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파견 임무 보고서 : 사막 곡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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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피스는 벌써 다섯 번째, 이단심문청과 교황청으로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려 펜을 들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려놓았다.
현장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정리해서 상신하는 것이 그의 주 업무였고, 지금까지 업무 수행에 제법 능숙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지만, 수많은 붙임과 허황된 이야기로 가득찬 이 보고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톡.
제피스는 이마에 손을 얹고 페르난데스가 보낸 보고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선만으로 무언가를 뚫어낼 수 있다면, 이 보고서는 이미 걸래쪽이 나 있었을 것이다.
“후···.”
다시 한 번 깊게 한숨을 내쉬고, 제피스는 페르난데스의 보고서에 추신을 한 문장 보태는 것에 그쳤다. 더할 것도, 감할 것도 없었다.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는 보고서의 말미에 추신을 한 문장 적어 넣고, 보고서의 유선 봉투에 밀랍 봉인을 발랐다.
이 이상의 판단은 베오른이 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과 책임 회피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촤르륵.
그는 로사리오를 꺼내 손등에 감고 탁상 위에서 합장했다. 신이시여, 책임을 전가할 수 밖에 없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저는 감히 이 사태를 판단할 수 없나이다.
그들의 신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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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급령 제 221호, 해당 자료 조회의 인가 대상자는 준 1급 대주교, 또는 그 이상에 한함.]
[파견 임무 보고서 : 사막 곡예]
작전 지역 : 서부 대황야, 모사트 시.
작전 개요 : 레바인테르 제국 아이언사이드 기밀 파견 임무 요청서(붙임 1)의 인가. 모사트 시 인근 유적지에서 네크로폴리스의 자취를 추적.
작전 경과 :
1) 모사트 시의 수색 임무 도중 술탄의 샥시시와 접촉.
2) 모사트 시 지하에 매장된 네크로폴리스의 봉인지를 발견.
3) 아이언사이드의 비인가 폭격으로 네크로폴리스의 봉인이 파괴됨. 현장 요원 알베르트와 샥시시 사디아 아말의 처치로 피해는 봉인지에 한함.
4) 봉인 파괴의 여파로 네크로폴리스의 망령들이 대황야에 풀려남 (붙임 2. 모사트 시의 봉화 사건)
5) 샥시시와의 업무 연계, 남은 네크로폴리스의 봉인들이 파괴된 정황을 파악. (붙임 3. 삼 왕조의 봉화 사건)
6) 대황야에 총 세 개 집단군의 망령 군벌이 발생. (붙임 4 : 사태 발발 기준 대황야의 세력 전도)
7) 현장 조사 결과, 대악마의 영향력이 축소되었음을 판단. (붙임 5 : 개별자료 보고서 / 페르난데스)
8) 대악마 토벌을 위한 시험적 사전 조사에 착수. 인근 수인 호족과의 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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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베오른이 쥐고 있던 펜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베오른은 잠시 멈칫하고는, 쓰레기통에 펜을 집어 던졌다. 그와 같은 결말을 맞이한 펜들이 쓰레기통 안에 쌓여 있었다.
보고서는 모두 해체되어 붙임 자료들이 탁상 위에 어질러져 있었다. 베오른은 첨부 지도 중 하나를 들고 그 위에 선을 그었다.
“모사트 시.”
사건의 시작은 분명, 저 오아시스 상업 도시 지하에 매장된 유적지의 조사였다. 그런데 돌연 아이언사이드가 포격을 시작했다고? 이는 사전에 파악한 정보 중 하나였다. 진실일 것이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페르난데스가, 해당 지역의 샥시시와 연계해 폭격을 저지했다는 것. 현장 요원으로써 대단히 재치 있는 판단이다.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악마의 영향력이 언급이 된다고? 베오른은 페르난데스의 ‘개인 판단 근거’가 기록된 보고서를 펼치며 외눈 안경을 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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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왕조가 인근 국가들에게 선포한 대외적 입장은 그들 자신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인정하고, 대황야의 소유권을 주장하겠다는 것이었다.
세 개 집단군으로 분할된 각각의 망령 군주들은 서로 전혀 다른 세력과 연합하거나, 다른 왕조의 동맹 세력과 전쟁을 시작했다.
위 사실을 근거로, 현장 요원으로써 망령 군주들이 독립적 자아와 그 실현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세 개 집단군의 각 망령 군주들을 물질 세계의 세속적 왕조로 치환하고 고려했을 때,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가설이 필요하다.
(1) 망령 군주들은 대악마의 하수인이다.
[1] 이는 아이언사이드 측의 협조 공문 (붙임 6. 데인 왕국의 망령 군주)에서 확인이 가능했다.
(2) 각 망령 군주들에게 투사하는 대악마의 영향력이 떨어졌음을 시사한다.
[1] 각 망령 군주들은 상호간의 연계나, 대악마를 위한 특정할 수 있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다.
해당 가설의 증명을 위해 현장 요원은 한 망령 집단군의 고위 지배 개체와 접촉했다. 해당 개체와의 정보 교류를 통해 해당 가설이 참임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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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읽고, 베오른은 안경을 벗어 눈가를 눌렀다.
“자신이 파견된 지역이 폭격 당하자마자, 상대를 유추하고 그 상대의 적수와 연계해 폭격을 저지했다···.”
대단히 영민하고 재치 있는 판단이지만, 가능한 수준의 판단이었다. 베오른은 피로에 찌든 눈으로 지도를 노려 보았다.
“폭격 직후에 망령 국가들이 발호했다···.”
이건 그 결과였으니, 현장 요원의 판단과는 별개의 것이다. 베오른은 탁상을 톡, 톡 치며 보고서를 내려 놓았다.
“망령 국가들이 발호해 독립을 주장하자마자 그 배후에 있는 대악마가 약해졌다는 판단을 세웠다. 해당 국가의 고위층과 접촉하고···. 그 판단이 진실임을 입증했다.”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판단인가? 격변하는 황무지의 세력권 틈바구니에 끼여 있던 사람이?
일반인이라면 살 길을 찾기도 어려울 그 난국에서, 고도로 훈련받은 정예 요원이라면 생환을 목적으로 할 그 상황에서···.
“대악마를 죽이고 사태를 진정시킬 계획을 세운다고?”
일반적으로, 태풍의 안에선 태풍을 볼 수 없다. 체스 판의 기물은, 체스 판의 판도를 볼 수 없다. 전장 한복판의 병졸은 전황을 파악할 방법이 없다. 그것이 상식인 바.
그러나 이 ‘성자’는 그것을 해냈다. 격동하는 황무지, 그 한복판에 끼인 채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잡고!
그 어린 나이엔 불가능하다? 아니, 나이에 상관 없이 가능하지 않다. 일반인에겐 불가능하다? 아니, 이건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상식선 안의 사람에겐.
“이 형제는··· 생명을 목숨이라 여기지 않는군.”
베오른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이 보고서의 모든 자료들, 페르난데스가 판단한 근거와 이를 말미암아 행동한 모든 자료들은 그 근간에 자신의 목숨을 염두해 두고 있지 않았다.
그랬다. 베오른은 그제야 깨달았다. 성자에겐 불사의 성흔이 있다. 일반인의 사고관과 전혀 다른 사고가 가능할 것이다. 죽지 않으니, 목숨을 목숨이라 여기지 않았다.
사람에겐 불가능하다? 아무리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기본엔 필멸자가 공유하는 상식이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 ‘성자’에겐 그것이 없었다.
“불멸자의···. 사고방식을 하고 있었군. 형제.”
베오른은 지도로 눈을 돌리며 깊은 숨을 들이 마셨다. 저 너머에, 지금 교단으로 복귀하고 있을 그 형제는. 불멸자의 사고관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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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대황야 북부 망령 집단군의 망령 군주, 투탄 가르텝을 처치함.
13) 해당 망령 군주의 유물을 사용, 네크로폴리스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
14) 대악마 격멸 작전을 시행.
15) 네크로폴리스의 대악마 뭄토 처치, 해당 과정에서 현장 요원의 성흔을 상실.
16) 네크로폴리스의 격멸을 확인. (붙임 8. 샥시시 현장 관측 보고서)
17) 호족 연합과 접촉, 이후 동부 연맹으로 복귀.
작전 테스크포스 팀.
1)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 복귀
2) 토치맨,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 복귀
3) 토치맨, 아벨 – 복귀
악마, 이단, 마녀를 불태우리라.
작전 책임자 :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검토자 : 디모니카 제피스 시라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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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른은 보고서의 마지막 단락에 포함된 한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제피스의 필치였다.
[검토 첨부] 시성 자문단 소집 요청.
베오른은 머릿속을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성자가 성흔을 잃었다.
성흔이라는 것은 신이 내리는 성자의 상징이자, 그 증거물. 이를 잃었다는 것은 어쩌면 배교에 가까운 신성 모독이다.
그러나, 대악마를 처치하는 것에 소모되었다면···? 그 모든 것이 신의 안배였다면? 이 성자에게 성흔을 내린 것 자체가, 대악마를 격살하기 위한 신의 계획이었다면?
성자는 성흔을 입은 자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성자란, 성인의 생 전반에 걸친 그 업적을 통해 시성되는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
그러니, 제피스가 요청한 시성 자문단은···. 페르난데스를 진정한 의미의 ‘성자’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성흔의 유무와는 별개로, 그의 업적은 필멸자의 것이 아니었으니.
“대악마를···. 죽였다고···.”
이 시대를, 아니 문명 사회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단 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업적이다.
저 먼 상고 시절, 천상 전쟁의 치열한 아귀다툼 속에서도 대악마가 격살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명 사회의 악은 곰팡이처럼 퍼져 있고, 모든 그림자 속에선 악마가 울부짖는 시대다. 베오른은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것이 나날이 악화될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이단심문관들. 인류 문명의 최전선을 지키는 횃불이자 보루인 이들이 선택해야 할 것은 단순했다.
종말과 타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향하는 이 시대를, 차악으로 돌리는 것.
그 대가가 설령 그들 자신의 목숨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타고 남은 잿더미는 한때 그들이 빛났음을 증명하기에.
그러나, 베오른은 거기까지 생각하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문양들이 찍혀 있는 대륙의 전도를.
길가에서 실종된, 생사를 파악할 수 없는 요원들과 올해 발생한 이단 사건들에 대한 기록들을.
“만일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볼 수 있는 광경이 종말이 아니라면.”
주여, 답을 주소서. 이것이 당신의 계획이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우리의 차악이 아니었다면.”
최선의 결과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마침내 마지막 악마가 숨을 다하고, 문명 사회의 질서와 정의가 온전히 도래할 수 있다면···. 그런 미래가 있다면.
“그 효시는 대악마의 죽음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베오른은 교황청을 향해 서한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시성 자문단의 소집을 요청하는 정중한 제안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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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데스는 헐떡거리는 루트비히를 바라보며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칼을 잡은 감각이 너무 크게 달랐다.
‘몸이 너무 가벼운데···?’
디모니카의 신성이 흐르는 육신은 일반적으로 정점에 도달한 검사와 거의 동수를 이루거나, 그보다 살짝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디모니카의 축성된 육신은 소재만 적합하다면 시술을 통해 양산이 가능했지만, 검술의 재능이나 기교를 늘려주는 것까지는 아니었으니.
정점에 도달한 검사에겐 마력이 깃들고, 그 신체 능력이 뛰어 오른다. 루트비히는 그런 검사 중 하나였다.
루트비히가 방심했기도 했고, 그가 최선을 다하고자 하기도 했다. 그러나, 육신의 출력이 범상치 않았다.
-챙!
루트비히의 검격이 눈에 읽힐 듯 가까웠다. 칼날이 얽히고 칼등으로 공세를 흘리며 검격을 잡아채 튕겨내기까지 단 두 수에 이루어졌다.
-스르릉.
칼날이 루트비히의 목젖 끝에 닿기 직전, 루트비히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칼을 뿌리듯 휘둘렀다. 그는 거리를 벌리고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원탁 기사 알베르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귀하의 연령이 혹···?”
“열 일곱이오.”
“···제기랄. 괴물이군.”
루트비히는 픽 웃으며 장검을 납도했다. 주위에 도열한 기사들이 일제이 감탄을 터트렸다. 치열한 격전이었으나, 압도적인 승리였다.
“실례했소. 내 그대들에게 했던 모욕을 철회하고, 진심으로 사죄드리지. 내 언사가 경솔했소.”
“놀랍군. 기사단장 씩이나 되는 분께서 그렇게 겸허하게?”
“이 꼴로 오만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루트비히는 털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왕실에서 그를 파견하며 내린 임무는 원탁 기사를 꺾으라는 것이었고, 그것이 실패한 이상 ‘오만한 외국 귀족’ 역할을 도맡을 필요 따윈 없었다.
애당초 맞지 않는 옷이었다. 루트비히는 픽 웃었다.
“경께서 오 년만 젊었으면 결과가 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겸손하시군. 과연 기사도의 상징이라 불리는 분 답소. 하지만 아니오. 내가 오 년이 젊었다면, 오 년만큼 미숙했겠지. 경은 나보다 뛰어난 기사가 맞소.”
루트비히는 깊은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고는 뒤를 돌아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마른 수건을 들고 있던 아벨이 그에게 다가와 이마를 닦아주며 말했다.
“검술이 크게 늘었구나. 한 달 사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야.”
“운이 좋았소.”
“운이라···. 그래, 그간 있었던 일은 쉬면서 들어 보자꾸나. 혹 식사가 아직이라면, 함께 들지 않겠느냐?”
“기꺼이.”
페르난데스는 아벨에게 수건을 받아 들어 목 언저리를 닦으며 말했다. 아벨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