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시성 자문단 >
*
늦가을에서 초겨울, 페르난데스는 낙엽이 떨어져 바스락거리는 긴 산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이단심문청의 외성이 저 멀리에 보였다. 깊은 숲과 계곡 한 가운데 튀어나온 송곳니처럼 보이는 성이다.
-사박.
수많은 형제들이 그와 함께 걷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묵주를 굴리며, 이들은 작전 중 스러져간 형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길엔 항상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형제가 돌아오고, 작전 도중 대악마가 격살되는 위업을 세웠다고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개선식이었다. 형제의 관을 담은 운구차들이 선두를 나아가고, 그 뒤를 따라가는 길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끼이이익···.
성의 외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안으로, 본청의 모든 인원들이 나와 길을 열고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위로 흩날리는 붉은 깃발을 볼 수 있었다. 열쇠와 관, 그리고 검과 올리브 가지 문양이 그려져 있는 깃발이다.
‘교황이 친전했군.’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출발할 때 제피스에게서 시성 자문단의 소집에 대해 전달받은 바가 있었다.
시성 자문단은 일종의 청문회였다. 대단히 공격적이고, 날선 자리가 될 것이다. 심지어 이제 그는 성흔마저 잃어버린 일개 평신도에 불과했다.
평신도보다 어려운 환경이 될 수도 있었다. 성흔을 상실했다는 것은, 신의 축복과 인정을 박탈 당했다는 의미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으니···.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펄럭이는 교황의 깃발을 바라보며 웃었다. 교황이 친전했다는 뜻은, 교황이 그를 지지하겠다는 의미였다.
저 먼 거리를 달려온 교황이 주재하는 시성 심사가, 실패로 끝날 리는 없었으니.
-우, 우우우, 우.
행렬의 선두, 운구차들이 외성의 입구를 지나자 가로의 수도사들이 일제히 허밍을 시작했다. 낮게, 높게, 복잡한 화음을 맞추어.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대신의 순교자 이 길 떠나니.
-낙원으로 천사들이 너를 인도하며,
-네가 올 때 선지자들 너를 영접하여
-신들의 전당이 너를 기다리리라.
-지상의 안온과 화평을 바라지 않으며
-다만 주의 거룩함을 찬미하여
-형제여, 우리 가는 길 언제나 같았으니
-다시 만날 때까지 기도 드리세.
-우리 중 가장 밝게 빛나던 이 거두시니
-이는 세상의 별이 되게 하심이라.
장송곡이 이단심문청의 앞뜰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사제들은 눈물 흘리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축복할 뿐. 떠난 형제들은 그저 다소 앞서 갔을 뿐. 언젠가 그들의 운명 또한 다르지 않을 것임에.
운구차의 위로, 형제들이 꽃 대신 열쇠검을 꽂고 갔다. 작은 로사리오들이 운구차의 표면을 따라 고슴도치처럼 박혀 들어갔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우리 중 가장 빛나던 이가 전당으로 향하니.
-이는 전당의 등대 되게 하심이라.
페르난데스 또한 자신의 열쇠검을 운구차에 박아 넣었다. 죽음이 가깝고 사별이 흔한 시대에서, 사제들에게 비탄은 부산물에 불과했다. 열쇠검 성소로 운구되는 관을 바라보며, 사제들은 일제히 기도했다.
“형제.”
제피스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페르난데스가 그를 바라보자, 두 눈이 붉게 물든 제피스가 그에게 메마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하께서 기다리신다네. 가세.”
“예, 형제님.”
산 자에겐 산 자의 시간이 있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묵념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
대예배실의 입구엔 화려한 갑옷을 차려 입은 교단의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윤기나는 할버드를 치켜들고 다가오는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그대가 페르난데스 형제요?”
“그렇소.”
“겸허하시오. 성하의 친전이시니.”
페르난데스는 할버드 사이로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웃었다. 겸허라. 교단의 기사들은 화려한 예전 갑주를 입고, 좋은 숙식을 제공받지만 이단심문관들은 그렇지 못했다. 서로의 우열을 가리기에 앞서, 이들의 훈계가 우스웠다.
-끼이익.
예배당의 문이 열렸다. 붉은 융단이 깔린 통로 끝에, 교황이 자주색 법의를 입은 다른 사제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들의 시선이 페르난데스의 몸에 닿았다. 페르난데스는 통로를 걸어 교황의 앞에 부복했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페르난데스 세르너드가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형제.”
교황은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내려보았다.
“서한으로 그대의 소식을 들었네. 놀라운 업적과 자취를 남겼더군.”
“한 사람의 업적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일들을 말이야.”
교황의 곁에 있던 사제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나는 칼리오치니 추기경일세. 시성 자문단의 소집으로 여기에 왔네. 평사제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그대는 진정 성흔을 잃었는가?”
“예.”
짧은 침묵 끝에, 교황이 입을 열었다.
“본인은 형제가 입은 은총을 직접 보았다네. 혹시 보여줄 수 있는가?”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앞섶을 풀어 가슴을 드러냈다. 단단하게 단련된 강인한 흉근이 성소의 횃불 아래에 드러났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깨끗한 살갗에, 교황이 탄식했다.
“정말이로군. 어찌 된 일인지 들을 수 있겠나?”
“대황야의 악마를 격살하는 과정에서 소실되었습니다.”
“성흔이 소모품인줄은 몰랐군. 평사제. 혹 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았겠는가?”
칼리오치니 추기경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그 말의 끝에 내제된 함의를 알 수 있었다. 타락. 추기경은 그가 타락해 성흔을 잃은 것이 아니냐 묻고 있었다.
“우리는 만신전 전당의 입구를 여는 열쇠라. 추기경 예하. 성흔은 그저 주의 도구일 뿐, 제 신성함과 정결함을 상징하는 표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격살하는 과정에서 소실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제가 입은 성흔은 [불사의 축복]이었습니다. 임무 보고서에 상신한 대로, 저는 대악마의 불멸성을 불태우는 대가로 제 축복을 제물 바쳤습니다.”
죽음의 반대항은 불사이니. 죽음을 죽이기 위해 불사의 축복이 사용되었다. 지극히 관념적인 문장이었지만, 사제들은 본디 관념을 사유하는 수도승들이다. 페르난데스의 뜻대로, 추기경은 침묵했다.
교황은 무릎 꿇은 페르난데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타락의 기운이 느껴졌다면, 그 누구보다 이단심문청의 다른 형제들이 먼저 눈치 챘을 걸세. 본인은 형제를 의심하지 않는다네.”
“성하 하지만···.”
“그만.”
교황은 페르난데스를 내려보며 말했다.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하다네. 형제. 정녕 대악마가 영원히 소실되었는가?”
“그렇습니다.”
“주의 거룩함을 찬미하라.”
교황이 성호를 긋자, 추기경들이 일제히 따라 성호를 그었다.
“물질 세계에 다시 없을 위업을 이룩했군. 형제가 이 시기에 우리에게 온 것이 주의 뜻이 아니었겠나? 페이른 왕국의 오랜 타락을 정화했고, 데인 왕국을 정화했으며, 이어서 대황야를 정화했군. 형제가 가는 길에 축복을 더하고 싶으나, 일개 필부에 불과한 본인이 더 이상 더할 축복이 없네.”
교황은 추기경들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시성 자문단은 의례에 불과하네. 대황야의 황무지 위로 들풀이 피어 오르고, 생명이 돌아오는 징조가 각지에서 보고되고 있다네. 이미 모든 증좌가 명징하니, 본인은 이 청년을 시성하기를 권하는 바일세.”
“···성하께서 친전하신 뜻이 본디 그렇지 않았습니까.”
“다만 확인이 필요했을 뿐.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제 의무는 만장일치의 반대입니다. 성하. 하지만···.”
칼리오치니 추기경은 페르난데스를 잠시 노려보다가, 곧 눈에 힘을 풀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짧게 성호를 그었다.
“형제가 하려는 모든 일에 주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일어나게 형제, 이제 그대의 성직을 복권하니. 그대는 ‘대황야의 성자’일세.”
물론 결론은 예상한 바였지만, 페르난데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교황을 올려 보았다.
“이렇게 조속히 결정 지어도 괜찮은 일입니까?”
“이미 자네가 도착하기 전에 결론은 나 있었다네. 형제의 말대로 성흔은 그저 표상일 뿐, 본질이 될 수는 없지. 성흔이 있다고 성자가 되었던 과거가 오히려 더 조급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제 보고서를 모두 믿으십니까?”
“믿지 않기를 바랐나? 이미 증거가 너무나 많지 않나. 비단 그대의 보고서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건의 모든 방면에서 각기 다른 이들의 보고와 증언을 수집한다네.”
오히려 이것이 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성이라 할 수 있지. 교황은 웃으며 페르난데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시종이 다가와 교황에게 작은 그릇을 건넸다.
교황은 그릇에 엄지를 찍고 페르난데스의 이마에 기름을 발랐다.
“복자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주의 은총이 함께하라. 이는 필부의 축복이 아니오, 주의 기름부음이니. 기꺼이 받들라, 그대의 앞길이 언제나 복되기를.”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추기경들이 일제히 기도하자, 예배당의 횃불이 밝게 타올랐다. 예배당의 끝에 있는 거대한 열쇠검 조각상이 한 순간 횃불에 밝게 빛났다.
“그대는 하던 대로 하던 일에 매진하라. 의심과 미혹 없이 나아가라. 판단은 우리의 일이 아니오, 오직 주의 몫이니. 그대의 앞길이 언제나 복되기를.”
“오직 주의 거룩함을 찬미하라.”
추기경들의 기도 속에서, 페르난데스는 베이타서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영혼이 필멸자의 격을 벗어나며, 신성을 품은 존재감에 대해 더욱 예민해진 탓이었다.
봉문한 주제에 볼 건 다 보고 있었군. 베이타서스. 그래, 기쁜가? 너에게 기도하는 네 병정들이 우스운가?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아니, 나는 네 변절이 기껍다.]
페르난데스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시간이 멈춰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교황과 추기경들이 석상처럼 굳어지고, 공중을 떠다니는 먼지들마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사이로, 베이타서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악마숭배자 페이자쉬가 아니로다. 너도 너의 변함을 느끼지 않았느냐? 너는 친지의 죽음, 정의의 소실, 형제의 희생에 애통할 줄 아는 성인이 되었다.]
“내 성향을 바꾼 것은 네가 아니야.”
[모두 네게 내제되어 있었던 것일 뿐. 내가 아니지. 네가 옳다. 페르난데스.]
“내가 한 일들은 너를 위함이 아니었다. 그리고 네가 짜둔 계략이나 판도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도 아니었어.”
[그래. 나는 그것이 기껍구나. 과거엔 그렇지 않았더라도, 이제 너는 나와 같은 시야를 눈 아래에 두고 있다. 페르난데스. 이제 나는 네게 성흔이나 축복을 내리지 않겠다.]
베이타서스가 걸어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페르난데스가 얼떨떨하게 그 손을 잡자, 베이타서스가 웃었다.
[네겐 그런 것들이 더는 필요치 않다. 너는 나의 하수인도, 기물도, 또는 적도 아니오. 다만 나의···. 네 표현대로라면, 동업자가 되었다.]
하지만 선물을 주마, 필멸자들에겐 명징한 증거가 필요한 법이니. 베이타서스는 웃으며 손을 떼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대검이 남아 꽂혀 있었다. 열쇠검. 베이타서스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이 그 자리에 남아 서 있었다.
-오지랖이 심하군.
페이자쉬는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렸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갑작스러운 광휘와 신의 존재감, 그리고 돌연 나타난 신물에 경악하는 교황과 추기경들을 보았다.
‘그러게. 오지랖이 심하네.’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일어서서, 열쇠검의 칼자루를 쥐고 뽑아 들었다.
“주의 거룩함을 찬미하라···.”
교황의 감탄을 들으며, 페르난데스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교황과 추기경들을 내려보았다. 이 위치가, 신이 바라보는 자리로군. 그래 베이타서스, 우리는 이제 같은 시야를 눈 아래에 두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