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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39화 (140/388)

< 139. 용호상박 >

*

페르난데스는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지난 전투를 복기하고 있었다. 루트비히와의 대련 뿐만이 아니라, 지난날 그의 결투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명상에 잠겨 있었다.

‘검로가··· 보이는군.’

검의 나아감과 물러남, 힘의 얽힘과 반격의 실마리. 저기서 저렇게 쳤다면 어땠을까, 또 저기선 저렇게 했다면? 격전을 거치며 그가 휘둘렀던 검격의 부족한 점들이 눈에 선했다.

[대검 검술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닐세, 형제.]

벌써 먼 옛날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단심문청의 검술 교육 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검 검술의 묘체는 회전력과 이를 통한 반격에 치중되어 있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가 했던 검술은 그저 힘 센 아이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몽둥이와 다를 바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디모니카의 육신은 마력을 거부한다. 베이타서스의 신성은 흑마법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었고, 이를 체내에 녹여내는 디모니카 시술은 결과적으로, 무예의 정점에 도달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

지금 그의 경지를 감히 정점에 도달했다고 보긴 어려웠으나, 디모니카의 육신을 입은 이상 그 발전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 시야는···. 이 감각의 개화는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페르난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칼자루를 잡고, 비가 쏟아지는 심야의 연병장으로 나아갔다.

-야밤에 칼춤이라도 추려느냐?

‘머리를 좀 비워야겠어.’

-하하, 네가 더 비울 머리가 있단 말이냐?

‘페이자쉬, 네가 아는 만큼 내가 안다는 사실을 좀 상기해줄 필요가 있군. 자가당착적이지 않나?’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막사의 문을 열었다.

*

칼날이 빗물을 튕겨내며 뻗어 나갔다. 촤르륵, 빗방울이 칼끝에 걸리는 감각이 새로웠다. 격한 움직임으로 심장이 맥박치며 몸이 뜨거워지고, 초겨울의 찬 비가 시원하게 피부 위를 식혀 내린다.

마치 담금질하는 강철과 같이. 달아오른 주물을 기름에 단련하는 것처럼. 그의 몸은 뜨겁게 타오르고, 다시 차갑게 식어내리고 있었다.

언제나 최소한의 기능성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온몸을 혹사시켰던 페르난데스로서는 드물게도, 만전의 컨디션에 가까운 몸이었다.

-쏴아아아···.

빗물이 칼등을 타고 흘렀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든 채로 꼿꼿이 서서, 어둠이 깔린 연병장의 정면을 응시했다.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스릉···.

칼날이 대기의 저항을 느끼며 멈췄다. 공간이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나, 칼의 끝에 그의 심상을 걸어 가르는 감각으로. 단도로 비단을 찢어내는 감각으로—

-콰직. 콰직.

칼의 끝을 얇은 살얼음에 박아 넣는 감각으로, 조금만 더—

-콰드드···.

정점에 도달한 전사에겐 마력이 감돈다. 그 말은 단순히 육신의 기능이 인간의 경지를 탈각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전사들은 자신의 전투 기술로 마법의 영역에 닿을 수 있으며.

-콰지지직···.

그러한 전사들이 평생에 이룩해 거쳐온 격전, 사선, 전장이 그들의 기술에 녹아내려 정수를 이루고, 그 총화가 피어나 마침내—

-콰드드드득!!!

베었다. 페르난데스는 뻐근하게 부어오르는 팔목 인대를 느끼며 칼을 한바퀴 돌려 납도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박동하고 전신에서 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과열된 혈관이 초겨울의 빗방울에 간신히 정상 체온을 찾아갔다.

“그 경지를 밟았구나.”

“아벨.”

연병장의 끝자락, 그 처마 아래에서 아벨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촥, 하며 우산을 펼쳐들고 천천히 그에게 걸어왔다.

“훌륭하다. 당년 다인, 그 아이의 경지에 닿았다.”

“아직 부족하오.”

다인 왕과 검을 섞어 보았던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다인 왕이 펼쳤던 검술의 정교함과 힘, 그리고 그의 경험을. 그는 당대 인류 최강에 한없이 가까운 사내였을 것이다.

공간을 갈아내는 검술. 페르난데스가 펼친 것은 그저 해답지를 펼쳐 보며 따라하는 저급한 모사에 가까웠을 터.

“모든 사람이 모든 일에 능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그 경지의 존재조차 평생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경지를 꿈에서나 그리며 잠이 든다. 너는 네가 잘하는 일이 따로 있지 않더냐.”

아벨이 우산을 건네며 말했다. 빗방울이 우산에 쏟아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페르난데스는 우산 아래에서 그를 바라보며 웃는 아벨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자랑스러워 하거라. 너는 검술에 있어서 어린 아이에 불과했었다. 지금은···. 장성한 한 사람의 기사가 되었구나.”

“디모니카의 육신으로는 불가능한 경지였소. 이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있겠소?”

“그래, 베이타서스의 신성을 품은 이들에겐 불가능한 경지지. 실제로 아직 네겐 실체화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혼의 격이 성장했다. 페르난데스. 너는 더 이상 필멸자의 혼에 그치지 않는 것 같구나.”

수많은 사선을 지나, 실제로 죽음을 밟고 이를 자신의 격으로 녹였다. 필멸자는 단 한 번 죽을 수 있지만, 페르난데스는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들을 지나왔다. 사선을 건넌다는 말은 적어도 그에겐 관용어가 아니었다. 죽을 위기가 아니라, 실제로 죽었던 위기들···.

그 많은 죽음들, 그 많은 경험들이 그의 영혼에 온전히 녹아 내렸다. 고대의 영웅, 위대한 전사들, 압도적인 강적들과의 격전에서 단련되고, 끝내 살아남아 업적으로 삼으며.

접쇠한 강철처럼 제련된 그의 영혼은 그 격이 더 이상 일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육신의 신성과 영혼의 격이 모여 그를 새로이 벼려내었다.

“내가 불멸자의 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오?”

“···거의. 너에게선 여전히, 디모니카들 특유의 신성이 느껴지지만. 그 뿐만이 아니구나. 네 영혼의 격이 필멸자를 뛰어넘어 탈각의 입구에 닿았다. 그 탓일 거야.”

온전히 신으로 승천했다는 것도, 반신이 되었다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탈각의 경계, 필멸자가 불멸의 신성을 취득하는 그 관문에 설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이 경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도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전생에서 이룩하지 못했던 일을 하나 더했군.’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았던 것이라 표현해주지?

‘못했던 것이 맞지.’

탈각의 관문, 일반적으로 준신이라 불리는 이 여정에 입성하기 위해선 홀로 오롯이 설 수 있어야 했다. 신도, 악마도 숭배하거나 신앙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쌓아 올린 업적만이 필멸자에게 신성을 벼려낼 수 있다.

마침내 그들의 힘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업적이 필멸자의 것을 초월했을 때. 그들은 신성을 얻는다. 선신 만신전의 대신들도, 저 지옥의 대악마들도 그러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니 전생엔 불가능했다. 악마 숭배자였던 페이자쉬에게는 닿을 수 없는 경지였다. 사실 그 시절에도 준신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초월자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절이었으니.

“대련을 원한다면 어울려주겠지만··· 검술의 깨달음이 필요한 시점은 아니겠구나. 어떻게, 이대로 교단에 복귀하겠느냐?”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남아 있소. 함께 해주시겠소?”

“기꺼이.”

아벨은 밝게 웃으며 그에게 우산을 건넸다. 페르난데스는 우산을 받아 쥐고 잠시 생각했다. 이건 설마···.

-그래, 바래다 달라는 뜻이다. 멍청아.

페이자쉬가 투덜거렸다.

*

동부 왕국 연맹의 철수가 초읽기로 다가왔다. 낮에 밖으로 나서기만 해도 그에게 말을 걸려는 기사들이 워낙 많았던 탓에 페르난데스는 의도치 않게 막사 안에서 근신하고 있었다.

행장을 정리하고, 이따금씩 명상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다. 대검을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가부좌를 튼 채로 눈을 감고 있을 때, 막사의 문이 열렸다.

“휴식 중에 죄송합니다. 기사님. 손님이 찾아와서···.”

“비켜라.”

“엇, 잠시, 앗!”

페르난데스가 천천히 감은 눈을 뜰 때, 막사 안으로 한 사람이 성큼 걸어 들어왔다. 시종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고, 그 사이를 거칠게 밀어 붙이며.

윤기가 흐르는 검은 망토가 화려하게 나부꼈다. 길고 아름다운 흑발과 몸을 탄탄하게 조인 가죽 갑옷이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부족은 어찌하고?”

“이미 예상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행장을 바라보며 그 곁에 자신의 짐을 내려 놓았다.

“자리 아직 남아 있나요? 타고 싶은데.”

“키르하스. 너는 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보다 더 위대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

페르난데스는 칼날을 납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르하스는 귀를 쫑긋거리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늘어진 꼬리에서 불안함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나는 네가 네 고향에서, 네게 주어진 권리를 즐기며 살길 바랐다.”

“하지만···. 여기엔 은공이 없는걸요.”

“후회하지 않겠느냐? 네가 포기하는 것들은, 본디 너의 것이 되어야 하는 자리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대족장, 대황야의 지배자, 불패자. 이러한 명성들과 그 명성을 뒤따르는 추종자들, 그들의 재산과 영향력.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의 길은 보다 비루하다. 보다 비참할 것이다.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두고 달려야 하는 경주와 같았다. 죽음이 그를 앞지르는 순간, 그 때가 그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결코 멈출 수 없는, 그러나 목적지는 여전히 아득하고 성공 가능성은 한 푼에 불과할 그 길에.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를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아벨의 표현에 따르면 그와 그녀는 표류자들이다. 서로의 시간에서 벗어나 이 시간선에 마주한 방랑자들이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 시기는 현재이며, 이 시대는 그녀의 것이다.

그러니. 페르난데스는 그녀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벨에게 가지고 있었던 것과 다른 종류의 부채감을. 그녀에게 정해진 길을 자신의 뜻대로 뒤틀어 놓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제 자리는 은공의 곁이에요.”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미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정체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키르하스를 그저 이용하기 위해 거두었다고 고백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생각했다. 만일 그가 단순히 그녀를 이용하고자 했다면, 그녀를 품었을 것이다. 그녀를 세뇌하고 조련하기 위해선 보다 더 쉬운 방법들이 넘쳐났다.

페르난데스가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그녀에게 새로운 위치와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단순한 부채감과 죄책감의 발로가 아니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그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아끼는 마음.

“그러니, 제 자리가 아직 은공 곁에 남아 있나요?”

“···언제든.”

“그렇다면 기꺼이.”

죽음을 벗삼아 달려야 하는 그 긴 고난을. 의심 없이, 두려움이나 슬픔, 후회 따윈 없이. 함께 나아가겠다고. 키르하스는 맹세했다.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은공.”

이유보다 목적이 중요하다고 속삭였던 흑마법사와, 복수를 위해 그 손을 잡았던 어린 노예 소녀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앞세우기 전에 아끼는 이를 안전한 장소에 남기고 싶었던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유와 목적을 오로지 당신으로 삼겠다고 말하는 여인이 여기에 있었다.

-사륵.

키르하스는 천천히 다가와 앉아 있는 페르난데스에게 허리를 숙였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잠시, 두 사람의 숨결이 얽혔다.

“보통 맹세는 손등에 하지 않더냐?”

“그건 풍류가 없지 않습니까?”

키르하스는 화려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걸로 한 번을 더 앞섰다. 그녀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불패자 키르하스가 함께한다면 그래, 할만 할 것이다. 그 적이 무엇이 되었든. 성흔과 마력을 모두 잃었더라도, 그녀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다음 계획을 시작할 시간이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단심문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긴 여름과 가을을 지나, 이제 겨울이다. 그리고 겨울은, 칼바람이 흩날리는 북풍을 타고 내려오는 법.

속세의 겨울은 아늑한 모닥불을 찾아 모이는 계절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겨울은, 가장 차가운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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