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먼 바다의 이방인 >
*
시성 자문단 이래로 한 달이 흘렀다.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쥔 채 훈련장 한복판에서 눈을 맞고 있었다. 겨울이 정점으로 향해, 성성한 눈발이 칼 끝에 내려 앉고 있었다.
“후···.”
연민검 다인, 파괴되지도 날이 상하지도 않는 유물. 공간을 갈아내어 버리는 다인 왕 특유의 검술을 재현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검이 필요했다.
검술의 극의라 부르는 지점은 막연하고 관념적인 경지였다. 칼을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기민하게 몸을 돌리고, 더 격렬하게 칼날을 휘두르는 것. 그러한 기교의 단계 벗어나 어딘가, 탈각의 경지에 도달한 곳···.
-스르릉.
눈발이 휘날렸다. 칼날이 허공을 치고 다시 돌아오는 짧은 한 수에, 그의 몸 주위를 감고 있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터져 나가듯 비산했다.
“실패했군.”
“조급해 하지 말거라.”
처마 밑에서 따듯한 코코아를 마시던 아벨이 살풋 웃었다. 그녀가 쥔 잔에서 모락모락 따듯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휘둘러 납도하고 천천히 연단 밑으로 내려갔다.
“네가 그 경지를 답보한 것이 이제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사람이 아무리 빨리 자란다 하더라도, 네 조급함은 과하구나.”
“느긋하게 성장할 시간 따윈 없소.”
“그래야 할 게다. 나는 네가 어딘가 틀어박혀 몇 년이고 수련했으면 하는구나.”
“시대가 변하고 있소. 아벨.”
대악마 하나를 죽였지만, 아직 넷이 남았다. 대황야의 사태 이후로, 이 세계는 그가 아는 시간선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이젠 읽어낼 수 없었다.
반면 그는, 불사를 잃어버린 그가 가진 것은 칼자루와 다소 발달한 육신, 그리고 하루에 몇 차례 사용할 수도 없는 청동 왕좌의 마법 뿐이었다.
사소한 악마 추종자나 시답지 않은 잔챙이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한 전력이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고작 그런 곳에 있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손목 어림에 남아있는 충격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곁에 앉았다. 사륵, 하고 아벨의 손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너는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 네가 이룬 업적들, 그리고 네가 가진 힘들은 일개 필멸자의 것을 벗어났다. 지금 너의 성장에, 그리고 너의 성미에, 네가 할 수 있는 찬란한 영광들에 기쁘구나.”
아벨은 따듯한 잔을 그의 손에 쥐어주며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내려보다가, 살짝 홀짝였다.
처마 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방이 눈발로 가득해 거대한 장막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수도승들의 기도 소리와 종탑의 맑은 종소리가 겨울철 산속 수도원에 흐르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은공.”
탓, 하고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키르하스가 담벼락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코 끝을 찡그리며 코코아의 냄새를 맡고는 담 아래로 뛰어 내렸다.
“수도원장 님께서 찾으십니다.”
“이르군.”
장기 작전의 경우, 다음 임무 배정까지 시일이 걸리는 편이었다. 항상 격전지를 오가야 하는 이단심문관들의 소모를 최소화 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석 달은 걸렸던 지난 작전 직후에, 한 달이 온전히 지나기도 전에 새 임무가 하달되다니.
“행장을 꾸릴까요?”
“그래. 마르티리오 형제에게 병장기를 충분히 보급 받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찾아가마.”
“예, 은공.”
키르하스의 시선이 잠시 아벨의 눈에 닿았다가, 살짝 떨어졌다. 페르난데스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따, 땀에 젖어서 더럽습니다. 은공.”
“괜찮아. 열심히 노력 하는구나.”
“···네.”
페르난데스처럼, 키르하스 또한 이 한 달간 격렬한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힘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 아니었고, 이를 체화시키는 것엔 오로지 그녀 자신의 깨달음과 훈련만이 필요했다.
영혼이 섞이며 몸 안에 스며든 경험과 재능들. 다인 왕과 페르난데스가 그러했듯이, 키르하스의 것 또한 짧은 순간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머리칼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벗어 두었던 망토를 둘렀다.
*
문을 열고 들어서니, 수도원장실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베오른은 커다란 탁상 맞은편에 앉아서 방문객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부르셨다고 들으셨습니다만···.”
보라색 로브를 뒤집어 쓴 호리호리한 이방인이 페르난데스에게 등을 돌린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단심문관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기밀 사항이다. 임무 하달에 외부인이 있는 경우는 처음이라, 페르난데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앉게. 형제. 형제라면 아는 얼굴일거야.”
“그래. 오랜만이군. 이단심문관.”
이방인이 그를 돌아보며 후드를 벗었다. 옷깃의 뒤로, 긴 은발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 사이를 삐죽 튀어나온 날카로운 단검 같은 긴 귀가 보였다. 토파즈를 닮은 푸른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레이아 여왕. 내륙 깊숙이 어쩐 일이오?”
“그대를 만나러 왔지. 내가 이 대륙에 용건 있는 이가 그대 말고 더 있겠나?”
레이아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맞은편 자리로 나긋하게 손을 뻗었다.
“앉게.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군.”
페르난데스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레이아의 얼굴은 전혀 변한 것이 없었지만, 노련함과 자신감은 여전히 그녀의 눈가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혹여라도 전령을 보내지 그랬냐, 라는 멍청한 질문은 하지 마. 내 백성들은 내륙을 밟을 수 없으니, 내가 직접 올 수 밖에.”
“하프엘프가 여왕님 하나 뿐은 아닐텐데요.”
“그 아이들은 활동 경험이 적어서 내가 불안해. 뭐든 내가 하는 편이 가장 확실하지.”
레이아는 픽 웃고는 차를 홀짝였다. 페르난데스는 테이블 위의 찻잔을 잡고는 베오른을 바라보았다.
“임무라는 것이, 이번에도 파견 임무입니까?”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네만. 이번엔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
지난번 파견 임무 때 페르난데스가 죽을 뻔 했다는 점을 상기하며, 베오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너희 늙은 인간은 대단히 깐깐하더군. 걱정 마, 이단심문관. 너는 우리 최고 귀빈 대우를 받으며 안전한 겨울철 선상 여행이나 즐기라고.”
“용건이 뭐요?”
“항상 이렇다니까. 아하하.”
한참 깔깔거리던 레이아가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어 건네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말레이른, 천각마탑의 말레이른. 엘프 서펜트 킹의 한 자리를 차지한 그 늙은 왕이 북해로 접근하고 있어.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나고 있지. 하지만 놈들의 기함을 파괴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럴 것이다. 엘프 왕의 기함은 용의 숨결, 드워프의 화력, 또는 대악마의 저주로만 파괴할 수 있다. 배가 곧 자신의 성이자 영토인 이들에게, 왕의 기함은 편집증적으로 보호해야만 하는 것이었으니.
레이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시대에, 엘프 왕의 기함을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은 아주 드물어. 하지만 우리의 여신께선 모든 엘프 왕들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리셨지. 자, 내가 아는 인물 중엔 기함을 파괴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자가 있는데.”
“우연이었고, 두 번 성공할 자신도 없는데다가, 그럴만한 자원도 없소.”
다섯 왕좌의 손아귀. 페이자쉬가 가진 파괴 주문 중 가장 강력한 주문. 그것을 사용한다면 엘프 왕의 기함을 파괴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했다. 백래시를 감당할 수 있는 상황, 활용할 수 있는 충분한 지옥 마력, 불사의 육신. 셋 모두 없는 상황에선 결코 시전할 수 있는 주문이 아니다.
“바다엔 수많은 것들이 흘러 들어오지. 엘프 왕실만큼 고대 유물들이 많고, 부유한 왕실이 없어. 이단심문관.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모두 확보해주지. 단 한 번, 놈들의 기함을 단 한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허물어주면. 그 이후엔 우리가 모두 해결할 거야.”
페르난데스는 턱을 고이고 상념에 빠졌다. 다섯 왕좌의 손아귀를 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엘프 왕조를 무찌른다는 것은 인류 문명 사회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포기하기엔 아쉬운 상황이다.
그러나···.
“말레이른의 영역은 서해가 아니었소? 북상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고 계시오?”
“놈들은 신을 사냥하고 있어.”
레이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만신전에 들어서지 못한 소신격들, 준신들, 또는 반신들. 아마도 우리 아버지와 같은 이유였겠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고, 어떻게 성공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놈들이 종족의 저주를 해소하고 싶어 한다면, 그대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텐데?”
“신의 영성을 소모해서 저주를 풀자? 그게 가능한가? 글쎄, 확실하진 않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확실한 계획이 있어. 멜리실두르께선 엘프 왕조가 품고 있는 모든 여신의 신성을 풀어준다면 우리의 저주를 없애겠다고 약속하셨지. 이게 더 확실하고 안전한 거야.”
전생, 물질세계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그 시기에 엘프 왕조들은 어느 순간 온 세상에서 거품처럼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정말 증발하듯 사라졌었다.
엘프 왕조의 계획이 끝내 성공해서 신들의 세상으로 향한 것일까? 아니면 신의 저주가 겹쳐 종족 전체가 소멸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마치 한 순간에 사라진 드워프들처럼.
당시 페이자쉬는 그 사실이 궁금할 새도 없었다. 전쟁이 한창이었고, 적이 될 수 있었던 세력이 사라졌다는 것은 어쨌거나 나쁠 것 없는 일이었으니.
그러나 페르난데스로서는···. 놈들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짓을 저지를지 궁금했다. 더불어···.
‘북방 해상을 온전히 장악하면 에리크의 남침을 막아낼 수 있다.’
칠흑의 에리크, 그가 이끄는 북부인들의 침략은 바다를 건너야 성립이 가능하다. 해상 최강이라 불리는 엘프 왕조의 군함들이 대륙을 지켜준다면, 위협을 초기부터 근절할 수도 있었다.
그는 레이아의 제안 그 이상을 바라보아야 했다. 말레이른은 무찌르고 레이아의 왕국이 해상 지배권을 공고히 할 수 있다면, 문명 사회의 큰 위협 하나를 근절할 수 있었다.
“그리 오랜 여정이 되진 않을거야. 놈들의 정박지는 이미 파악해 두었으니. 북방 해상은 우리의 영역이야. 피라미 한 마리도 벗어날 수 없지. 단번에 놈들의 종심을 타격하고, 우리의 깃발을 사해에 떨쳐 보자고. 이단심문관.”
레이아는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참 듣고 있던 베오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엘프 왕의 기함을 우리 형제가 파괴했다고? 그런 보고는 받지 못했는데?”
“어··· 신의 보우하심이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군. 형제.”
“가라사대, 너는 다만 간구하라. 주께서 네 필요함을 알고 네게 그것을 더하시리라. 참으로 그렇더군요. 막토!”
베오른은 한참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피식 웃었다. 그는 손을 탁, 털며 말했다.
“임무 제안서를 가져오게, 형제. 형제가 괜찮다면 나쁘지 않은 사건이로군.”
“이단 사건이 아닌데도 괜찮습니까?”
베오른은 그 말에 우습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을 사냥하는 무신론자 왕이 어떻게 이단이 아니란 말인가?”