혈해 한 가운데에서 종전을 선언하던 그녀의 모습이.
종심을 돌파하는 그 순간, 그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강력한 무력, 압도적인 매력. 모든 수인들이 기꺼이 복종하는 대황야의 지배자가.
[그리고 곧장 널 찾기 시작했지. 네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곳에 대해 수소문을 시작하고, 갑작스레 증발한 투탄 가르텝의 도시가 가장 의심스럽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 근처 토사를 모조리 뒤엎으며 네 시신이라도 찾으려 애썼지.]
거의 광란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이주에 걸친 수색은 언제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을 맺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로 하루에도 수십 차례 흙더미가 무너지는 이 대황야에서, 단 한 사람의 시신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그녀의 집착과 초조함이 거세어졌다. 칼날처럼 예리해지다가도, 당장 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그때 누구 하나 함부로 저 아이에게 말을 걸지 못했었다. 목이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거든.]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는 공정하고 의로운 성격이었지만, 그녀의 모습을 본 모든 인물들은 말을 꺼내기 전에 목숨을 먼저 염려해야 했다. 그러던 중, 그가 나타났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가.
[네가 나타난 후, 키르하스는 아주 오랜만에 웃었지. 페르난데스. 나는 저 아이의 아비와 같다. 저 아이의 처지가 안쓰럽고, 저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부분에서 특히 그렇지. 그러니, 네가 여기에 남았으면 한다. 마법사. 너는 적어도 저 아이의 등대가 되어줄 수 있으니.]
“키르하스는 홀로 일어설 수 있을 거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으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녀는 더 약하고 불안정해. 저 아이는 오직 네 앞, 혹은 적의 앞에서만 강한 척을 한다.]
“그럼 걱정 없겠군. 곧 온 세상이 그녀의 적이 될 테니.”
황제와 술탄, 두 파라오, 그리고 곧이어 찾아올 카라드스카르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눈 앞엔 적들이 산재해 있었다. 수인 호족 연합은 그녀의 강력한 카리스마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언제든 분열될 수 있었다.
그러니만큼, 그녀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녀에겐 모진 일이 되겠지만, 그와 그녀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를 거둔 이유는, 오직 카라드스카르를 막아낼 대비책을 사전에 포섭하자는 이유 뿐이었다. 감정과 목적을 혼동해선 안된다. 페르난데스는 자기암시를 걸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그녀를 팻감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의 곁에서 페이자쉬가 킬킬거리며 속삭였다. 페르난데스는 그 말을 무시하며 천막의 입구로 몸을 돌렸다.
[결국 떠나는군. 그 용에게 가나?]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그는 우의를 둘러 몸에 걸쳤다. 간단한 휴식과 식사로 건강이 충분히 회복되었다. 신성을 모두 잃었어도, 디모니카의 육신은 그 성능이 일반인을 아득히 웃도니.
카단은 아무 말 없이 떠나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천막의 휘장이 걷히자 거친 비바람이 안으로 몰아 들어왔다. 곧, 휘장이 덮이고. 빗소리만 침묵 속에 도도히 흘렀다.
카단은 침상에 누워 있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단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일어나 있나. 키르하스?]
“그래.”
칼날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키르하스는 비척거리며 침상에 앉았다. 그녀의 고운 손이 침상 한 구석을 더듬더니 긴 담뱃대를 꺼내 물었다.
칙, 모닥불 끝에 불똥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일 때 까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청록색 눈동자가 불길을 머금고 타올랐다.
[나는 추천하지 않아. 진심이다.]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마. 카단.”
후, 깊은 숨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방 안에 흩어졌다.
“은공은 상냥한 분이야. 정말 날 이용하고 싶었다면, 날 품었겠지. 오히려 내가 그걸 원했으니···.”
[그걸 두고 세간에선 콩깍지라 부른단다. 아이야.]
“하지만 너도 느꼈겠지. 은공에게선 예전과 같은 힘이 느껴지지 않아. 베이타서스의 것···. 그 특유의 금속 냄새 나는 신성이 느껴지지 않아.”
[그래. 나는 그걸 눈 앞에서 봤지. 놈은 신성을 잃었어.]
-치익···.
담뱃재를 바닥에 털고 꼬리로 툭 쳐서 꺼트린 키르하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다면 더욱 내가 필요하실거야. 은공은 날 떨어트리고 싶어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어림도 없지. 카단.”
[따라갈 건가?]
“죽음이 갈라 놓을때 까지.”
[열정적이군. 네 백성들에게 그 반절 만큼만 열의를 보이지 그랬나? 네 주인만큼 이들도 널 필요로 해.]
“나한텐 이들이 필요하지 않아.”
카단은 그 말을 들으며 혀를 찼다. 페르난데스는 그녀가 대족장으로 성장해 군단을 이끌기를 바랐겠지만, 그는 그녀를 너무 의존적으로 키운 셈이다.
그녀의 목적, 그녀의 삶은 오직 한 사람을 향해 불타오르는 도화선과 같았다. 키르하스는 우의를 걸쳐 덮어 쓰며 무장을 챙겼다.
“그리고 더 이상 뒤쳐질 수는 없잖아? 사냥의 주인이 사냥터에서 말야.”
페르난데스의 긴 이야기, 전생과 신, 악마와 종말에 대한 기나긴 이야기는 허황되고 믿기 어려웠지만. 그것을 페르난데스가 말한 이상 진실일 것이다.
그 중 그녀가 가장 주의 깊게 들었던 부분은 아들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행히, 아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아벨은 단 두 번 입맞추는 것에 불과했지만. 나는 세 번 했고 무릎에도 앉았어.’
의미 없는 숫자놀음에 불과하지만 어쨌건 그녀에게 있어선 대단히 중요한 지표였다. 지금 페르난데스는 동부 왕국 연맹으로 넘어가 이단심문청에 복귀할 계획일 터.
그 여정에서 아벨에게 선수를 양보할 생각 따윈 없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가련한 노예 소녀 따위가 아니니.
[부족은 어쩌고?]
“넌 일단 피엘에게 의탁해.”
[그 예언자 계집의 몸이 신성을 잘 흡수하긴 하더군. 체질 탓인가.]
“그래. 그녀에게 전권대리를 맡기고, 파르탁에게 보좌를 의뢰하지. 바트라스가 함께한다면 현상 유지 정도는 별 일 아니야.”
[돌아올 생각인가?]
그 말에 키르하스는 눈부시게 웃었다.
“그 분에게 여길 돌아와야 할 이유가 생긴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